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전이 24절기 중 20번째인 소설(小雪)이었고,

이름값을 하느라 눈발이 날리긴 했지만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적은 양이었지만,

아무튼 눈이 내렸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겨울로 접어들었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그런데 그 사흘 후인 오늘, 이건 또 무언가?

느닷없이 종일토록 한여름 장마를 연상케 하는 비가 내린다.

게다가 천둥번개까지 치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열흘 전에는 포항에 강진이 발생하여 대입 수능까지 1주일 연기하게 하더니,

이번엔 겨울에 웬 장맛비인가?

 
자연재해, 기상이변이 점점 일상화되어 가는 바람에

작금에는 그런 일에 무감각해져 가고 있는데,

오늘처럼 겨울에 천둥번개까지 치고 장대비가 쏟아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야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없고, 설사 한다고 해도 안 통하겠지만,

국사의 모든 잘잘못을 궁극적으로 임금의 책임으로 돌리던 옛날 같으면 이 또한 아마도 군주의 탓으로 돌렸을지 모르겠다.

 
소오름산우회에서 서울 둘레길 탐방에 이어 한양도성 성곽길 순례에 나선 두 번째 날인 오늘,

혜화문에서 출발하여 동대문에 다다르기까지 시종 내리는 겨울비로 인해

변변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지만,

그 대신 인적이 드물어(어떤 곳은 아예 인적이 끊겼다)

낙산의 남북으로 뻗은 성곽길을 마치 전세 낸 기분이었다.

 

그리고 도중에 성곽 밑에 있는 정각사(正覺寺)에 들러 말로만 듣던 미래탑을 친견하고,

주지 정목스님으로부터 절의 정화불사에 얽힌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었다.

더불어 마신 차의 향기와 맛이 일품이었고,

거기에 곁들인 제주도 쑥떡은 망외(望外)의 보너스였다.

가난한 동네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께 작으나마 위안의 장소가 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절의 존재 의의가 아니겠냐는 스님의 말씀에 고개가 숙여졌다.

 

미래탑.jpg

                                                     [미래탑.  앞에 있는 과거탑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밝은 이야기는 하나도 없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아니면 이른바 적폐청산과 관련된 구속과 석방에 관련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신문 보기가 싫을 지경인 일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빗속의 성곽길을 거니는 낭만을 즐기는 것도 축복일진대,

고매하신 스님의 고결한 법문까지 들으며 입마저 호강하다니 이 또한 웬 호사인가.

 

반야심경에서는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이라고 설파하고 있지만,

겨울비를 맞으며 걷는 범부에게는

향기와 맛이 일품인 차나 스님의 고결한 법문이 “無”가 아니라 “有” 그 자체이고,

온 몸에 절실히 와 닿는 실재(實在)일 따름이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처마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간다.

내일 아침 일찍 날이 밝으면 금당천에 나가 보아야겠다.

개울물이 흐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