퇴임사(김영란)

2010.09.02 09:06

범의거사 조회 수:16678

아래 글은 2010. 8. 24. 퇴임하신 김영란 대법관님의 퇴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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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   임   사

 

존경하는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그리고 판사님, 법원직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에게 따뜻한 배려와 사랑을 베풀어 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제 퇴임의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1979. 9. 사법연수원에 들어와서 1981. 9. 처음 판사로 임명된 이래 오늘까지 법원은 제가 몸담은 유일한 직장이었고 사회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법원은 제가 재판연구관과 대법관으로 11년을 일하여 법관생활의 4할 가까이를 보낸 곳입니다. 대법원에서 제 법관생활의 마지막을 마감하게 된 것에 남다른 감회가 있습니다.

 

  6년 전 저는 대법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그때까지 그런 것을 의식하면서 판사생활을 해오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좋은 판사가 되어야겠다는 것만이 유일한 바램이었습니다. 당시 대전고등법원에 근무하던 저는 갑자기 대법관제청자문회의의 심의에 동의하라는 요청을 받고 곧바로 심의부동의서를 제출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러자 왜 심의단계에서부터 거부하느냐는 연락이 있어서 부동의서를 철회하였습니다.

 

  2004. 7. 23. 오전 8시 경이었습니다.  출근하는 길에 저는 대법관에 제청되었으니 즉시 상경하라는 전화를 받고 오늘이 재판 날이니 재판을 해야 하는데요 되묻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최초의 여성대법관으로서 출발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몹시 불편하고 두려운 가운데 업무에 임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좋은 대법관이 되는 것만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고 최선을 다하고자 하였습니다.

  제가 경험한 대법관의 자리는 출세의 자리도 아니었고 법관들의 승진자리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고 거기에서 바람직한 최선의 길을 찾는 고뇌의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그런 대법원이 되어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저는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는 직책이 아닌 대법관으로서 과연 사법부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늘 골똘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법부를 선출직으로 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다수결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다수자의 권리를 확인하는 것에서 사법부의 존재근거를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수자의 권리를 소수자의 그것과 단순히 대체하는 것은 소수자가 다시 다수자가 되는 논리이기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법치의 혜택을 점점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으로 제 직책에 임했고 다른 어떤 기준도 이러한 입장보다 앞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판사라는 직업은 판단하고 처벌하는 직업입니다.  저는 과연 이 직업을 통하여 얼마나 힘든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는지, 얼마나 슬픈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었는지, 얼마나 답답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는지 항상 자문해왔습니다. 그렇게 제게 주어진 그 칼은 제게는 늘 무겁기만 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그 칼을 돌려드리고 법원 밖의 세상으로 나갑니다. 끝 너머에는 항상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30년 가까운 법관의 경험을 살려 세상에 기여하고 봉사할 수 있는 새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법원 가족 한 분 한 분과 그 가정에 행운과 건강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2010. 8. 24.  김 영 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