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대법원장 취임사

2010.02.16 14:02

범의거사 조회 수:15730

  2005. 9. 26. 이용훈 제14대 대법원장님이 취임하셨다. 취임식장에서 취임사를 들으며 사법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관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아래는 그 취임사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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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 임 사

   오늘 저는 제14대 대법원장에 취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국민을 대표하는 시민, 학생 여러분과 사법부 구성원을 아우르는 법관 및 직원 여러분 앞에서 사법부의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게 되어 개인적으로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러나 한편 대법원장으로서의 막중한 역할과 책임을 생각할 때 무거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33년 동안 법관으로, 그 이후 재야 법조인으로 봉직하면서, 사법부가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본래의 사명을 다하여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모습을 항상 소망하여 왔습니다.
   그 동안 사법부 구성원들이 나름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국민들이 사법부에 거는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 땅에 근대사법이 도입된 이후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거쳐, 전쟁과 분단의 아픔 속에서 사법작용은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그 거친 역사의 격랑 속에서 사법부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인권보장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국민들은 사법부가 과거의 잘못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거듭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국민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는 우리들의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 위에 군림하는 과거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 또한 높습니다.
   대법원장인 저를 포함한 사법부 구성원들 모두는 국민 여러분께 끼쳐드린 심려와 상처에 대하여 가슴 깊이 반성하면서 엄숙한 마음으로 사법부의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저는 법원을 떠나 있는 동안 국민과 사법부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국민과 사법부 사이에 벌어져 있는 이 틈을 메우고 법원 구성원들을 위한 법원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법원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야말로, 오늘 저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법부가 행한 법의 선언에 오류가 없었는지, 외부의 영향으로 정의가 왜곡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 위에 군림하던 그릇된 유산을 깨끗이 청산하고, 국민의 곁에서 국민의 권리를 지키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법부의 시각에서 이루어진 묵은 제도와 낡은 관행을 과감히 버리고, 국민의 입장에서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조직과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재판의 결론은 물론이고, 재판의 과정 역시 공정하고 투명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스스로를 냉철하게 돌아보고, 참된 봉사자의 자세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이것만이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지난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는 용기와 뼈를 깎는 자성의 노력, 그리고 새로운 길을 여는 지혜의 결집이 요구됩니다. 저는 사법부가 국민의 뜻에 따라 새롭게 거듭날 수 있도록,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을 것입니다.

   대법원장으로서 저는 사법권의 독립을 훼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법부 구성원들이 모든 열정을 재판에만 기울여 소신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겠습니다. 사법개혁과 사법제도 선진화 작업에도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 임기 동안 기필코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사법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을 굳게 약속드립니다.

   사법부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국민 여러분의 지지와 성원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국민의 신뢰가 없는 사법부는 더 이상 존립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국민의 신뢰 없이 사법부가 존속할 수 없지만, 사법부 없이는 민주주의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법원을 믿어주시고, 법원의 변화에 대하여 성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법원은 오로지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무엇이 법이고 무엇이 정의인지를 당당하게 선언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법부가 선언한 법과 정의가 존중되어야만, 법이 지배하는 사회, 진정한 민주사회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법조인 여러분!

   사법부를 포함한 모든 법조는 국민으로부터 법에 의한 지배를 실현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수호하라는 소중한 책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제 법조는 오로지 국민만을 바라보고 국민의 편에 서서, 공정하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정의를 선언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법원에서 일하건, 검찰에서 일하건, 변호사로서 그 직무를 수행하건, 모두 다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국민 앞에서 직역 간의 구분이나 반목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국민에 대한 책무를 다하기 위하여 머리를 맞대고 함께 지혜를 모은다면 아직도 희망이 있습니다.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법조로 거듭나기 위하여 우리 모두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법부 구성원 여러분!

   사법부가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국민을 섬기고 국민으로부터 신뢰받고 존경받는 사법부, 국민과 함께 하는 사법부, 바로 우리가 꿈꾸고 소망하는 사법부를 이루기 위해 전진합시다.
이 길은 곧고 순탄하기만 한 길은 아닙니다. 때로는 편리함과 이로움을 버리고 수고로움과 자기희생을 선택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혼란과 현실적 장애에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입니다. 제가 앞장서 가겠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하면 어떤 도전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미래를 향한 준비와 기대의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사법부는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닻을 들어 올려야 합니다.
과거는 오늘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교훈이고, 미래를 설계하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밝은 미래의 세계로 전진해 나가려는 우리의 발걸음에 걸림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거친 바람과 파도를 뚫고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자유와 평등과 정의가 넘치는 그 날에 이를 때까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이 자리에 참석한 어린 학생들이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먼 훗날, 오늘을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사법부의 초석을 놓은 날로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 다함께 노력합시다.

   감사합니다.

                                 2005.  9.  26.

                                                 대법원장   이  용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