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연수기] 캠브리지 다이어리 : 서울법대와 하버드로스쿨


  안녕하세요. 미국 하버드대학 학위과정 연수중인 문유석입니다. 이곳에서 보고 느끼는 것들을 저 혼자만의 경험으로 간직할 것이 아니라 법원가족들과 공유하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소박하나마 여기서 느낀 몇 가지 것들에 관하여 기회 닿는 대로 적어볼까 합니다.
                                     Ⅰ

  운이 좋아서 유명하다는 서울법대와 하버드로스쿨를 다녀볼 수 있었는데, 하버드에 오기 전 저 역시 속물적인 여러 가지 궁금증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버드 법대 애들은 정말 그렇게 공부벌레들일까? 책이나 영화에서처럼 살벌하게 공부할까? 뭔가 틀린 점이 있을까? 머리들은 얼마나 좋을까? 기타 등등..

  한 학기를 보내고 나서 생각해 봅니다.
  다를 것 없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1. 먼저, 얼마나들 머리가 좋을까?

  이런 객관적 기준 없는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별로 영민하지 않은 것이지만, 어차피 '피상적으로' 말하자면, 별다를 거는 없더라.. 입니다.
  수업을 토론식으로 진행하는 관계로 얘들의 논리전개와 아이디어를 지켜볼 수 있는데, 생각보다 소위 'brilliant'하다고 할 만한 애들이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10명이 있으면 똑똑하게 잘하는 애들 1, 2명, 평범하지만 열심히 하는 애들 4명, 대충 따라가기만 하는 애들 4명 정도의 비율?

  쥐를 가지고 했다는 실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애물 건너에 먹이를 놓아두고 쥐들을 키워 보니, 아무 생각 없이 굶고 있는 놈들, 머리를 쓰고 용기를 내서 먹이를 구해 오는 놈들, 그 구해 온 먹이를 뺏어 먹는 놈들 등으로 분류되었는데, 다시 먹이를 구해 왔던 놈들만으로 집단을 만들어 실험을 해 보니 그 집단 안에 다시 굶고 있는 놈, 구해 오는 놈, 뺏어 먹는 놈이 분화되고, 그 비율은 비슷하게 유지되더라는...

  인간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합니다.
  서울법대도, 사법연수원도, 하버드법대도 모아 놓고 보면 결국 그 내부에서 항상 잘하는 애, 어중간한 애, 포기하고 노는 애가 갈라지거든요.
-그 중에 너는 어느 부류였냐? 라는 태클은 정중히 사양함 ^^;;

  솔직히,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평생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라는 충격을 받았던 때는 유일하게 서울법대 1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이제 갓 대학 신입생인 주제에 난해한 법철학적인 주제에 관하여 깊이 있으면서도 번뜩이는 독창적 아이디어의 리포트를 쓴 친구를 보면서 좌절. 신입생 대상의 해방전후사에 관한 세미나에서 당시 농민들의 입장에 관한 통찰력 있는 가설을 불쑥 제시하는 친구를 보며 좌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기도 힘든 헌법 교과서를, 그것도 세 가지 다른 입장의 것을 동시에 책상에 놓고 비교분석하면서 하루에 100페이지씩 읽어가는 인간을 보며 좌절.(하지만, 그 녀석들은 제 여친의 미모를 보면서 좌절 ^^)

  하기는 얼마 전에 이곳을 방문하신 모교의 교수님을 만났는데요, 서울법대, 동경대법대, 하버드법대 세 군데에서 모두 강의해 보신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가장 똑똑한 애들은 서울법대 애들이라고 하시더군요. 하버드 애들은 내부 편차가 심하다나요?
서울공대를 우수하게 졸업하고 어째 하버드법대 졸업반이 되어 있는 한국학생이 있는데, 걔 말로도 여기 애들보다 서울공대 애들이 더 똑똑했고, 편차도 적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바로 한민족의 우수성 어쩌고 흥분하실 분은 아마 언론계로 가셔야 할 것 같고, 제 생각은 그만큼 우리나라 대학입시가 서울대를 정점으로 일렬 줄세우기를 완벽하게 해 왔다는 이야기 아닐까 싶습니다. 편차가 적을 수밖에요.

