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이몽룡

2010.02.16 14:26

범의거사 조회 수:16160


=광한루와 오작교=


  어제 국립극장에서 한밤중에 열린 성창순 명창의 보성소리 춘향가 공연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74세(1934년생)라는 나이에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경이스럽기만 하였고, 이제껏 말로만 듣던 명창이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가를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같이 출연한 제자들도 물론 잘 불렀지만(특히 김명자 명창의 노련함이 돋보였다), 아직은 거목 같이 우뚝 서 있는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기에 이르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만큼 성창순 명창의 소리가 독보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밤 12시가 넘도록 자리를 지킨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추억에 남을 공연이었다.

  각설하고,

  춘향전의 주인공인 이몽룡은 소위 "선수'이고, 춘향이는 '요부'라는 해석이 있다(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4/13/2007041300650_2.html).
  이러한 해석의 당부는 차치하고, 순수 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몽룡의 기망행각이 눈에 보인다.


  그 하나...

  이몽룡은 부친이 동부승지로 발령 나는 바람에 춘향과 헤어져야 했고, 그 사실을 알리러 춘향집에 가서 춘향이랑 주고받는 말 가운데, 이별에는 모자이별, 부부이별, 붕우이별이 있다면서, "서출양관무고인은 위성조우 붕우이별”이라고 줏어 섬긴다. 붕우이별(朋友離別)은 말 그대로 벗들 사이의 이별인데, “서출양관무고인은 위성조우”는 또 뭔가?

  이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 중 이백, 두보와 더불어 3대 시인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왕유(王維 : 699~761. 그는 시인이자 화가였다. 문인화인 남종화의 始祖로도 알려져 있다)의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渭城朝雨浥輕塵 (위성조우읍경진 : 위성 땅에서 아침 비가 흙먼지를 적시니)
客舍靑靑柳色新 (객사청청류색신 : 객사 마당 푸른 버들의 빛이 더욱 산뜻하구나)
勸君更盡一杯酒 (권군갱진일배주 : 그대에게 권하노니 술 한 잔 더 들게나)
西出陽關無故人 (서출양관무고인 :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더 이상 벗이 없나니)  

  이별을 읊은 詩의 백미로 꼽힌다. 제목인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는 ‘벗인 원씨댁 둘째 아들을 안서 땅으로 보내며’라는 뜻이다. 안서지방은 지금의 둔황 사막지대에 해당한다. 당나라 시대에는 서쪽으로 가는 사람을 전송하려면 장안의 서쪽에 있는 위성(渭城)이라는 곳까지 따라갔다고 한다. 거기서 다시 서쪽 관문인 양관(陽關)을 나가면 안서지방으로 접에 들게 되는 것이다. 아침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푸르기만 한데, 서쪽으로 떠나가는 벗에게 마지막 술을 한 잔 더 권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춘향이가 오리정에서 이몽룡에게 이별주를 주듯이...

  그런데 문제는 이 시는 그 성격이나 내용으로 보아 보내는 사람이 읊을 것이지 떠나는 사람이 읊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몽룡은 이 시를 가지고 말장난을 한다. 감언이설로 춘향이를 꾀어 실컷 놀다가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가려는데, 춘향이가 바지가랑이를 부여잡고 늘어지니...되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아 춘향이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그는 역시 '선수'답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일은 저질러 놓고 보되, 말썽이 나면 온갖 감언이설로 상대방을 혹하게 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꾼'의 모습이다.  


  그 둘...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가던 중에 춘향의 편지를 가지고 한양으로 가는 방자를 만나게 된다. 그 때 이도령은 방자더러 그 편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데, 방자가 곱게 보여줄 리가 없다. 그러자 이몽룡이 "옛말에 이르기를 부공총총설부진하여 행인임발우개봉이라 했으니라” 하자, 방자가 "그 양반 행색은 누추해도 문자속은 기특하다"면서 편지를 보여준다. 사실 방자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자기의 무식함을 감추기 위해 마치 알아들은 양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소리이기에...

  이 구절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 장적(張籍, 766~830. 그는 두보를 추종하여 시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두보와 비슷하다)이 지은 '추사'(秋思)라는 시에 나온다. 먼저 시의 전문을 보면,

洛陽城裏見秋風 (낙양성리견추풍 : 낙양성 안에서 가을바람 부는 것을 보니)
欲作家書意萬重 (욕작가서의만중 : 집에 편지를 써야겠는데 생각이 만겹으로 겹친 다)
復恐悤悤說不盡 (부공총총설부진 : 서둘러 총총히 쓰다 보니 할 말을 다 못했을까 두려워)
行人臨發又開封 (행인임발우개봉 : 편지 가져갈 사람 떠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뜯어본다)

  이 시는 작자 장적(張籍)이 낙양에서 벼슬살이(그의 벼슬은 미관말직이었다)를 하던 도중, 가을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문득 고향생각이 나서 지은 것이다. 그래서 제목도 ‘가을의 생각’(秋思)이다.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섬세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잘 묘사한 것이 특색이다. 그래서 송나라의 왕안석은 이 시를 평하여, “평범한 듯하면서도 기발하고, 쉽게 지은 듯한데도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하였다.

  그나저나 편지를 뜯어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편지를 쓴 사람이 혹시 못 다 쓴 이야기가 있나 싶어(부공총총설부진) 아직 편지를 부치기 전에 하는 것이지(행인임발우개봉), 이미 행인이 편지를 가지고 떠난 마당에, 그것도 편지의 작자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제3자가 중간에 뜯어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쯤 되면 이몽룡이 방자의 무식과 허풍을 이용하여 그를 상대로 사기를 친 것밖에 안 된다. '꾼'들은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청산유수로 상대방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선수' 이몽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기죄는 타인을 기망하여 재물을 편취하거나 재산상의 이득을 취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이다. 그러고 보면 이몽룡이 유식함을 자랑하며 춘향이를 따돌린 거나, 방자로부터 춘향의 편지를 가로채 읽어본 것은 적어도 사기죄에는 해당하지 않는 셈이다. 그는 역시 '선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