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신문 2015. 9. 7.자)

 

 

'凡衣居士(범의거사)'에서 '又民(우민)'으로

 

32년간 법관 생활 마치는 민일영 대법관

 

홍세미 기자 

 

 

민일영(60·사법연수원 10) 대법관은 하루를 48시간처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법관으로서 '7'을 근무하며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시간을 쪼개고 쪼개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http://www.mymins.net)를 운영하고 판소리와 산행, 서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인터뷰가 있던 당일 오전에도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국악콘서트에 참가해 판소리 '흥부가' 중 화초장타령을 불렀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던 짐을 이제야 내려 놓는 느낌"이라는 그는 "날마다 극도로 긴장하며 살던 내게 판소리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고마운 존재"라고 했다.

166년의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민 대법관을 서울 서초동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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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호는 '범의거사(凡衣居士)'입니다. 법복을 입고 있는 판사지만 일반인처럼 생각하고 평범하게 행동하라는 뜻이지요. 20년 전에 서예 선생님이 지어주신 호인데, 그 때 사실 퇴임 후 쓸 호도 미리 받아놨어요.

'우민(又民)'. 법관생활을 끝내고 백성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이제 법원을 떠나니 이 호를 쓰렵니다."

 

32년간의 법관 생활을 마치고 16일 퇴임하는 민일영(60·사법연수원 10) 대법관은 대법원 청사 7층에 자리한 자신의 집무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법관 집무실은 기자들도 방문하기 쉽지 않은 공간이다. 쏟아지는 상고사건을 처리하느라 대법관이 '방문객'을 맞이할 틈이 좀처럼 나지 않는데다 외부인을 들였다간 괜한 구설에 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바로 옆방에서 근무하는 대법관끼리도 왕래하는 일이 드물다.

"선임 대법관이 가르쳐준 게 있어요. 대법관들끼리 의논할 일이 있어도 절대 다른 대법관 방에 가지 말고 전화로 하라는 것이었지요. 방문하면 차 마셔야 하고 이야기 나눠야 하니 일처리 할 시간을 뺏긴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제 집무실이 있는 7층에 김소영(50·19박보영(54·16) 대법관의 집무실이 나란히 있다보니 '3영회'라는 별칭이 생겼지만 사실 서로 안부를 묻기도 어렵답니다. 그만큼 대법관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지냅니다."

 

민 대법관은 퇴임 소감을 묻자 "홀가분하다"고 담백하게 털어놨다.

"대법관으로 일하면서 쓸데없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사람들 만나기를 조심했는데, 이제는 조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설렙니다."

 

대법관 생활 6년 동안 주7일 근무에 야근까지

쓸데없는 오해 사고 싶지 않아 사람만나기 조심

판소리·산행·서예 등 취미활동이 활력소 역할

 

앞으로 사법연수원 석좌교수로 후배 양성에 매진할 예정이지만 일단 퇴임 직후에는 별다른 계획 없이 오로지 쉬는 것이 목표다. 대법관으로 근무하는 6년 동안 휴일도 없이 주 7일을 근무했고 반복되는 야근에 시달려 왔다. 매주 저녁 두 시간씩 산행과 판소리, 서예 등 다양한 취미생활을 챙겼지만 그때도 언제나 다시 대법원으로 돌아와 밤 12시까지 사건기록 속에 파묻혔다.

 

"2005년 판소리를 한참 배울 때는 1주일에 한 번씩 종로에 가 수업을 들었어요. 6시에 퇴근하고 저녁도 굶은 채로 판소리를 연습하다 다시 법원으로 돌아와 12시까지 일하고 귀가하곤 했습니다. 대법관으로 일할 때도 같았지요. 저녁에 사정이 있어 외출을 했더라도 반드시 집무실로 다시 돌아와 업무를 봤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밀려드는 사건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저만 그렇게 생활한 것도 아닙니다. 김용덕(58·12) 대법관은 일요일마다 김밥을 싸와서 집무실에서 먹으며 업무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것만 먹고 버틸 수 있을지 참 걱정이 되더군요."

 

본인은 샌드위치와 빵을 챙겨 와 먹었기 때문에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면서도 대법관으로 일하며 살이 8kg이나 빠졌다고 한다. 퇴임 후 목표 중에는 '잃어버린 8kg을 찾는 것'도 포함돼 있다.

 

그는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위해서는 상고심 개선을 통해 대법관이 직접 판결할 사건 수부터 줄여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후임 인선 과정에서 천거된 비()법관 출신 후보의 대다수가 검증에 부동의하며 손사래를 치고, 결국 법관 출신이 최종 후보자로 정해진 일을 떠올리는 듯 했다.

