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사

2010.02.16 13:52

변재승 조회 수:13268

    퇴   임   사

  법관으로서의 첫 발을 디딘 지 36년이 지나 이제 저는 대법관의 임기를 마치고 법관의 자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먼저 오늘 이와 같은 퇴임식의 자리를 마련하여 주신 대법원장님, 오랜 기간 고락을 함께 나누어 온 대법관님, 그리고 바쁘신 중에도 귀중한 시간을 내어 참석하여 주시어 이 자리를 더욱 의미 있게 해주신 법원장님, 법관 및 직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법원의 문을 나서기 전에, 때로는 보람과 자부심으로 뿌듯하기도 했고 때로는 힘들고 안타깝기도 했던 법관생활을 뒤돌아보니 만감이 교차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느끼는 감회는, 저는 그동안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사람들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경향 각지의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제가 마주쳤던 선■후배 동료법관과 직원 여러분들은 제가 법관으로서의 역할을 올곧게 수행할 수 있도록 헌신적이고도 지속적인 가르침과 도움을 주셨습니다.
  만일 제가 조금이라도 법원에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법원가족 모두의 뜨거운 애정과 따뜻한 격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아쉬움입니다.
  법관으로서의 길은 힘들고 외로운 소명이었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 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만, 저 자신의 능력부족으로 법관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온전한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음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미국의 윌리엄 브레난 대법관의 「나는 최선을 다 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최선이 사회의 지향점이나 법원의 사명과 늘 일치하도록 노력하였다」라는 확신에 찬 퇴임의 변을 그대로 원용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뿐입니다.
  나아가 이 자리를 빌어 저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불편을 느끼거나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었던 모든 분들에게 너그러운 이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한편, 사법부의 구성원으로서 안타까운 느낌을 가질 때도 많았습니다.
  사법권의 독립과 법의 지배는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만, 이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사법부의 노력에 대하여 반드시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주위의 시선이 느껴질 때, 그 원인과 관련하여 사법업무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여야 할 법관의 막중한 책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그 책임을 다하여야 할 것을 다짐하면서도, 그러한 시선의 근저에는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사법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 사법현상에 대한 왜곡이나 와전 또는 편향된 사고에 근거한 오해가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법권의 독립은 순수한 정의의 요청이며, 이러한 요청은 정의 그 자체와 같이 절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다만, 법관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명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법관 개개인의 투철한 사명의식과 성실한 직업윤리에 의하여 사법의 기능이 적정하게 수행됨으로써 정의와 공정이라는 법의 궁극적 가치가 구현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 참된 의의가 부여될 수 있는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관들은 서슬 푸르게 깨어 있는 투명한 정신을 가지고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자적으로 판단하되 독선과 편견, 아집과 오만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며, 언제나 겸허한 자기성찰을 통하여 신중함과 경직되지 않는 유연성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에게 책임을 미루거나 책임을 나누어 부담할 수도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외로운 판단에 의하여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법관의 고뇌는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이며, 인간이기 때문에 범할 수도 있는 법관의 오류는 오로지 고도의 집중과 절제를 동반한 엄혹한 자기 단련과 절차탁마에 의하여 최대한 감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법관은 모름지기 일몰에서 일출을 읽는 예지와 혜안을 지니고 차가운 머리와 함께 뜨거운 가슴을, 파사현정과 함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냉철한 현실인식과 함께 균형감각을, 시대정신의 구현과 함께 法古創新의 자세를 동시에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퇴직에 앞서 지나온 법관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떠오른 감회를 두서 없이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법원을 떠납니다만, 제 마음만은 한없는 열정으로 그토록 사랑했던 저의 영원한 고향, 법원에 놓아두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법부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과 영광만이 가득하기를,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분들에게 건강과 행운이 충만하기를 기원하면서 퇴임사를 끝내고자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