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륜적 범죄

2010.02.16 13:19

범의거사 조회 수:11636

"1941년 8월 14일 법령! 파비엥이 폭탄테러를 하자 페탱이 독일놈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파비엥 대신에 인질들을 잡아 사형시키기 위해, 8월 22일에 통과시킨 후 날짜를 소급해서 시행한 법령 말이야! 8월 14일 법령이 어떤 것인지 넌 상상하지도 못할 거다. 파비엥 대신에 파리에 사는 친구들이 붙잡혀갔지 뭐냐!... 만일 사흘이 지나도 테러범들이 자수하지 않으면 붙잡힌 가람들이 대신 처형되는 거야."  

  미셀 깽이 쓴 소설 "처절한 정원"(이인숙 옮김, 문학세계사, 2002)에서 주인공의 삼촌인 가스똥이 주인공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중의 일부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소설 속의 허구가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것도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20세기의 일이다. 과거 우리 나라에도 연좌제라는 것이 있어 大逆罪를 저지른 범인의 3족을 멸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범인의 자수를 유도하기 위해서 애꿎은 인질들을 잡아 처형한 예는 없었다. 인간의 잔인함은 과연 그 끝이 어디인가?

  "모리스 파퐁"--드골 정권하에서 파리 경찰국장을 지냈고 지스카르 데스땡 정권에서는 예산장관까지 한 인물이다. 그러나 1981년 그의 과거 전력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꼭두각시였던 비시정권에서 보르도 지역 치안 副책임자였던 그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1,590명의 유태인을 체포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다. 결국 그는 희생자 유족들의 고발로 1983년 정식으로 기소되었다. 위 소설에서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분명히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비시정부는 실제로 존재했었고, 역사에서 그 부분을 떼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또한 인류에 대한 책임, 인간의 존엄성, 도덕에 따른 행동이 어느 시대의 법률이나 명령보다 우선하기에 그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살인자는 자신이 목숨을 빼앗은 사람들의 삶과 영원한 시간을 대신 누릴 권리라도 있는 양 아직도 자유로운 몸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법정이 살인자에게 어떤 형벌을 내리는지 보려고 합니다. 빛나는 권위의 상징인 법정이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한을 풀어줄 것인지 보려고 합니다."  

  모리스 파퐁은 1997년 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87세. 범죄 후 40여 년이 지난 후에 공소가 제기되고 유죄판결이 선고된 것은 프랑스 법원이 반인륜적 범죄에는 공소시효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반인륜적 범죄인가? 아래의 신문기사가 눈길을 끈다.

     (동아일보 2002. 5. 30. 자)
                       최종길교수 유족 국가에 10억 손배소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한 고 최종길(崔鍾吉) 서울대 법대 교수의 아들 최광준씨(경희대 법학과 교수) 등 유족들은 29일 국가와 당시 중정부장인 이후락(李厚洛)씨 및 주무수사관 차모씨 등을 상대로 1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냈다.
  유족들은 소장에서 "이 사건의 민사배상책임 소멸시효 5년이 지났지만 국가기관의 책임을 국가 스스로가 인정한 만큼 소멸시효 완성을 내세워 배상책임을 회피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유족들은 또 "차씨가 최근 한 월간지 인터뷰 기사에서 '최 교수가 간첩이라고 자백하고 자살했으며 절대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 최 교수와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덧붙였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천주교인권위원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등 사회단체들은 이와 관련, 이날 서울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반인도적 국가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 입법화를 촉구했다.
  최병모(崔炳模) 민변 회장 등은 "최교수 사건과 수지 김 사건 등 국가기관에 의한 인권유린 행위가 잇따라 드러나고 있으나 공소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로 가해자들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며 "반인도범죄 공소시효 배제 특례법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