  물론, 하버드도 99% 공부로 뽑습니다. 여기 학생들한테 미국에서는 아무거나 한 가지만 잘하면 명문대에 갈 수 있다며? 하고 물었더니, 당장 누가 그런 헛소리 해요? 라는 반문이 돌아오더군요. 미국 전국의 고교에서 1등하는 애들 그룹 중에서 뽑힌 애들이 하버드 칼리지에 오고, 거기서 또 좋은 학점 받은 애들이 다시 로스쿨에 온 경우가 많고, 다른 대학에서 온 애들은 거의 수석, 차석 졸업자 등등이라더군요. (뭐, 그래봤자 또 먹이 물어오는 쥐, 굷는 쥐, 뺏어 먹는 쥐가 나뉘겠지만서도..)
  그래도 하버드 외의 선택지도 풍부하니 우리나라만큼 심하게 한 대학에 몰리지는 않고, 인종적 다양성 등의 도모를 위한 어느 정도의 배분 등으로 인해 학생들 간의 편차가 좀 있는 편인 것 같기도 합니다.

2. 그럼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느냐? 다들 정말 '하버드의 공부벌레들'이더냐?

  역시 별다를 것은 없더라...입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펴 놓고 있는 노트북 화면을 죽 보면 가관입니다. 매일 수영복 미녀 사진을 보고 있는 애. 구글 메일을 늘 읽고 있는 애. 트럼프 카드 옮기는 단순무지 게임에 늘 매진하는 애, 채팅하고 있는 애... 재미있는 것은 늘 같은 것을 하고 있는 일관성이더군요. 그러다가도 교수가 질문하면 어떻게든 대충 답을 하는 순발력을 보면 역시..싶기도 하고.

  '공부벌레들' 분위기에 근접이라도 한 것은 오직 1학년(1L이라고 부릅니다. 원 엘) 때뿐입니다. 왜냐? 1학년 성적을 가지고 로펌에 취직이 거의 다 결정되거든요. 2, 3학년 때도 계속 고학점을 받고자 하는 학생은 대법관의 law clerk이 되고 싶거나 교수가 되고 싶은 학생들입니다. 결국 '인센티브'의 문제죠.

  그런데, 그 원 엘 때의 공부 강도도 물론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한국의 고시공부, 의대생들의 공부 등등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비인간적인 한국식 공부에 감히 비교할 것은 아닙니다. 한국 법대생들의 평소 수업 때 공부 강도보다는 비교 안 되게 높지만, 어차피 고시학원화된 한국 법대의 현실을 볼 때, 고시공부 때의 강도와 비교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 변호사 시험은 그리 어렵지 않은 자격시험이고, 법대 1학년 성적이 진로를 좌우하니까요.

  '공부벌레들'류의 과장된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이야기일 뿐, 기본적으로는 열심히들 공부하는 것 같습니다. 시스템 자체가 다른 것이, 상당한 분량의 예습을 해 온 것을 전제로 토론식 수업을 하기 때문에 읽어가지 않으면 수업 들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고, 예습해 오는 것이 미국대학에서는 당연한 상식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가만히 보면 어떤 수업은 거의 다들 예습을 잘 해 오고, 어떤 수업은 예습해 오는 쪽이 소수입니다. 교수가 얼마나 무섭게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망신을 주느냐의 차이죠. 결국 인간 행동이란 기본적으로 인센티브에 따라 좌우되는 거지, 타고날 때부터 공부를 좋아라 하는 특이한 인간들만이 어디에 몰려있다든지 하는 희한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Ⅱ

