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계(書四戒)

2016.05.08 00:27

우민거사 조회 수:310

 

5일이 입하(立夏)였지만, 아직은 신록의 봄이다.

그 신록에 거름을 주기라도 하려는 듯 며칠 동안 내리던 봄비가 마침내 그치고,

밤이 깊어간다.

여느 때도 금당천변의 시골은 밤이 칠흑같이 어둡기 마련인데,

바록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잔뜩 흐린 날씨가 거기에 더해져 사위(四圍)가 캄캄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첫물차로 딴 우전(雨前, 작설차)의 향기가 그 어둠에 더 어울리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문득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지은 지로(地爐)라는 시를 떠올린다.

 

山房淸悄夜何長(산방청초야하장)

閑剔燈花臥土床(한척등화와토상)

賴有地爐偏饒我(뢰유지로편요아)

客來時復煮茶湯(객래시부자다탕)

 

            산속의 우거는 맑고도 적적한데 밤은 어찌 이리도 긴가.

            한가로이 등불 돋우며 흙마루에 누운 채로

            화로에 의지하여 등 따스히 지내네.

            그러다 객이 찾아오면 일어나 다시 차를 끓인다오.

 

김시습의 산방(山房)에는 찾아오는 손님이라도 있어 차를 끓이지만,

범부의 우거(寓居)에는 밤벌레만이 벗하자고 한다.

그 밤벌레 우는 소리마저 그친 깊은 밤에 홀로 찻잔을 기울일 때는

 

눈으로 색깔을 즐기고

귀로 차 따르는 소리를 즐기고

코로 향기를 즐기고

입으로 맛을 즐기고

마음으로 분위기를 즐기라고 했던가.

 

그런 즐거움 속에 펼쳐 놓은 책 "선비답게 산다는 것"(지은이 :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에서 발견한 한 구절에 눈이 멈춘다.

 

出與入輦 蹙痿之機(출여입연 축위지기)

洞房淸宮 寒熱之媒(동방청궁 한열지매)

皓齒蛾眉 伐性之斧(호치아미 벌성지부)

甘脆肥膿 腐腸之藥(감취비농 부장지약)

 

            수레나 가마를 타고 다니는 것은 다리가 약해질 조짐이요

            골방이나 다락방은 감기에 걸리기 쉬우며,

            어여쁜 여인은 건강을 해치는 도끼요

            맛있는 음식은 창자를 썩게 만드는 독약이니라

    

소동파.jpg


소동파(蘇東坡·1036-1101)가 만년의 유배지 설당(雪堂)에서 생활의 경계로 삼으려고 지었다는 서사계(書四戒)’이다.

유배지에서 이런 계율을 적어놓고 삶을 단속할 정도였다면,

아마도 그 유배지는 위리안치(圍籬安置)가 아니라 특급 리조트쯤 되었던 모양이다.

 

오늘날로 치면,

수레나 가마는 자동차이고,

골방이나 다락방은 콘크리트 아파트의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방일 것이다.

맛있는 음식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고,

'어여쁜 여인' 부분은 보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자기가 어여쁘다고 생각하는 여인 입장에서는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이자,

오히려 '멋진 남자가 건강을 해치는 도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소동파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요컨대 '삶의 절제'가 아닐는지.

그 절제를 잃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흔히 보게 된다.


백성을 기아선상 고난의 행군으로 몰아가면서도 36년만에 거창하게 당대회(7)를 여느라 요란을 떠는 북한의 모습에서,

몇 십억 수임료와 로비 문제로 법조계를 수렁에 빠뜨릴 조짐을 보이고 있는 변호사들과 브로커들의 모습에서,

세금이나 다름없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도 여전히 천문학적인 적자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조선회사의 모습에서

절제를 상실한 경우의 적나라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씁쓸하기 그지없다.

 

4일간의 황금연휴에다 6일은 통행료마저 면제되어 그런지 고속도로가 매우 붐볐다.

임시공휴일까지 지정하면서 소비를 진작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침체된 경제의 활성화로 이어지면 좋겠다.

다만, 그것이 분수를 넘는 과소비를 부추긴다면 이도 문제이다.

누구든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절제를 잃는 순간 낭비가 되고 궁극적으로 낭패로 이어질 테니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니 결국 중용을 지켜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리라.

 

신록이 우거진 5월이다.

1년의 나머지 열한 달과도 바꾸지 않을 천중지가절(天中之佳節)이다.

이 달이 다 지나갔을 때 되돌아보며 '즐겁고 보람찬 한 달을 보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나날을 보내면 좋으련만....

 

봄비가 그친 밤에

금당천변 우거(寓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