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신문 2015. 9.1자)

 

"대법관들 판결前 격론…국민 알면 놀랄 정도"

퇴임 앞둔 민일영 대법관에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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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일영 대법관은 지난 6년간 법조 불교도 모임인 '서초반야회'를 이끌고 서울 원각사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활동을 해 왔다. 지난달 22일 대법관 임기 중 마지막 '밥퍼' 행사에서

민 대법관이 밥그릇에 비빔밥에 곁들일 나물을 담고 있다. <이승환 기자>
 

 

오는 16일 퇴임을 앞둔 민일영 대법관(60·사법연수원 10기)은 인터뷰 요청에 말을 아꼈다. 매일경제는 지난달 7일 퇴임 휴가 대신 전속 연구관(판사)들과 1박2일 일정으로 떠난 강원도 양양 낙산사 템플스테이에도 동행했지만 소득이 적었다. 같은 달 22일 부장판사 시절 창립한 민사집행법학회에 대법관 임기 중 마지막으로 참석하기 위해 충남 천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6년 동안 대법관 생활을 회고했다.

"정치권의 판결 비난에 법관이 반응하면 또 다른 갈등과 대립을 낳을 수 있습니다." 민일영 대법관은 지난달 20일 대법원이 한명숙 전 국무총리(71·전 새정치민주연합 비례대표 의원)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 징역 2년형을 확정한 뒤 거셌던 야당의 비난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그는 "어떤 입장을 밝혀도 비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건 결국 법원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했다. 법원과 판결에 대한 정치권의 비난에 "정치인들은 언제나 유리한 판결은 환영하고 불리한 판결은 비난한다"며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민 대법관은 정치권의 비난에 대해 서운함 대신 '대법관들의 격론'을 강조했다. 오랜 격론 끝에 판결이 완성되는 것이라서 정치인들이 그렇게 쉽게 비난해선 안 된다는 뜻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민 대법관은 "대법원의 조용한 이미지와 달리 대법관들은 합의(토론)할 때 정말 격렬하게 의견을 주고받는다. 그렇게 격론이 오가는 것을 알면 국민들이 다 놀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서로 의견이 다른 대법관들끼리 오랜 시간 다투다가 서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도 하고 '방금 한 말 취소하라'며 언성을 높이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 전원이 관여하는 전원합의가 끝나면 대법원장이 만찬을 주최하기 때문에 술잔을 기울이며 쌓인 감정을 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대법관은 화를 삭이지 못해 대법원장 저녁식사에서도 풀리지 않는다"고 했다. 법원 안팎에서 요구하는 전원합의체 회의록 작성 및 공개 요구에 대해서는 "회의록을 만들면 자유로운 토론이 어렵기 때문에 회의 내용을 비공개로 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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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의 극심한 격무 탓에 '대법관은 취임식 하루만 좋고 이후 6년 내내 죽을 고생만 한다'는 농담도 있다. 민 대법관은 "나는 그나마 그 하루도 편치 않았다"고 6년 전을 회고했다. 민 대법관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월요일이었고 그 주 목요일이 전원합의였다. 민 대법관은 청문회 직후 관련 자료를 받았고 청문회 날 저녁부터 자료를 읽었다. 그만큼 사건이 많다는 뜻이다. 올해는 사건이 4만2000건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민 대법관은 "많은 사건들을 적절하게 처리하고 대법원 본연의 전원합의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도 상고법원 도입이 절실하다"고 했다.

민 대법관은 "(대법관은) 너무 힘들어서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취임 초기 대상포진(바이러스에 의해 심한 통증과 함께 물집 등이 생기는 질병)으로 6개월을 고생했다.

민 대법관은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학계로 갈 거라고 했지만 아직 어떤 대학에서도 연락이 없었다"며 웃었다. 퇴임 후 시·군법원 판사로 근무하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에 "신문사 사장까지 지내고 다시 기자로 온다면 후배들이 힘들어할 것인데 같은 이치"라며 "이상적인 일이지만 후배들만 힘들게 할 것이고 현실적으로 법원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상고법원이 생기면 퇴임 후 상고법원 근무는 어떠냐고 묻자 "법관으로 완전히 새로 임명돼야 하고 정년에 제한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경력 많은 선배 법조인들이 다시 평판사로 돌아오는 게 가능해야 하지만 현재로선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 법복 벗었을 땐 '청렴한 가장·밥퍼 봉사자'
큰아들 혼수에 돌잔치 때 받은 금반지 재활용
메르스 한창일 때도 밥퍼 자원봉사 쉬지 않아


'금반지 한 쌍.'

지난해 가을 민일영 대법관이 큰아들 경호 씨(29·사법연수원 43기·공익법무관) 혼사를 준비할 때 마련한 혼수의 전부다. 그나마 반지를 마련하는 데 따로 돈을 쓴 것도 아니다. 1986년생인 경호 씨 돌잔치 때 선물로 받았던 금반지들을 30년 가까이 모아 뒀다가 '재활용'했다.

민 대법관은 "집사람(박선영 전 자유선진당 의원)이 돌반지 모아 두었던 걸 녹여서 결혼 축하 금반지를 한 쌍 만들었고 아들과 며느리에게 하나씩 선물했다"고 말했다. 결혼 당시 경호 씨는 경남 창원에서 공익법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혼집'도 따로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민 대법관에게 "그래도 맏아들 혼사인데 양복 한 벌도 혼수로 못 받았느냐"고 여러 번 물었다. 그는 "내가 판사 생활을 몇십 년을 했는데 결혼식에 입고 갈 양복이 없었겠나, 그런 혼수는 아예 생각도 안 해 봤다"고 답했다. 그는 대법원 내부를 제외하고는 아들 결혼식을 거의 알리지 않았고 예식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결혼식장에서 치렀다. 검소하게 혼례를 치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사돈댁에서도 '작은 결혼식'에 관심을 갖고 먼저 배려를 해 준 덕분이었다"고 설명했다. 지인들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왜 큰아들을 도둑 결혼시켰느냐"고 섭섭함을 표할 때마다 "허례허식을 줄이자는 '작은 결혼식'이 유행이라 내 아들에게도 시켜본 건데 뭐가 잘못된 거냐"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서울 종로구 원각사 무료 보급소에서 배고픈 노인들에게 지난 6년간 매달 한 번씩 무료 급식 봉사를 해 온 덕분에 '밥퍼' 대법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6월 27일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가 극에 달했을 때에도 민 대법관은 봉사를 거르지 않았다. 그러나 메르스 때문에 자원봉사자 수는 절반으로 줄었고 끼니를 해결하기 더 힘들어진 노인 수는 두 배로 늘었다. 민 대법관은 이날 무료 급식을 끝낸 뒤 자원봉사자들 일부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같은 날 더 열심히 나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섭섭함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런 일화를 두고 후배들 사이에선 "판결에 일관되게 보수 성향을 드러내는 민 대법관에게선 상상하기 어려운 면"이라는 의견과 "보수주의자에게 어울리는 검소하고 청렴한 사생활"이라는 의견이 엇갈린다. 실제 민 대법관의 판결 성향이 매우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미등록 외국인(이주) 노동자들에게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인정해 노조 설립을 허가하라는 취지의 판례를 확립할 때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냈다.

[전지성 기자 / 이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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