  앞글에서 별다를 거 없다는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뭐가 다른가를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1. 석사과정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기간 중 회사법 분야를 소개하는 강의가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여기 교수 대부분이 그렇지만) Mark Roe 교수의 강의는 기업인수합병(M&A)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귀여운 여인'에서 리처드 기어가 기업사냥꾼이었죠?)의 한 유명한 사례를 소개하면서 시작되어 여러 질문을 던지더니, 갑자기 강의실 불을 끄고 영화를(교수가 편집해 왔더군요)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Other People's Money”라는 영화였는데요
  그레고리 펙이 지역사회에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일자리를 제공하여 온 공장을 운영해 온 사업가로, 데니 드비토가 악명 높은 월 스트리트의 기업사냥꾼 변호사로 나옵니다. IT 산업의 물결 속에 사양 산업이 되어가는 공장을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그레고리 펙은 동분서주하지만 데니 드비토의 마수를 벗어나기는 힘듭니다.
  회사의 운명을 결정할 주주총회에서 그레고리 펙은 지역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공장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하고, 미국을 지탱해 온 근면성실한 보통사람들의 삶 자체와 다를 바 없는 공장과 회사들을 남의 돈(other People's Money)으로 게임하듯 사서 조각 내어 팔아버리는 탐욕스러운 변호사들에 대한 분노를 이야기합니다. 대부분 지역주민들인 주주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지는 가운데, 단상에 오른 데니 드비토. 야유소리가 드높습니다.
  신경 쓰지 않고 그는 이야기합니다.(이하 대사는 대강 저의 창작. 기억나는 요지를 살려서) “아멘, 아멘, 아멘. 기도는 잘 들었습니다. 감동적이지만, 그냥 기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정보화사회의 물결은 세상을 이미 바꿔 버렸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 공장은 더이상 이익을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전재산인 주식은 곧 휴지로 변할 겁니다. 앞의 분 말씀대로 저는 남의 돈으로 여러분 회사를 사들여서 돈을 벌려는 자입니다. 하지만, 제가 돈을 버는 과정에서 여러분도 여러분 재산을 최소한도는 지킬 수 있게 됩니다. I'm not your best friend. I'm your.... only friend.”

  여기서 교수는 영화를 멈추고 불을 키더군요. 아따, 결말 궁금하게시리... 저는, 기업인수합병에 관한 어떤 잘 된 논문 수십 개보다 위 두 사람의 연설 장면에서 더 많은 화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2. 미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법률가 1위로 뽑히고 하는 Elizabeth Warren교수의 강의 종강일이었습니다.  
  Lynn LoPucki라는 역시 자기 분야 미국 최고로 꼽히는 유명 교수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면서 한참 강의를 하고 학생들 질문을 받다가, 갑자기 영화 이야기를 꺼내는 겁니다. 우디 알렌의 '애니 홀'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극장 앞에서 우디 알렌이 줄을 서 있는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론에 대해서 뭐라고 자꾸 아는 척을 하고 있었습니다. 듣다 못한 우디가 끼어들며 그건 맥루한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라고 하니까 반박하는 그 남자. 갑자기 우디는 화면 밖에 서 있던 진짜 맥루한 손을 잡고 끌고 와서는 그에게 직접 물어보고, 아까 그 남자는 머쓱해지는 장면입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교실 맨 뒷자리에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와서 앉아 있던 LoPucki 교수가 단상으로 걸어나오는 겁니다. 학생들은 박수를 치고, 질문 답변이 이어졌지요..
  저는, 학생들한테 작은 깜짝쇼를 보여 주려고 모의(?)했을 두 대가가 참 귀여웠어요.

3. 이번에는 바로 그 LoPucki 교수의 수업이야기입니다.
  이 교수가 가르치는 과목은 상당히 기교적이고 복잡한 담보법 분야(secured transaction)
라서 어렵습니다. 그런데, 누가 가르치느냐에 따라 아무리 어려운 주제도 쉽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자기가 쓴 교과서를 교재로 하는데, 문장 자체를 간결, 명쾌하게 쓰는 사람이라 읽기 쉽고, 수업시간에는 교재는 다 읽어 온 것을 전제로 가상의 사례들인 연습문제를 풀며 이론과 법을 실제로 적용하는 훈련을 합니다. 모든 수업은 교수가 준비한 파워포인트로 진행되는데, 핵심만 명쾌하게 잘 정리한 데다가, 학생들의 사고의 흐름을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는지 한 가지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져보고, 대답이 나오면 씩 웃으며 버튼을 누르면 파워포인트에 학생의 대답을 정확히 예견한 다음 연쇄 질문이 뜹니다.
  기본적인 개념은 간명하게 정리해 주고, 다음에는 실제 사례에 적용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의문을 제기합니다. 한 가지 대답을 하면, 그 대답의 약점을 지적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도록 하고. 그렇게 한 학기를 마치고 종강일, 어려운 과목을 몇 달 동안 잘 끌고 와 놓고는 마지막에 학생들 뒤통수를 치듯, 지금까지 배운 제도가 오히려 경제의 순환을 저해하는 측면이 있음을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던 제도의 취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마칩니다.
  그러고 보니 교과서도, 연습문제들도, 그 동안의 강의에도 항상 제도의 비효율성, 한계를 학생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부분이 숨어 있었음을 알게 되고,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배운 것을 가지고 실무를 해 나갈 학생들에게 주어진 제도의 적용만 할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관점에서 제도를 개선해 나갈 것도 잊지 말 것을 가르치는 거죠.
  정말 태어나서 '세상에 이렇게 잘 가르치는 사람이 있을 수가!'라는 감탄을 하면서 수업을 받아 본 것은 처음입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은 진심어린 박수를 쳤고, 참을 수 없었던 저는 결국 나중에 교수에게 가서 한 마디를 하고 말았습니다.  
“Professor, I want to say I really enjoyed your class.”
그러자, 교수는,
“I was glad to have you in my class.”
라며 웃어 주더군요. 눈물 날 뻔했답니다.(그래 놓고 학점은 그리 짜게 주다니 배반이야 배반!)

