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백곡(百穀)에 봄비()가 내려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였다.

곡우 다음이 입하(立夏)이니 곡우는 입춘(立春)부터 시작하는 봄의 마지막 절기다.

그런데 어제 낮 기온이 서울은 26, 대구는 무려 31도였다.

이쯤 되면 봄이 아니라 이미 여름이다.

한 달 전 춘분 무렵에는 때 늦은 폭설이 내리더니 이번에는 때 이른 폭염?

날씨가 정말 춤을 춘다.

 

그런데 춤을 추는 게 어디 날씨뿐인가.

최순실로부터 시작된 국정농단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단계로 접어드나 했더니,

사회 각 분야에서 미투’(#me_too, 나도 고발한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지고,

그것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의 임명과 사임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란에 이어서,

마치 양파껍질 벗기듯 하나씩 하나씩 사실관계가 드러나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는 드루킹댓글사건이 신문지면을 뜨겁게 달군다.

이어서

남북 정상회담과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의 김정은이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발사시험을 중단하겠다며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하겠다는 발표를 해 그 진의가 무엇인지를 놓고 설왕설래가 계속된다.

 

그뿐이랴,

STX조선, 금호타이어에 이어 존폐 기로에서 막판 초읽기에 들어간 한국GM 사태,

일파만파로 점점 커지고 있는 대한항공의 물컵사건...

하도 이런 저런 굵직한 사건들이 이어지다 보니,

역설적으로

요새 언론사 기자들은 기사거리 찾아 이리저리 헤맬 일이 없어서 좋겠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들린다.

 

한 때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구호(캐치프레이즈 catchphrase) 아닌 구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국정홍보처에서 같은 이름의 홍보용 동영상을 만들어 배포하기까지 했다.

요컨대 그만큼 대한민국이 역동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좋게 해석할 때의 이야기일 뿐,

달리 보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불안정한 상태라는 뜻도 된다.

오죽하면 6개월 후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예견할 수만 있다면 세계 최고의 점쟁이가 될 거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비록 몇 년째 미뤄지고 있긴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불인 시대가 목전에 다가와 있다.

인구 5,000만 명이 넘는 나라 중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6개국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면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불을 넘어선다고 말 그대로 선진국이 되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촌부의 좁은 식견으로는,

이른바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 이름 앞에 다이나믹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을 못 보았다.

여기저기서 갖가지 춤판을 벌이는 나라가 아니라,

질서가 잡힌 가운데 국민들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나라가 될 때,

기자들이 기사거리를 찾아 헤매는 나라가 될 때 비로소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돌파의 참된 의미가 있고,

선진국의 자격을 구비하게 되는 것이 아닐는지.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려 천지가 뿌였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다행히 하늘이 열려

금당천 위에 뜬 초승달이 선명하게 빛난다.

그 공중에 걸려 있는 아미(蛾眉)를 바라보며 시조 한 수를 읊조려 본다.

삶에 여유가 있고 그 여유를 또한 즐길 수 있는 선진국민이 될 때를 미리 대비해서 말이다.

아울러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하면서.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초승달.jpg


무술년 곡우 다음날의 삼경에

금당천변 우거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