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5. 9.2.자)

 

"재판 받는 이의 호소 끝까지 들어야"

[16일 퇴임하는 민일영 대법관]

"인내심 갖고 정성 다해 청취하고 판결문은 쉽고 어법에 맞게 쓰길"
격무에도 서예·국악 등 취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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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일영 대법관이 쓴 성철 스님의 출가송(出家頌).

낙관 앞에 범의(凡衣)라는 아호를 썼다.

서예를 시작할 때 스승에게서 받은 이름으로

“법복을 입었지만 평범한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김지호 기자

  

 

 

"재판의 본질은 성의를 갖고 듣는 것입니다."

오는 16일 퇴임하는 민일영 대법관의 집무실 벽에는 손바닥 탁본과 함께 '청송지본 재어성의(聽訟之本 在於誠意)'라는 글이 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말이다. "재판은 당사자들 말을 들어주는 게 핵심이어서 청송(聽訟)이라고 불렀습니다. 평생 한 번 법정에 오는데 법관이 일이 많다고, 시간이 없다고 말을 끊으면 안 되지요."

그는 후배 법관에게 "인내심을 갖고 정성을 다해 말을 들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판결문도 영구 보존된다는 사실을 유념해 '어법에 맞게, 최대한 쉽게 쓸 것'을 강조했다. 대법관이 봐도 어려운 단어나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으로 어떻게 국민을 설득시킬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성의를 다해 재판하고 정성스레 판결문을 쓴다면 누구라도 판결에 승복하고, 그래야 사법정의가 세워진다는 생각이다.

정치권이 판결에 대해 유리하면 '사법 정의'라고 말하고, 불리하면 '정치 재판'이라는 세태와 관련, 그는 부시 대통령 당선을 확정한 미 연방대법원 판결뿐 아니라 아프리카 케냐 대법원 사례도 소개했다. "2013년 대선에서 근소한 표 차이가 나자 패한 후보가 소송을 냈지만 대법원이 '당선은 합법'이라고 판결하자 바로 승복했습니다. 우리나라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사법부 신뢰를 높이는 것은 법원뿐 아니라 정치권과 국민이 함께해야 가능합니다."

그의 집무실에는 묵향(墨香)이 그득하다. 직접 써서 상을 받은 성철 스님의 '출가송(出家頌)', 송나라 시인 대익(戴益)의 '탐춘(探春)'이라는 한시도 있다. 그는 서예대전에 수차례 입상해 두 곳에서 초대작가 자격을 얻은 고수다.

대법원 연간 사건이 올 연말에는 4만건이 넘을 정도여서 대법관들이 격무에 시달린다. 어떻게 시간을 냈을까. 그는 2004년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 예술의전당 서예강좌 1기생으로 등록했다. 매주 두 시간씩 배우고 집무실로 돌아와 밤 11~12시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는 얼마 전 국립국악원 콘서트에서 '흥부가'를 선보인 아마추어 소리꾼이기도 하다. 10년째 종로5가 판소리 교습소에서 소리를 배우는데 종로에서 대법원으로 되돌아오느라 그날은 저녁을 굶는다고 했다. 그는 "판사들이 취미 생활을 못하는 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재판 업무에 매몰되지 말고 취미를 찾으라고 권했다. 취미 생활을 하면 기록도 더 잘 보이고 판결문 쓰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청주지방법원장 시절부터 봉사활동을 하던 그는 6년 전 대법관 취임 후부터는 매달 한 번씩 종로 원각사에서 무료급식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민일영 대법관은 20년간 산행을 하면서 기록한 글을 엮어서 최근 860쪽짜리 책 '산 따라 길 따라'(비매품)를 냈다. 그는 "법정 안에서는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법정 밖에서는 산 따라 길 따라 마음 따라 살아온 인생의 기록"이라고 했다. 그는 퇴임 후 2년간 사법연수원 석좌교수로 후배들을 지도할 예정이다. (이항수 기자, 양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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