  그리고는 종강 후 기말고사 때까지 교수는 시험준비하는 학생들이 email로 질문을 해 오면,  바로바로 답을 해서 수강 학생 전원에게 메일로 발송합니다. 기회균등 때문에. 그런데, 토요일이고, 일요일 저녁이고 교수의 답변 메일은 계속됩니다. 스팸 지정해 버릴까 싶을 만큼.

                                     Ⅲ  

  같은 것과 다른 것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왜 다른 지도 이야기해야죠.

1. 하버드 학생들이 접속할 수 있는 홈페이지에는 모든 교수의 강의 평가표가 있습니다.
  종강일에 학생들이 작성, 제출한 강의평가를 종합한 것인데요, 강의가 명료한지, 잘 조직되어 있는지, 학생들 질문에 잘 답변하는지, 수업시간 외에도 잘 만날 수 있는지, 강의주제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 강의교재는 잘 정리되어 있는지, 요구되는 공부량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수업의 페이스가 얼마나 빠른지 등등 19가지 항목에 대해 1점부터 5점까지 학생들이 매긴 점수 및 평균 점수가 나오고요, 그 밑에 학생들의 총평과 코멘트도 모아 놓습니다. 교수가 특정 애들에게만 발언 기회를 자주 주더라, 너무 한쪽 견해로만 치우친 강의를 해서 불편했다, 교재가 편집이 엉망이어서 읽기 힘들었다 등등. 두 교수가 공동 강의를 한 수업 경우는 대놓고 A교수 강의는 탁월했는데 B교수 강의는 도대체 포인트를 찾을 수 없고 지루했다고 비교하기도 하고요. 맨 끝에는 이 강의를 다른 학생들에게 권할 것인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가 나옵니다.
  수강신청 때마다 우선 이 강의평가 수년치를 정독한 후, 실제 수업을 들어가서 직접 판단해 본 후 확정을 합니다. 성의 없이 하는 교수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2. 학문의 풍토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습니다.
  오랜 성리학의 전통 및 근대화 후 일본을 통해 수입한 독일 법학의 영향 때문인지 우리 법학은 개념 위에 개념을 쌓아가는 방식입니다. 의의, 연혁, 요건, 효과, 다수설, 소수설, 판례, 객관설, 주관설, 주관적 객관설, 상대적 객관설, 적극설, 소극설, 절충설, 기타 등등. 기타등등. 기타등등. 고시공부하려면 다수설, 통설 옆에다가 '다'나 '통'자를 쓰고 동그라미를 쳐서 외워야죠.
  심지어 학생들끼리 스터디그룹을 할 때도 제가 무슨 주장을 하면 바로 '근거가 뭐야?' 라고 반문이 오는데, 여기서 근거란 어느 유명 교수 책에 언급된 것이냐, 통설이냐, 독일이나 일본책이나 판례에 나오는 것이냐 등등입니다. 뭐 외우는 것에 소질이 없고 썰 푸는 데는 좀 소질이 있던 저는 버럭~ 할 때가 많았죠.
"아, 그거 그냥 내 생각이지만, 코트디브와르 법대 교수나 피지 법대 교수 누가 어디서 똑같이 주장했을 수도 있잖아!! 우리가 무슨 훈고학 하는 것도 아니고 전거가 매번 필요해?"
그런데, 그렇게 달달 외우는 학설 대립이라는 것이 실제로 사회에 나와서 일을 하면서 보면 도대체 왜 필요한지 알 수 없는 것이 상당 부분이랍니다.

