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그 어느 토요일 오후

2010.02.16 10:58

범의거사 조회 수:15727

 봄, 그 어느 토요일 오후
                                                  

   내 마음에도 봄이 왔느냐와는 상관없이 창 밖은 봄이다. 그 봄의 나른함이 온 몸을 휘감는 토요일 오후다. 늘 북적거리는 사법연수원도 토요일 오후만큼은 고요가 깃든다. 그 적막함이 좋아서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토요일 오후를 교수실에서 혼자 보낸다. 미뤄 두었던 일들을 하기도 하지만, 계절이 오고가는 창 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젖기도 한다.

상념, 그 하나---판사들은 다 똑같네요

  매년 3월이 되면 사법연수원은 새로운 얼굴들로 붐빈다. 금년에는 700여 명의 연수생이 새로 입소하였기 때문에 강의실마다 복도마다 더더욱 북적거린다. 사법연수원 교수를 한다고 해서 그 700여 명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고작해야 자기가 강의를 맡은 한 반 60여 명의 얼굴을 아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60여 명을 다시 3분하여 20명 내외로 지도교수가 정해지면, 이 지도교수와 그 지도반원들 사이에서 비로소 말 그대로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생기게 된다.
연수원 교수의 본분이야 두 말할 것도 없이 강의하는 것이지만, 지도교수의 자격으로 3월에 우선적으로 하여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지도반원들을 개별적으로 면담하고 그들의 신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지도교수가 지도반원들의 신상을 파악하려 애쓰는 만큼이나, 지도반원들은 지도교수의 신상이나 성향을 파악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교수는 2년차 이상만 되면 이미 연수생들에게 공개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연수생들은 교수가 그들을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교수를 꿰뚫고 있다.
겨우 두 번의 강의를 마치고 난 3월 중순의 어느 날, 작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올 해 연수원에 들어온 한 연수생과의 면담시간에 나온 이야기 중 한 토막.

"자네는 자기소개서에 연수원을 졸업하면 판사가 되고 싶다고 썼더군."
"예, 그런데 사실 그것은 막연한 이야기고요,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어요?"
"왜?"
"제가 법대를 다닐 때 민법을 가르치신 교수님이 본래 판사 출신이시거든요. 강의실과 연구실 사이에서만 개미 쳇바퀴 돌 듯하고, 식당에 가실 때 보면 뒷짐 지고 꾸부정하게 허리를 구부린 채 늘 혼자서 다니세요."
"그런데?"
"연수원에 들어와서 교수님을 뵈니까 그 민법 교수님 생각이 나고, 판사들은 역시 다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세요? 저는 그렇게는 못 살 것 같아요."
"그런 소리 마라. 나도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즐긴다."
"예를 들면요?"
"서예도 하지, 단소도 불지, 게다가 등산, 수영도 좋아한다."
"역시 그렇군요."
"역시라니?"
"다 혼자서 즐기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부대끼는 것이 아니잖아요"
"....."
        
상념, 그 둘---진실은 神만이 안다

  재판이 사람의 理性과 능력을 넘어선 사실의 확정을 필요로 하는 일임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진실은 神만이 안다"는 말이 있다. 얼핏 지나친 과장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판사들이 재판을 거듭할수록 진실 발견이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진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당사자들 본인이고, 증인들, 소송대리인들이 그 다음이며, 판사는 진실을 알 수 있는 위치로서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최종 판단은 판사의 몫이다. 神만이 아는 진실을 인간인 판사가 밝히려 하는 한, 誤判의 가능성이 태생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다. 가슴을 죄어오는 이야기 한 토막,

『변호사는 누구든 자기가 맡은 형사사건이나 민사사건의 판결이 있기 전날이면 내일 판결이 어이 될 것인가 하고 초조한 마음이 적지 않게 든다.....이러한 판결 전야의 변호사의 초조감은 국가고시 합격 발표 전야의 응시자의 심정과도 다를 바 없다. 그런데...100% 승소할 것으로 믿었던 사건이 너무나 뜻밖에도 패소판결이 되고 말았을 경우에는, 수임변호사로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허탈과 실망의 헛웃음을 해보기도 하거니와....그 이상 의심의 여지도 없을 만큼 주장을 철저히 하였던 것인데도 너무나 수긍할 수 없고, 도저히 승복할 수 없는....판결이 되었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어느 성급한 변호사는 자기 변호사 사무실 간판을 떼어 내동댕이쳐 버렸다고 하지만, 그런 정도까지는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변호사직에 대한 적지 않은 회의를 느끼게 되는 것은 사실이고....』
(金一斗 변호사님의 칼럼 "判決前夜"<법률신문 1999. 3. 18. 자> 중에서)

