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얼우려 한들

2018.03.26 23:00

우민거사 조회 수:7509


닷새 전이 춘분(春分)이었다.
점점 짧아지는 밤과 점점 길어지는 낮이 교차하여 이 날 마침내 그 길이가 같아지고,

이후부터는 낮이 밤보다 길어진다. 양(陽)의 기운이 음(陰)의 기운보다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게 자연의 섭리이다.


그런데, 이건 뭔가?
춘분날 몰아닥친 한파, 그것도 모자라 함박눈이 쏟아져 온 천지를 수정궁(水晶宮)으로 만들다니...

한반도의 땅끝 고을 해남에 자리한 아름다운 절 미황사의 지붕을 덮은 춘설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감탄사를 저절로 자아내게 하는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절집 붉은 동백꽃 위에 소담스럽게 내려앉은 저 눈은 또 무엇이라고 이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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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 어느 시인이 읊었던 시 한 수를 응용하여 본다.


     바람이 눈을 몰아 산창에 부딪치니
     찬 기운 새어들어 잠든 동백을 침노한다.
     아무리 얼우려 한들 봄뜻이야 앗을소냐.
                                       
원작자인 시인 안민영(安玟英. 1816-?)은 본래 매화를 소재로 시를 읊었지만

[詠梅歌(영매가). 위 시의 동백을 매화로 바꾸면 된다],

그 매화의 자리에 동백을 가져다 놓으니 이 봄을 그리는 데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아무리 찬바람이 불고 눈이 수북하게 내린들 천지를 물들이는 봄기운을 어찌 하겠는가.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여 기승을 부리는 추위를 꽃샘추위라고 한다던가.

그러나 기실 봄꽃이 피는 것을 자연이 시샘할 리는 없다.

오히려 꽃샘추위는 그와 함께 찾아오는 바람이 봄의 문턱에서 나무를 흔들어 깨워 땅속의 물을 잘 빨아드리게 하는 자연현상이라고 한다. 그런 자연의 섭리를 호사가들이 꽃샘추위라고 명명한 것뿐이다.


목하 이상기온으로 지구가 몸살을 앓아 세계 각지에서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긴 하지만, 계절 변화의 큰 흐름 속에서 보면 봄이 오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니 이미 그 봄이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春在枝頭已十分(춘재지두이십분)이라 하지 않던가.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이,

각종 어려운 문제들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이 땅에도 따뜻한 봄날의 햇볕이 구석구석 스며들지 않을는지... 마땅히 그리해야 할 것이다.
양지 바른 툇마루에 걸터앉아 따스한 봄볕을 즐기는 것,
범부들이야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울안에 핀 복수초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저 개도 같은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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