  사시 1차 형법 시험에 단골로 나오는 '착오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A가 B를 총으로 쏘았는데 알고 보니 C였던 경우, 알고 보니 사람이 아니고 멧돼지였던 경우, B인 것을 확인하고 쏘긴 했는데 잘못 쏘아서 D가 맞은 경우, 등등을 비교하면서 각각의 착오가 어떤 종료의 착오인지 개념규정을 하고, 그러한 착오가 형법체계에서 어떠한 부분에 작용하는 것인지 규명하고, 그래서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또 A설, B설, C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저런 소위 '학설'들이 이미 작고하신 1960년대 교수님의 교과서에 두 줄 언급된 것일 수도 있고, 옛날에 논쟁 끝난 것일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독일에서 옛날에 그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독일사람들이 논의했던 이야기의 번역본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0년째 재판을 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착오론이 필요한 케이스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범죄자들은 다들 눈도 좋고 명사수인가 봅니다.

  기본적으로 한국의 법학교육은 학생들의 머리 위에 거대하고 복잡한 개념의 탑을 쌓아놓고 그 완결적 구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도록 하고는, 실제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 일을 하면서 알아서 자기 머리속에 들어 있는 개념들에 꿰어 맞추든지 뭐 알아서 하라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여기의 법학은 그야말로 '실사구시'하는 학문입니다. 기본적으로 판례법이 중요한 소스인데, 판례라는 것 자체가 실제로 사회에서 일어난 분쟁 및 해결의 과정이니 현실적일 수 밖에 없고요, 성문법을 주로 가르치는 과목도 기본적인 개념과 법조문은 학생들이 읽어오는 거고, 교수는 실제 주로 발생하는 사례들 및 이를 단순화한 연습문제를 가지고 이 법조문이 도대체 무슨 소리이고 어떨 때 써먹으려고 나온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한국에서는 개념, 연혁, 요건 기타 등등 준비운동만 심하게 하다가 다리가 후들거려서 실제 수영장에 뛰어들지는 않고 돌아오곤 했었는데, 여기서는 수업 들어가면 교수가 준비운동할 시간도 안 주고 바로 엔론 사건의 사례를 분석했다가, 이번 주 회기에 의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법률개정안과 각 이익집단의 로비 내용을 소재로 특정 제도의 배후에 있는 이해관계의 대립을 토론했다가 하니, 이건 뭐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바로 물에 쳐넣고 허우적거리는 가운데 헤엄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가르칩니다.

  교과서는 해마다 새로운 문제점을 반영하여 개정되거나 추록이 나옵니다. 교과서에 소개된 학설들은 막연한 사고실험의 결과물들이 아니라, 대부분 근래에 이루어진 실증적 연구결과로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얘네들은 정말 경험적 연구(empirical study)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법학자들이 아니라 다 통계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들인 것 같습니다. 정말 별의 별 것에 대한 통계적 연구결과가 다 나와 있더군요.

  그리고, 우리 법학은 가상적인 '평균인'의 판단과 행동을 전제로 이론을 전개하는데, 여기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의 행동을 인센티브와 레버리지로 설명하고 예측하려 합니다. 예를 들자면 기업파산사건의 관할 문제를 설명하면서, 댈라웨어 주 등 특정 주에 큰 사건이 몰리는 통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에 대해 토론시킵니다. 그리고는 파산법원 판사들이 큰 사건 한다고 보너스를 받는 것도 아닌데 큰 사건을 자기 법원에 유치하고 싶어하는 경향의 원인에 대해 추측해 보라고 시킵니다. 연방법원 판사와 달리 임기가 제한되어 있어 다시 선임되려면 뭔가 능력을 보여 줘야 하기 때문이다, 임기 후 큰 로펌에 스카웃되려면 경력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건 처리 후에는 해당 유형 사건의 전문가로서 학계에서도 인정받기 때문이다 기타 등등.. 학생들의 가설이 꼬리를 물고, 교수는 이에 대해 좋은 지적이다, 그건 비현실적이다는 등등.. 코멘트를 하며 방향을 잡아갑니다.
  시험은 가상의 사례를 준 후 로펌 신참 변호사의 입장에서 사건을 분석하고 대응책을 세워 고참 변호사에게 제출할 메모를 작성하라. 상원의원 보좌관의 입장에서 어느 가상의 법률안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여러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의견서를 작성하라 등등.

