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을 맞아

2010.02.16 11:02

범의거사 조회 수:14396

      스승의 날을 맞아

  촌지문제가 불거지는 것이 무서워 올해는 스승의 날에 초등학교가 일제히 문을 닫고 아이들을 학교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이쯤 되면 스승의 날을 아예 없애느니만 못하다. 도대체 어린 아이들에게 그들이 왜 학교에 안 가는지, 아니 못 가는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0세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해에 이 나라에서는 어찌타 이런 비참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이러고도 문명국가 云云 할 수 있을까. 하긴 서울대학교가, 법과대학이 존재하는 까닭에 입시과열문제가 생긴다며 아예 서울대학교를, 법과대학을 없애려는 나라에서 무슨 일은 안 생기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연수원 교수도 명색이 훈장이라고, 올해도 예외 없이 꽃다발과 선물을 받았다. 벌써 3년째이다. 그것을 보고 초등학교 6학년의 작은 아들놈이 "아빠, 이건 촌지 아냐?" 한다.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도대체 우리의 교육현장을 무어라고 설명하여야 할까.

연수원 교수는 과연 진정한 의미의 '훈장'일까? 3년이 지나도록 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의문이다. 연수원 교수와 연수생은 분명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이니 '師弟之間'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법조계의 선후배사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먼저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나중에 入門하는 사람들한테 길 안내하는 것이 바로 연수원 교육의 요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연수원 교수는 "선생"이 아니라 "선배"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초등학교, 중ㆍ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가르침을 주신 은사님들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말 그대로 그분들은 스승이다. 그에 비하여, 연수원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 후 연수원을 졸업한 후에는(졸업 직후부터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는) 자기를 가르쳤던 분을 계속하여 교수나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도 스승의 날 노래를 들었다.
"참 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과연 내가 연수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쳐 왔나 自問해보면 자신이 없다. 놀 땐 열심히 놀고 공부할 땐 열심히 공부하라고, 그나마 후자에 중점을 두어 잔소리한 것밖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무엇이 참된 것인지, 어느 길이 바른 길인지 우선 나 자신이 잘 모르는데 무엇을 가르친단 말인가.

  "언제 법과대학에서 가르쳐서 고시 붙었고, 언제 연수원에서 가르쳐서 판사 되었나? 말이 좋아 인성교육 운운하며 입바른 소리들 하지만, 연수원은 전문직업인 양성기관이지 국민윤리 가르치는 곳이 아닐세.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못한 도덕교육을 평균연령이 30세가 넘는 사람들을 모아 놓은 곳에서 뒤늦게 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네. 정말로 요구되는 것은 기초적인 실무교육이나마 제대로 하는 것이네. 봉창 뜯는 학자들보다 동서남북을 모르는 실무가가 끼치는 해독이 국민에게 더 직접적이란 것을 명심하게"
연수원 교수로 발령 받은 얼마 후, 평소 늘 과분한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대학시절 은사님을 찾아뵈었을 때 나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다. 그 말씀을 좇아 열심히 가르친다고 나름대로 애를 써왔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그러하다. 연수생들이 과연 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존경받는 스승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고, 가까이 하고픈 선배 정도만 될 수 있어도 연수원 교수로서의 보람일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최소한의 바램조차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순악질 교수' 혹은 '껄끄러운 존재'로 白眼視되지나 않기를 바라는 것이 보다 소박하리라.

  올해는 20세기를 마감하는 해인 동시에 나에게는 연수원 교수를 마감하는 해이다. 이 해가 다 가고 3년간의 연수원 교수 생활을 마감할 때, 그 동안 보람있었노라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훈장의 자격도 없으면서 받은 꽃다발이 거실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1999.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