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

2016.12.07 23:23

우민거사 조회 수:786


오늘이 대설(大雪)이다.

절기의 이름답게 눈이 많이 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눈이 오기는 왔다.

아침에 눈을 뜨니 얇게나마 길에 쌓인 눈이 반가웠던 것은 요새 날씨가 건조한 탓도 있지만,

천지를 하얗게 덮은 눈을 보아야 겨울임을 실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옛 시인은 첫눈으로 덮인 천지를 보며 노래하였다.


新雪今朝忽滿地(신설금조홀만지)

況然坐我水精宮(황연좌아수정궁)

柴門誰作剡溪訪(시문수작섬계방)

獨對前山歲暮松(독대전산세모송 


                                            오늘 아침 첫 눈이 내려 홀연히 천지를 덮은지라

                                            황홀해서 넋을 잃고 수정궁에 앉았다오.

                                             그 누가 사립문을 섬계처럼 찾아오랴

                                             세모에 앞산 소나무를 나 홀로 마주하네

                                           

이 시 3구에 나오는 섬계는 그에 얽힌 아래와 같은 고사가 재미있다.

 

고대 중국 동진 때 문신 왕헌지(王獻之 348-388. 왕희지의 아들이기도 하다)가 산음 땅에 살 때 일이다.

밤에 큰 눈이 내렸다.

문득 잠이 깬 그는 창을 열고 펑펑 내리는 눈을 보았다.

둘러봐도 사방은 고요하다. 들뜬 마음에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문득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안도(戴安道 326-396)가 보고 싶어졌다.

그는 다짜고짜 작은 배를 띄워 밤새 섬계로 배를 저어갔다.

아침에야 배가 대안도의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문을 두드려 주인을 부르지 않고 그냥 발길을 돌렸다. 까닭을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 혼자 흥이 나서 왔는데, 흥이 다해서 돌아간다. 굳이 만날 것이 있는가?"

 

앞의 시를 지은 시인도 밤새 곱게 내린 눈을 혼자 앉아 바라보다 괜시리 마음에 흥이 일었나보다.

하지만 아침에 느닷없이 찾아와 사립문을 두드릴 왕헌지 같은 친구가 없으니 어쩌랴..

허전한 대로 그냥 세모에 앞산의 사철 푸른 소나무나 바라볼 밖에.

    

소나무설경.jpg


이 시의 작자는 조선 중종대의 문신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다.

그는 김안로 등 훈신들에 휘둘려 정사를 그르친 중종에게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라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에서 이언적은 주장했다.


왕은 모름지기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르게 하고 모든 백성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대저 왕의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본이니

근본이 바르지 않으면 어떻게 조정을 바로잡고 백관과 백성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옛날의 성왕들은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

올바른 정치의 근원을 왕의 정심(正心)에서 구하였다.

 

이언적은 왕의 마음가짐을 바로 하기 위한 수단으로 십목(十目)을 제시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가정을 엄히 세운다(嚴家庭)

국가의 기틀을 양성한다(養國本)

조정을 바로 세운다(正朝廷)

취하고 버림에 신중을 기한다(愼用捨)

하늘의 도리에 따른다(順天道)

백성의 마음을 올바르게 한다(正人心)

언로를 넓힌다(廣言路)

지나친 욕심을 경계한다(戒後欲)

군정을 제대로 닦게 한다(修軍政)

세심한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審幾微)

 

그 후 중종은 이언적을 중용하였고, 그는 이조, 예조, 형조판서를 역임하게 된다.

 

왕조시대의 왕과 지금의 대통령이 같을 수는 없고,

이언적이 제시한 십목(十目)21세기 대통령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주장한 통치자로서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의 근본은 다를 게 없지 않을까.

 

목하 참으로 어지러운 난세이다.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인한 대통령 탄핵정국이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겠다.

일찍이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 나오는 말인 '국난즉사양상(國難卽思良相)'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제발 사리사욕, 당리당략에 얽매이지 않고 이 난국을 헤쳐 나가

가라앉고 있는 나라를 다시 이끌어갈 현자는 어디에 있는 걸까.


600년 전 인물인 이언적의 말을 곱씹으며 

獨對前山歲暮松(독대전산세모송)을 하여 본다.  


병신년 세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