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내린 대설

2018.11.24 21:31

우민거사 조회 수:158


 그제가 1년 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小雪)이었다.

이날 첫눈이 내린다고 하여 절기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다.

그런데 그제는 아무런 눈 소식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오히려 슈퍼문(Super Moon)에 가까운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밤하늘을 빛냈다.

"그러면 그렇지, 요새 언제 24절기에 맞춰서 기후가 변했던가."

 촌부의 짧은 소견이었다. 


그랬는데, 그 이틀 후인 오늘 첫눈이 내렸다.

그것도 서울에는 무려 8.8cm나.

관측기록이 있는 범위 안에서는 역대 최고란다.

이쯤 되면 소설(小雪)이 아니라 대설(大雪)이다.

보름 후에 정작 대설(大雪)이 되면 어떨까.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많은 눈이 와서 체면치레 이름값을 할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날씨가 하도 조화를 부리니 예측하기 어렵다.


문득 ‘작년 소설(小雪) 즈음에는 어땠더라?’ 하는 궁금증에 그때 쓴 글을 뒤적여 본다.
 
 
사흘 전이 24절기 중 20번째인 소설(小雪)이었고, 이름값을 하느라 눈발이 날리긴 했지만,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적은 양이었지만, 아무튼 눈이 내렸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겨울로 접어들었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그런데 그 사흘 후인 오늘, 이건 또 무언가? 느닷없이 종일토록 한여름 장마를 연상케 하는 비가 내린다. 게다가 천둥번개까지 치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열흘 전에는 포항에 강진이 발생하여 대입 수능까지 1주일 연기하게 하더니, 이번엔 겨울에 웬 장맛비인가?
자연재해, 기상이변이 점점 일상화되어 가는 바람에 작금에는 그런 일에 무감각해져 가고 있는데, 오늘처럼 겨울에 천둥번개까지 치고 장대비가 쏟아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야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없고, 설사 한다고 해도 안 통하겠지만, 국사의 모든 잘잘못을 궁극적으로 임금의 책임으로 돌리던 옛날 같으면 이 또한 아마도 군주의 탓으로 돌렸을지 모르겠다.


   작년 소설(小雪) 즈음에 이처럼 장맛비가 쏟아진 것에 대한 보상으로 올해는 대설(大雪)이 내린 것인가. 분명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억지춘향격인 풀이라도 하고 싶은 게 하찮은 촌부의 마음이다.

이제는 기후도 억지를 안 부리고,  때가 되면 추워지고 눈이 내리는 식으로 절기에 맞게 돌아갈 터이니, 세상사도 순리에 따르라는 자연의 계시가 혹시 아닐까.

나라 경제가 아무리 망가져 가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들의 이익만 내세우며 툭하면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과

그들에 휘둘려 방향성을 상실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당국자들에게

도대체 무엇이 순리인지를 일깨워 주려는 것은 아닐까.


촌구석에 묻혀 사는 필부(匹夫)조차도, 이제는 단순히 경제문제뿐 아니라, 정치, 사회, 외교, 국방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무엇이 순리인지를 정말 곰곰이 짚어볼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신문의 첫 지면에서 밝고 희망찬 기사를 접해 본 게 언제였던가.            


답답한 마음에 사립문을 열고 손돌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서니 은세계가 펼쳐진다.

판소리 사철가의 사설 중에 나오는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낙목한천 찬 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은세계가 되고 보면은

월백설백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라는 대목 그대로이다.     


금당천눈1.jpg


   첫눈으로 은세계가 된 풍경을 바라보며 시 한 수를 떠올린다.

시골구석의 촌자에게는 주제넘게 국사를 걱정하는 것보다 음풍월(吟風月)이 훨씬 격에 어울림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게 순리이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 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