3. 이런 풍토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 중의 하나는 모든 질문을 존중하는 이들의 교육방법인 것 같습니다.
  정말 주저 없이 말이 되든 안 되든 질문 참 많이들 하고, 교수는 참을성 있게 그걸 들어주고 적절한 코멘트를 해 주고, 반문을 하며 생각을 이어나가게 합니다. 어떤 질문에도 good point, good question이라고 기를 살려주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말이 될 법한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어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애 키우는 가정에서 애들이 이것저것 물어볼 때 바쁘거나 귀찮다고 잘라 버리지 마시고 진지하게 들어주시고,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시고, 같이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찾아보고 하십시오. 책을 읽어도 줄거리 요약이나 판박이식의 '교훈' 같은 거 찾도록 하지 말고 엉뚱하든 말든 자기가 생각한 것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고 들어주십시오.

  고교 시절의 일인데, 국사 시간에 수업을 듣다가 불현듯 의문이 생겨서 질문을 했습니다. 일본이 페리제독에 의해 강제로 개항한 것이 1853년이고, 우리가 당한 운요오호 사건이 1875년이니 20년 차이인데, 왜 그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은 단시간 내에 산업화에 성공하여 세계 최강대국의 하나로 급성장하고, 조선은 그럴 수 없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잠시 당황하시더니, 얼버무리고 그냥 하던 수업을 계속 진행하셨습니다. 각종 양요 시리즈의 연도순 배열 같은 거요.
(이 대목에서 잠시 흥분하자면, 대학입시, 각종 고시 등의 역사 시험에 A사건의 발생연도는? 1번 1882년 2번 1883년 3번 1884년 4번 1885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한 학생의 수는? 1번 2만 명 2번 3만 명 3번 4만 명 등등의 시험문제를 내던 인간들-설마 요즘은 그렇지 않겠죠?-의 두뇌구조가 궁금합니다. 자기가 머리 쓰기 싫다고 그렇게 직무유기해도 되는 것인지. 삶의 부조리함과 무의미함을 체득하게 하려는 심오한 철학인 것인지)

  위 제 질문과 같은 경우, 여기에서라면 모르는 내용이면 지금은 대답하기 힘들지만 같이 공부해서 다음에 같이 토론해 보자고 하고 그렇게 하든지, 아는 내용이면 계속 저에게 가설을 제시해 보도록 유도하면서 방향을 제시해 주고, 궁금증 때문에 돌아가서 스스로 더 찾아보도록 해 줄 것 같습니다.

4. 그런데, 시스템의 차이, 학문 풍토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뭐랄까, '정성', '성실' 같은 평범해 보이는 가치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당연한 문화. 여기 교수들도, 학사행정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도서관의 사서들도, 스쿨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다들 자기 일에 최선을 다 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 같습니다. 밥벌이하려고 마지 못해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귀찮을 정도로 학생들 공부를 도와주려고 다들 애를 씁니다. 학사행정 담당 스탭이 밤이고 일요일이고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내서 다음 주 주요행사, 세미나를 알리고 참석을 권유합니다. 도서관 사서는 제 논문 proposal을 읽어보고는 어느 포인트에 큰 흥미를 느꼈다면서 자료 찾는 것을 도와줄 테니 만나서 같이 토론해 보자고 연락해 옵니다. 그게 다 ‘시스템’이 강요해서 살아 남으려고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또한, 그 분위기의 차이가 월급 수준의 차이에서 오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 사람들이 배부르고 등 따스워서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물가 수준 대비해 볼 때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같은 일을 하는 근로자들보다 상당히 많은 보수를 받고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고, 실제 사는 모습을 봐도 참 검소하고 단순합니다. 평생 태어난 주 밖을 못 나가 본 사람도 많고요. 한국 기준으로 보면 참 재미없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각자의 일에 대한 존중인 것 같습니다. 자기 일을 소중히 여기기에 남의 일도 존중합니다. 그 일에 관한 한 그 사람의 권한과 판단을 존중해 줍니다. 민원창구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의 경우, 아무리 바빠도 창구에 자기 서류 들이밀며 빨리 해 달라고 소리 빽빽 지르는 사람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1 미터 뒤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다음 사람 오라고 허락이 떨어져야 앞으로 갑니다.
  은행에 가도, 슈퍼 계산대에서도, 지하철 매표소에서도 손님이 왕이 아닙니다. 일하는 사람이 왕입니다. 그 일하는 사람이 기다리라면 기다려야 하고, 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문화가 어느 일을 하는 사람이든 자기 일과 자기 권한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Ⅳ

  이 길고도 긴 글을 여기까지 따라오고 계신 분들께 먼저 존경의 뜻을 표합니다. 이제 마무리해야죠.

