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기 강의를 끝내며(正人說邪法....)

2010.02.16 11:10

귀터도사 조회 수:9288

강의를 끝내며

  창문을 적시는 가을비가 공연히 사람의 마음을 雨愁에 잠기게 합니다. 이럴 때는 만사 제쳐놓고 그 비를 맞으며 古宮의 오솔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어진다면 그것이 저만의 쓸쓸한 낭만일까요?
  20년 전 제가 여러분처럼 연수생이었던 시절,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그 비를 맞으며 덕수궁의 뒷뜰을 혼자 거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오늘의 강의로 적어도 7반 강의실을 매개로 한 여러분과의 공식적인 만남은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작년 3월 2일 이 자리에서 처음 여러분을 대한 후 오늘로서 1년 6개월 20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서먹함이 강의실에서, MT장에서, 운동장에서, 산에서, 스키장에서 같이 뒹구는 동안 점차 친근함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면서 하나 둘 인연의 깊이를 더해 가는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던 것 같습니다. 특히 외줄 사다리에 매달려 바위산을 오르다 앞서 가던 여연수생의 엉덩이에 받혀 전치 2주의 두부타박상을 입었던 일, 삼겹살 안주로 폭탄주를 마신 후 모 연수생이 느닷없이 대성통곡를 하는 바람에 당황했던 일, 빛고을 최고의 미녀가 완산벌 최고의 미남과 맺어지게 된 일 등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기억될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사라는 것이 맑게 갠 날만 있을 수는 없듯이, 돌이켜 보면 지난 기간에 愛憎이 교차할 때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제가 여러분을 생각하는 것과 배우는 입장에서 여러분이 저를 생각하는 것이 똑같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이러한 愛憎의 교차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여러분의 뇌리에 즐거운 추억은 없고, 오직 마지막 판결서에까지 빨간 싸인펜을 휘두른 지겨운 잔소리꾼의 한 사람으로만 제가 기억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도 다 훈장으로서의 제가 쌓은 業이니까요. 그래도 저는 즐거웠던 추억만을 간직하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이제 20일 후면 졸업시험이 시작되고, 그 시험이 끝나면 여러분의 연수원 생활도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여러분은 연수원의 문을 벗어나 사회로 나가고, 저는 연수원을 떠나 일선 법원으로 복귀합니다. 그 순간 이제까지의 가르치고 배우던 관계는 법조계의 선후배 내지 동료 관계로 일대전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그 간에 여러분과 저 사이를 가로질렀던 높은 벽이 그 한 모퉁이나마 허물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사실 어찌 보면 그간의 가르치고 배운다는 관계는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여러분을 가르쳤다고 거창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그 실질은 여러분보다 법조계에 단지 한 발 먼저 몸을 담갔다는 이유만으로 일천하기 짝이 없는 얕은 경험을 전달하였던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의 관계가 훈장과 연수생에서 선후배 내지 동료 사이로 바뀐다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 그렇게 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훗날 어느 자리에서 다시 만나건 연수원 시절의 즐거웠던 이야기로 꽃을 피울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마지막으로 옛날의 어느 성현께서 남기신 다음의 한 말씀을 여러분께 전하고자 합니다.
    
   바른 사람이 사악한 법을 말하면 사악한 법도 바르게 되고,
   사악한 사람이 바른 법을 말하면 바른 법도 사악하게 된다.
        (正人說邪法 邪法亦隨正, 邪人說正法 正法亦隨邪)

잘못된 법도 올바르게 쓰면 바른 법이 될 수 있지만, 잘된 법도 바르지 않게 쓰면 나쁜 법으로 되고 맙니다. 장차 여러분이 어느 직역으로 진출하든 법조인으로 활동하는 이상 법을 올바르게 쓰는 법률가가 되시기 바랍니다.

7반을 매개로 하여 저와 인연을 맺었던 여러분들이 졸업시험까지의 남은 기간 동안 끝까지 최선을 다함으로써 有終의 美를 거두는 것을 보는 것이 훈장이기에 앞서 한 인간인 이 사람의 소박한 바램입니다.
그 동안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변덕스런 날씨에 건강에 유의하시고, 한가위 명절을 즐겁게 보내십시오.

                                 1999. 9. 21.
                                                 범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