"대법원 업무과다 때문에 전문 법관이 아니라면 대법관 맡기를 꺼려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학계 출신의 전임 대법관이 사건 적체를 이유로 언론의 지적을 받기도 했지요. 하지만 일을 빨리 처리한다고 좋은 법관이고 느리다고 나쁜 법관인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상고심은 사안을 따지고 따져서 천천히 해결하더라도 적확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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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심은 따지고 따져야속도보다 방향이 중요

대법관 구성 다양화 위해서도 상고심 개선 필요

"지나친 '신상털기' 청문회, 대법관직 기피 원인

   

민 대법관은 좋은 판결을 위해서는 법원이 아닌 학계나 검찰에서 온 대법관들의 시각과 의견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학계 출신인 양창수(63·6) 전 대법관이나 검찰 출신의 안대희(60·7) 전 대법관과 합의를 거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사건을 보는 눈이 다르고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지적도 하시더군요. 참 좋았습니다. 지금도 검찰 출신의 박상옥(59·11) 대법관과 변호사로 활동하셨던 박보영 대법관이 계시긴 하지만, 앞으로는 이마저도 지켜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지나치게 도덕성 문제만을 물고 늘어지는 최근 인사청문회도 대법관직을 기피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꼽았다.

"청문회 제도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온 법조인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옛날에는 일명 '아파트 딱지'를 사지 않으면 바보 취급을 당하기도 했으니까요. 지금 기준으로 한다면 황희 정승도 청문회 통과하기가 어려울 거에요. 그렇다고 자격이 안 된 사람을 임명할 수도 없으니 딜레마지요. 당분간은 해결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는 퇴임 대법관의 변호사 개업을 반대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관예우 방지를 내세우며 대법관들의 변호사 활동을 금지하는 목소리가 법조계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에 실망감을 느낍니다. 변호사는 단순히 돈벌이만 하는 직업이 아니니까요. 국민을 조력하는 공적인 역할도 합니다. 대법관 출신에 대한 전관예우라는 것이 실제한다고 믿기도 어렵습니다. 대법관이 수임한 사건도 대법원에서 심리불속행으로 다수 걸러집니다. 국민들이 오해해 대법관 출신 변호사에게 비싼 수임료를 준다고 하더라도 기대했던 효과를 얻지 못한답니다."

 

민 대법관의 이러한 생각은 최근 논란이 된 대법원의 형사사건 변호사 성공보수 무효 판결(2015200111)과도 무관하지 않다.

"형사 성공보수금 약정이 로또 당첨식으로 운영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는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공익적 성격이 보다 강하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민 대법관은 전원합의체에서 자신의 소신을 강하게 피력하는 대법관으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럼에도 다른 대법관을 다 설득하지 못해 소수의견으로 남은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있었던 '국유재산 무단점유자에 대한 과태료 부과 외에 별도 민사소송이 가능한지 여부(201176402)'에 대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퇴임 대법관의 변호사 개업반대 주장에는 실망

단순히 돈벌이 수단보다 공적 역할도 인정해야

후배법조인들 어떤 분야든 취미활동 꼭 가졌으면

 

그는 이 사건 판결문에서 "국가가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 외에 별도의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출입이 쉽고 공연 보기도 좋은 특별관람석 입장권(과태료 부과)을 제공했으면 충분하지, 굳이 이에 더해 불편한 일반관람석 입장권(민사소송)까지 추가로 제공하는 것은 권리의 과잉"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반대의견을 참 공들여 썼어요. 다수의견으로 채택됐으면 했지만 다섯 분을 설득하는 것에 그쳐서 참 아쉽습니다."

 

민 대법관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건이나 안기부 엑스파일 언론 공개 사건 등 여론을 주목시킨 사건도 많이 맡았다. 그는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커 다루기가 아주 부담스럽고 어렵다"고 말했다.

"대법원 판결로 그때까지 제기됐던 사회적 논란이 모두 종결되는 모습이 바람직한데 선고 후 오히려 새로운 분쟁이 시작되곤 합니다. 사회적 논의가 설익은 상태에서 대법원에 사건이 올라오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대법원이 판결을 선고하기 전에 국민적 합의가 충분히 수렴될 수 있도록 논의가 진행되거나 하급심에서 관련 분쟁이 완벽하게 무르익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대법원도 부담이 크고, 판결 선고 이후에도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기 쉽지요."

 

그는 "대법원에 근무하는 동안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았다""앞으로는 4시간짜리 판소리 흥보가를 완창하는 일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후배 법조인들을 만나면 반드시 취미생활을 가질 것을 추천합니다. 매일 기록 보고 판결문 쓰느라 바쁘겠지만, 시간을 쪼개 쓴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저도 1주일에 2시간씩 10년을 하니 흥보가 완창을 바랄 수 있게 됐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