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추라기와 대붕

2014.08.13 23:19

범의거사 조회 수:1413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지난 4일은 한 여름의 끝인 말복이자 동시에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추였다.

그래서인가,

이날 아침은 마치 가을날씨처럼 선선하고 하늘도 청명하였다.

산책 나선 우면산의 아침 오솔길이 참으로 오랜만에 쾌적하였다. 참나무시들음병이 더욱 퍼져나가고 있는데, 방제담당자들이 낮잠을 자는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흉한 모습만 빼고 말이다.

 

침체된 경제와 각종 사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 사정도 날씨만큼이나 상쾌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더위가 가고 가을이 오거든

모두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 되기를 기대, 아니 기도한다.

 

아래는 갑오년 입추 다음날 아침에 읽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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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추라기는 꼭 대붕을 꿈꾸어야 하는가?”

 

장자.JPG


<장자> 책머리에는 유명한 대붕(大鵬)이야기가 나온다.

 

북쪽 깊은 바다에 곤()이라는 물고기가 살았다. 물고기는 매우 커서 길이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변하여 붕()이라는 새가 되었다. 그 새는 등이 몇 천리인지 알 길이 없을 정도로 크다.

이 새가 기운을 모아 남쪽 바다로 날아가면, 파도가 일어 삼천리 밖까지 퍼지며,

여섯 달 동안 구만리를 날고 나서야 비로소 내려와 쉰다.

이런 대붕을 보고 메추라기가 밑에서 비웃는다.

 

저 새는 저렇게 날아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나는 한껏 뛰어올라 봐야 곧 내려앉고 말아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갈 뿐인데,

도대체 대붕은 무엇 하러 쓸데없이 저렇듯 높이 날아 멀리 가려고 할까?”

 

여기서 우리는 메추라기를 비웃을지 모른다. 대붕의 높은 뜻을 어찌 메추라기가 알겠는가.

그러나 입장 바꿔 생각해 보자.

메추라기로서는 나무 사이를 날아만 다녀도 충분하다. 작은 날개로 몇 천리를 날아간다 해서 뭐 대단한 이익이 생길 리 없다.

작고 좁은 공간을 날아다녀도 메추라기는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뭐 하러 메추라기가 대붕을 꿈꾸어야겠는가?

 

이 이야기를 우리 일상에 비추어 보자.

상대방이 나의 깊은 뜻을 모른다고 속상해 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상대의 행복이다.

내 말을 따르면 많은 돈을 번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상대방이 꼭 행복해진다는 법은 없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리라는 믿음은 내 생각일 뿐이다.

적은 수입으로도 지금 삶에 만족한다면, 상대의 모습을 지금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남들이 어떻게 보건, 자신은 지금 그대로가 편하고 좋단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에게 어울리는 삶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모든 사람이 꼭 대붕(大鵬)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내가 보기에 정말 좋은 기회인데도 상대방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흥분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생각하자.

상대방은 자기 그릇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다.

 

좌망(坐忘)과 심재(心齋), 마음을 여는 첫걸음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비추어 상대를 이해한다.

예를 들어보자.

개는 신음하는 다른 개를 보며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옆 사람이 배를 움켜잡고 있으면, 어쩔 줄 몰라 하며 도울 길을 찾는다.

심리학자 니콜라스 험프리(Nicholas Humphrey)는 그 이유로 내면의 눈(inner eye)’을 내놓는다.

사람은 자신에 감정에 비추어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인상 쓰며 식은땀 흘리는 얼굴을 보며, 자기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 느꼈던 아픔을 떠올린다. 그리고 상대방이 느낄 고통을 떠올린다.

이처럼 내면의 눈은 자기감정에 비추어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배려하는 마음 탓에 상대는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다시 <장자>에 나오는 구절을 들어보자.

 

옛날에 바닷새가 노나라로 날아왔다.

노나라 임금은 몸소 이 새를 종묘(宗廟) 안으로 모시고 와서는 술을 권했다.

아름다운 궁궐에 음악을 울리고, 소와 돼지, 양고기를 대접했다.

그럼에도 새는 당황해하며 근심할 뿐이었다.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사람을 기르는 식으로 새를 키웠던 탓이다.