『저는 1965. 11.에 판사로 임명되어 법복을 입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34년 동안, 진실과 거짓, 선과 위선이 교차하고 인간의 애환이 담긴 수많은 사건을 담당하면서, 저의 능력과 식견의 부족함을, 그 중에서도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과 이해가 부족함을 항상 절감하면서도, 제 나름대로는 옳은 판단을 하고자 미력이나마 정성을 다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법관의 막중한 책무를 생각하면서 지난 일을 되돌아볼 때, 제가 관여한 수많은 판단 중에서 잘못된 것은 없었는지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으며, 저의 그릇된 판단 때문에 고통을 받은 이가 있다면 부디 용서하여 주실 것을 청하고 싶습니다.』
(千慶松 대법관님의 1998. 2. 26.자 퇴임사 중에서)

상념, 그 셋---"昭和"니 "平成"이니

「쌍끌이 조업」으로 대변되는 韓ㆍ日 간의 추가 어업협상 내용을 전하는 언론보도는 하나같이 '치욕', '굴욕', '구걸'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어민들의 분노의 함성이 하늘에 닿았건만, 정작 주무부서의 장관은 일본으로 떠날 때부터 일본 해당 부서의 장관과는 '형님','동생' 하는 사이라 문제가 없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더니, 돌아와서도 어민들의 분통만 터지게 하는 自畵自讚의 소리를 늘어놓았다. 어느 신문의 사설은 아예 "어물전 망신시킨 꼴뚜기"라고 극언할 정도였다.
우리에게 일본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이 지난 연말에 某대학교수의 회갑기념논문으로 썼던 "가집행선고부 가처분취소 판결의 효력"이라는 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글의 맺는 말 중 한 토막,

『脚註에서 보듯이 일본의 법률이나 판례나 문헌에 눈 한 번 주지 않고 이 글을 작성하였다는 점을 부기하고 싶다. 각 분야에서 우리의 법률과 우리의 판례와 우리의 문헌만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때, 제 나라의 "檀紀"라는 年號는 망각의 창고에 처박아 둔 채 "昭和"니 "平成"이니 하는 그야말로 세계화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인 남의 나라 年號를 아무 생각 없이 마구 사용하는 글이 깨끗이 자취를 감추는 때, 그런 때가 하루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환상일까? 언필칭 문호개방의 시대에 무슨 헛소리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것들마저 무분별하게 추종하는 것은 예속을 의미할 뿐이다. 일본의 법률문화가 우리보다 더 발달하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므로, 그네들의 것을 참고하는 것이야 歐美의 선진적 제도를 참고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네들의 年號까지 사용할 이유는 없다. 日王은 어디까지나 일본인들의 왕일 뿐이다. 도대체 이 지구상에 일본인이 아니면서 일본의 年號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의 법률가들 말고 또 있을는지....
더구나, 이제 막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은 젊디젊은 사람들마저 무의식적으로 일본의 年號를 사용하는 것을 보노라면 경악스럽기 짝이 없다.』

위 글의 草稿를 작성한 후, 평소 글을 쓸 때마다 늘 그러했듯이 존경하는 털보선사님께 감수를 부탁하였고, 당신께서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보내 주셨다. 그 자상하심에 늘 감사할 따름이다.

『마지막 내용은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일 터인데, 법률 논문의 본문 내용에 포함시키는 것은 원칙적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나의 의견으로는 그 내용에 대하여는 찬동하지만, 형식으로는 본문의 끝에 '후기' 또는 '추기'라고 하여 본문보다 작은 글씨로 적는 것은? 또 그 내용과 더불어 외국의 기관(예, 일본 최고재판소, 동경지방재판소, 미국 연방최고재판소, 미국 department of state)을 표현할 때에 그에 해당하는 우리 나라의 기관 이름(예, 일본 대법원, 동경지방법원, 미국 대법원, 미국 국무성이 아니라 미국 외무부)으로 표현하여야 하고, 또 일본의 문헌을 인용하는 경우에 그 연도를 표기하여야 할 때에는 서기 연도로 바꾸어 기재하도록 하자고 추가하고 싶지는 않은가요?(이 부분은 내가 이미 시행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법률 논문의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禪師님의 高見에 따라 당시 위 논문에서는 위 부분을 삭제하였다. 그 대신 언제고 다른 기회에 이 문제를 한 번 다루어 보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어 오늘의 상념으로 이어진다. 일본 인간백정들에 의해 무참히 시해된 명성황후의 혼령이 '조선이여 일어나라'고 외치는 장면(오페라 「명성황후」)에서 예술의 전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이 흐느끼던 모습이 거기에 겹쳐진다.(1999. 4. 15. 자 법원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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