  같고, 다른 점, 다른 이유를 이야기했으니,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좋은 학문적 토양과 문화가 있다니 너도 나도 달러 빚을 내서라도 애들을 유학 보내서 선진문물을 배워 오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 같은 척박한 환경에서 노력해 보았자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글의 맨 처음에 별다를 거 없더라는 이야기를 했더랬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평범하지만, 정성과 성실, 최선을 다하는 것 같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시스템이나 문화 등이 백화점에 진열된 물건처럼 비싼 수입 명품 돈 주고 사면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시스템이나 문화는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대형 서점에 가 보면 '나는 이렇게 하버드대학 갔다' '하버드 들어간 쌍둥이 이야기' 류의 책들이 참 잘도 팔리더군요. 그런 책들 읽어보면, 참 아이들이 대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은, 하버드 가느라 고생했겠다만 그래서 뭐 할 건데? 라는 점입니다. '하버드라는 특정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그의 긴 인생 중에, 그리고 사회에 어떠한 독자적인 가치를 갖고 있습니까? 그 대학 입학이라는 것 자체가 인생의 한 목표가 될 수 있습니까? 그 대학 간판만 얻고 나면 남은 인생은 자기 능력과 성실성에 대해 새로 증명할 필요 없는 자유이용권 같은 겁니까?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나중에 커서 뭐가 될래? 라고 묻지 나중에 커서 어떤 일을 하고 싶어? 라고 잘 묻지 않는 것 같습니다. 뭐가 되고, 어느 대학에 들어가고 하는 것은 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어느 대학에 들어가고, 뭐가 되는 것 까지만이 목표이고, 들어가고, 된 이후에 그 좋은 방편을 활용해서 무슨 일을, 왜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민하고 있습니까?

  어린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른이 된 후가 더 문제입니다. 장관이 되고, 교수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 사장이 되고... 신문에 나고 축하전화 오고 다들 기억하는 것은 무엇이 '되는' 날의 활짝 웃으며 괜히 전화받고 있는 척하면서 찍은 사진 한 장이지,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생각하여 왔는지,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3일 장관하다 불미스러운 일로 불명예퇴진했지만 평생 '장관님' 소리 들으며 힘 주고 다니는 사람과, 만년 말단 공무원이지만, 끊임없는 아이디어로 자기 맡은 업무를 혁신하여 작으나마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큰 성취를 한 사람입니까?
  부모도, 학교도, 사회도 어떻게 살 것인가? 왜 그렇게 살 것인가? 무엇이 행복인가? 에 관하여 고민하기보다 그런 고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 인생의 지름길로부터 이탈하지 말고 눈 가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릴 것을 강요한다면, 그래서 미친 듯이 달려서 골인했는데, 알고보니 그곳은 그냥 깃발이 꽂혀 있는 곳일 뿐 별거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아이가 혼자 힘으로 광야에 새로운 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남들이 다들 달려가는 고속도로로 그냥 따라가겠죠.

  사실 하버드도 들어오기가 좀 어렵지 졸업하는 것은 참 쉽답니다. 대충 어떻게 졸업장만 따려고 맘 먹으면 시험 안 치고 레포트 제출하는 과목, 교수가 학점 후하게 주고 터치 별로 안 하는 과목, 출석 체크 안 하는 과목만 골라 들으면 학교 거의 안 나가고 구글링해서 모자이크한 레포트 제출하면서 졸업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 행동을 인센티브와 레버리지로 설명하곤 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하버드에 가려는 인센티브가 젊어서 바짝 고생해서 명문대 간판 하나 딴 후, 이후에는 노력하느라 고생할 필요 없이 간판을 이용해서 좋은 직업 잡아 적당히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라면 위와 같이 쉽게 졸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취업 및 진로에 직결되는 1학년 학점만 최대화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과목을 잘 선택해서 최선을 다한 후, 2학년 때부터는 인생을 즐기면 되는 거죠.
  사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라는 경제원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인센티브는 경제적인 의미로 합리적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가적인 노력 없이 세상을 상대로 사기치고 혹세무민하며 편하게 살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경제학에는 한계효용 체감의 원칙도 있다죠. 젊어서 편하게 먹고 살 방법을 다 마련한 후에 죽을 때까지 젊어서 이룬 성취만 까먹으면서 사는 것이 계속 즐겁고 행복하기만 할까요? 죽으면서 혹시 허무하지는 않을까요?