 

장자는 또 이렇게도 말한다.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몸이 굳는다. 그러나 미꾸라지에게는 그 곳이 좋다.

 

사람은 고기를 먹고, 소는 풀을 뜯으며, 올빼미는 쥐를 좋다고 삼킨다.

이 가운데 하나를 올바른 식습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사는 방식이 모두 다른 까닭이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상대방이 그렇게 살아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모르는 합리적인 부분이 상대의 태도에는 숨어 있다.

나에 비추어 상대방을 이해하려 할 때는 이 점을 놓치기 쉽다.

 

그래서 장자는 좌망(坐忘)과 심재(心齋)를 강조한다.

좌망이란 앉아서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심재는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다.

마음을 비우고 감정을 털어버려야 한다. 고집 센 상대와 오래 맞서면, 자신도 고집불통이 되어 있기 십상이다.

남들 눈에는, 자신이나 상대방이나 벽창호이긴 마찬가지일 때도 많다.

진정한 이해는 자신을 비울 때야 이루어진다. 내 방식대로 상대를 해석하고 대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눈에 세상이 어떻게 비칠지를 먼저 생각해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조삼모사(朝三暮四), 말만 바꿔도 마음이 통한다.”

 

<장자>에는 유명한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모두 같은 것임을 알지 못한 채, 죽도록 한쪽만 고집하는 태도를 가리켜, ‘아침에 셋이라 한다. 이 무슨 말인가?

 

원숭이 기르는 사람이 도토리를 나누어 주며 말했다.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

이 말에 원숭이들은 모두 화를 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지.”

그러자 원숭이들은 다 기뻐했다.

 

조삼모사는 어리석은 사람을 빗대는 이야기로 들린다.

곰곰이 따져보면 이 일화(逸話)는 고집불통들과의 대화법이기도 하다.

장자는 모든 일에는 도()가 있다고 믿는다. 도란 순리(順理)대로 산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세상 일은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고집불통들과 왜 다투는지를 떠올려 보라. 싸우는 듯하지만, 혹시 둘 다 똑같은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표현이 서로 조금 다를 뿐인데도, 입장차이가 태산만큼이나 크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범죄자가 아닌 한, 사회생활에서 순리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거의 없다.

다친 자존심에 매달리느라, 정작 둘은 같은 논리를 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말꼬리 잡기는 감정 상하는 싸움에서 흔히 나타난다.

그렇다면 상대방에게 익숙하고 거부감 없는 말과 논리로 내 생각을 펼쳐보도록 하자.

말만 바꾸고도 성난 원숭이들을 기쁘게 하지 않았던가.

입성이 바뀌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

말과 글도 그렇다. 상대에게 친숙한 말과 논리로 설득시켜 보라.

고집불통일수록 한 쪽으로만 세상을 보는 법이다.

그들이 보는 쪽에 맞추어 생각을 건네 보자.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도록 하라.”

 

태초(太初)에는 혼돈(混沌)이라는 왕이 세상의 가운데를 지배했다.

혼돈은 남쪽과 북쪽 바다 임금을 정성껏 대접했다.

감격한 두 임금은 혼돈에게 보답할 길이 없을까 고민했다.

사람에게는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서 보고, 듣고, 먹고, 숨 쉽니다. 혼돈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구멍을 뚫어주도록 합시다.”

혼돈의 몸에는 하루에 한 개씩 구멍이 뚫렸다.

7일째가 되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이 또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고집불통들은 앞뒤가 꽉 막혀있다. 이들이 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넓게 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옹고집이 천사 성격으로 바뀌면 고집불통들은 과연 행복해질까?

그네들은 억센 성격 덕분에 힘든 세상을 잘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집불통을 상대하다 보면, 나 역시 외골수 논리로 흐르기 쉽다.

사람은 욕하면서 닮는 법이다.

먼저 한발 물러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해 보자. 그러려면 나를 먼저 비우고 상대의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서 장자는 “(나의 생각 속에)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도록 하라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조삼모사 등 <장자>의 이야기 속에는 막힌 대화를 풀어주는 비법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 때문에 마음 태운다면 <장자>를 펼쳐들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