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판사와 트럼프 판사

2019.02.04 22:08

우민거사 조회 수:156


어제 비가 내렸다.

봄을 재촉하는 전령이었다.

서울이 기상관측 이래 처음으로 올 1월 강수량이 0mm라고 할 정도로 그동안 워낙 가물었던 터라,

대지를 충분히 적실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으면 하고 바랬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나마 어디인가, 감사할 일이다.

대문을 열고 나가 비 오는 들녘을 바라보니 마냥 평화롭고 한가하다.

시골 생활의 즐거움이 바로 이런 것 아닐는지.

    

봄비 오는 풍경.jpg

 

오늘은 입춘(立春)이.

기해년(己亥年)의 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내일이 설날이다.

그러니 오늘은 무술년(戊戌年)의 마지막 날이기도 한 셈이다.

이처럼 입춘과 설날이 이어지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둘 다 뜻깊은 날이니 올 한 해는 좋은 일이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예로부터 입춘날 날씨가 맑고 바람이 없으면 풍년이 들고 병이 없으며 생활이 안정된다고 했다.

어제 종일토록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늘은 맑고 포근했으니,

이 또한 상서로운 징조이려나 보다.

   

역술가들에 의하면,

기해년인 올해부터 변화무쌍의 난세로 접어든다고 하는데,

현인이 나타나 각자도생의 국운을 잘 이끌어가기라도 하는 걸까.

 

"입춘에 입춘방(立春榜)을 붙이면 굿 한 번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입춘은 24절기 중 첫 절기로 새해 봄의 시작을 알리는 만큼,

예전에는 한 해 동안 대길(大吉), 다경(多慶)하기를 기원하는 갖가지 풍속이 있었으나,

지금은 입춘방만 붙이는 정도일 뿐이다. 그나마도 일부에 국한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입춘이 절일(節日)로서의 기능은 다한 셈이다.

그만큼 세상이 변한 것을 어쩌랴.

금당천변의 촌부는 입춘방을 붙이며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본다.

   

입춘대길(2019).jpg


내일은 설날이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설 연휴기간 중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졌다.

각 정당의 정치인들이 서울역과 용산역에 나가 귀성객들한테 인사하는 모습이 TV 화면에 나왔다.

이름하여 설민심을 잡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인다는 보도도 뒤따른다.

평소에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편안하게 하는 정치를 할 것이지, 오히려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나라를 만들어 놓고는,

설날 역광장에 나가 추위에 떨며 손을 흔든다고 민심이 잡힐까.

우리는 언제나 이런 모습을 안 보게 될까.

 

하기야,

내 마음에 안 드는 판결을 했다고 담당 판사를 직설적으로 욕하다 못해

탄핵까지 운운하는 사람들한테 무엇을 바라랴.

더구나 몇 달 전에는 바로 그 판사가 자기들 마음에 드는 판결을 했다고 칭송하였던 것을 떠올리면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번번이 자기들이 만든 제멋대로의 잣대를 들이대며 열을 올리는 세태에서

사법에 대한 신뢰를 운위한다는 게 얼마나 연목구어인가.


이럴 때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미국 제9 연방순회법원의 티거 판사는 중남미 이민자 행렬의 망명 신청을 금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연방법을 위반했다"며 그 효력을 일시 중지시키는 판결을 하였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2018. 11. 20. 그를 오바마 판사라고 비난하였다. 민주당의 오바마 전 대통령이 그를 연방항소법원판사로 임명(2012)했던 것을 빗댄 것이다.

그러자 바로 다음 날인 2018. 11. 21.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이 반박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성명에서,


   "우리에겐 '오바마 판사''트럼프 판사' '부시 판사' '클린턴 판사'는 없다"면서, "우리에게는 자신 앞에 선 모든 이에게 공평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헌신적인 판사라는 비범한 집단만 존재할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독립적인 사법부는 우리가 모두 감사해야 할 대상"이라고 일갈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트럼프와 같은 공화당원인 조지 부시 대통령이 2005년 대법원장에 임명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하려는 정치권의 책동에 결연하게 맞서는 데 있어, 로버츠 대법원장에게는 자기가 어느 정파의 대통령에 의하여 임명되었느냐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록 바다 건너 멀리 있는 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의미심장한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에겐 정녕 남의 나라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냥 부러움의 대상일 뿐인가. 

  

무술년 마지막 날의 밤이 깊어간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기해년 첫날의 새벽이 열리리라.

새해에는 황금돼지의 해답게 이 땅에 제발 만복이 깃들기를 기도하여야겠다.

무엇보다도

나만의 독단적인 잣대가 아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올바른 잣대에 기초한 법질서가 재정립되기를 기대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