  앞의 글에서 이들의 학문적 풍토, 우수한 시스템, 교수들의 정성과 열의를 이야기했지만, 간판만 얻으면 족한 사람에게 그게 다 개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찮기만 하지. 그러한 혜택은 그것이 절실히 필요한 이에게 주어져야 제 값어치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절실히 필요할 정도로 공부하려는,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고, 세상을 보다 낫게 만들고 싶은 강한 욕구와 의지를 가진 이라면 그러한 혜택이 없다고 공부를 하지 못할까요? 더디고, 길을 잃어 헤맬지는 모르지만, 어디에서든 공부하지 않을까요?
  앞에 언급했던 Elizabeth Warren 교수 강의는 하버드에서도 최고의 명강의로 손꼽히는 강의이고, 교수는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입법에도 참여하고, 백악관에서도 강연하고, 세계적 베스트셀러도 쓰고, 신문에 칼럼도 쓰면서 파산제도, 담보권제도 등의 시스템이 빚과 가난 때문에 고통받는 개개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탐구하고, 목소리 높여 워싱턴의 로비스트들과 맞서 싸웁니다.
  그런데, 이 교수는 하버드나 아이비리그는커녕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시골의 작은 법대 출신이랍니다. 지방에서 변호사를 하다가 작은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는데, 워낙 강의도 열심히 하고, 좋은 논문도 발표하고 하여 좀 더 큰 대학의 교수로 옮기고, 옮기고 하다가 평생 한 번도 인연이 없었던 하버드 교수가 되어 지금은 이곳을 대표하는 교수가 된 것입니다. 대가가 된 지금도 어찌나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애들이 질문을 하면 바로 그건 예일 로스쿨 리뷰 지난 봄호에 어느 교수가 논문을 발표한 이슈인데, 하면서 설명을 합니다. 강의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정말 교수가 학생보다 훨씬 더 눈이 반짝반짝하면서 이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결례이겠지만, 솔직히 그녀의 강의나 책을 읽다 보면, 법경제학을 하는 유태인 학자들의 글에서 발견하는 천재적인 번뜩임 같은 것은 찾기 힘듭니다. 애들 복잡한 질문 요지를 금방 캐치하지 못해서 버벅거리는 모습도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열심히 공부해 온 후 다음 시간에 처음부터 다시 설명합니다.
  그녀는 죽는 날까지 언제나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런 행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등만 하고 1등 대학만 가고 1등 지위에 오른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녀가 하버드 교수가 되고 전국적 명성을 얻은 것은 그녀에게 자신의 주장을 사회에 펼칠 수 있는 '힘'을 준 것이고, 그녀는 그 '힘'을 최선을 다해 쓰고 있습니다. 만약 힘만 주어졌고, 그 힘을 무엇에 써야할지에 대한 목적의식과 가치관이 없었다면 그녀는 하버드 교수가 된 날 이후로는 목에만 힘주고 무위도식하다가 어느 순간 허무함을 느끼고 마는 삶을 살았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 네, 영화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질 가치관은 심어주지 않은 채 손쉽게 강한 힘에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로만 애들을 내모는 것이 진정 애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여기서 만나는 한국 학생들에게 나중에 뭐할 거니? 를 꼭 물어봅니다. 그리고, 꼭 한 마디 당부하는 것이, 뉴욕에서 돈도 많이 벌고 하고 싶은 일도 맘껏 하되, 언젠가는 꼭 한국에 돌아와서 후배들을 가르쳐 다오. 너희들이 배우고 느낀 것을 잊지 말고...

  우리도 분명히 바뀌고 있음을 믿습니다. 시작이 반인데, 문제가 있음을 알고 스스로 달라지려는 이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난다면 이미 반절은 되어가는 것 아닙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