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의 출생지(방태산)
2012.11.30 10:48
이보시게 구암,
입동이 지난 지 한참이고 곧 소설이 다가오는 겨울에 웬 비가 이리도 자주 내리는가. 혹시 그대의 신통력으로 원인규명을 하여 더 이상 내리지 않게 할 수 없나 모르겠네. 월출산 산행 후 무소식이라 근황이 궁금하네만,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네. 범부 역시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네.
나는 지난 10일(토)에는 방태산에 다녀왔다네. 아, 그리고 지난 주말에는 오대산 상원사도 다녀왔지. 뭐가 그리도 바쁜지 이제야 펜을 들었네.
방태산은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과 상남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444m(정확히는 1443.7m)일세. 깃대봉(1,436m), 구룡덕봉(1,388m)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강원도 오지의 산이지.
우리나라 오지의 대명사인 삼둔사가리(살둔, 월둔, 달둔, 연가리, 아침가리, 명가리, 적가리)가 바로 이 산 남동쪽과 북동쪽에 있으니 얼마나 심산인지 짐작할 수 있을 걸세.
그러다 보니 골짜기와 폭포가 많아 철마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자연림이라고 할 정도로 나무들이 울창하다네. 사계절 내내 물이 마르지 않으며, 희귀식물과 희귀어종이 많이 살고 있다고 소개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요새는 방동약수와 그 안에 조성되어 있는 휴양림으로 인하여 더 알려져 있다네.
▶ 한니동 계곡 → 합수부 삼거리 → 대골재 → 깃대봉 → 대골재 → 배달은산 → 약수골 갈림길 → 방태산 정상(1,443.7m) → 갈림길 →지당골 → 매봉령 갈림길 → 공터 →휴양림 산림문화휴양관 도착
아무튼 높은 산답게 산행이 만만치 않더군. 산의 남쪽에서 출발하여 능선까지 오르는데 3시간(4.5km), 동쪽으로 능선 주파에 2시간(2.5km), 북쪽으로 하산하는데 2시간 10분(4.6km) 걸렸지. 여정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으이.
이곳만 지나면 계곡을 끼고 완만하게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어 유유자적할 수 있다네. 도중에 길옆의 산신제당과 나도밤나무가 눈길을 끈다네. 방태산은 워낙 심산이라 예로부터 산삼이 많이 나왔던 모양일세. 그래서 심마니들이 산신제당을 만들어 놓고 산삼을 캐게 해 달라고
나도밤나무에 얽힌 설화도 재미있지. 내용은 이러하이.
율곡선생의 부친이 어린 율곡을 데리고 이곳을 지나다 주막에서 묵게 되었는데, 꿈에 노인이 나타나 “네 아들이 수명이 길지 못하다. 호환을 당할 것이다”고 말하고는 호랑이로 변하여 “이 마을 뒷산에 밤나무 1,000그루를 심으면 호환을 면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이에 며칠 동안 밤나무를 심었다.
그 후 꿈에 다시 그 호랑이가 나타나 밤나무를 세어 보자고 하여 함께 세어 보니 999그루였다. “한 그루는 어디에 있느냐?”고 호랑이가 화를 내며 다그치자 옆에 있던 상수리나무가 나서면서 “나도 밤나무요”라고 외쳐 화를 면했다.
그 밤나무 고목이 지금도 등산로 길옆 살아남아 있어 산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율곡선생의 호가 밤나무(栗)계곡(谷)이다 보니 누군가 갖다 붙인 전설이 아닐까 싶다.
이에 더하여 며칠 전에 내린 눈의 잔설이 군데군데 있어 산객의 발걸음을 더욱 더디게 하더군. 그렇지만 깃대봉(1,436m) 정상 직전에 펼쳐져 있는 상고대(나무서리)를 보는 순간, 언제 힘들었냐 싶게 감탄사가 절로 나왔지.
맞은편 배달은산(1,417m)(옛날 옛적에 대홍수가 나 이곳 꼭대기 바위에다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밧줄로 매달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네) 정상 부근의 눈꽃 또한 장관이었고.
그렇게 눈은 호강을 하였네만, 산행 시작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하늘이 흐려졌는데, 거기에 바람까지 부니 추위가 옷 속으로 파고들더군. 가끔 해가 쨍 비칠 때면 그 따스함이 어찌나 고마운지.
깃대봉에서 방태산 정상인 주억봉까지의 능선길 2.5km는 눈꽃이 눈을 즐겁게 해 주기는 하지만, 설산 등반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젠 등 장비를 안 갖춘 탓에 눈길을 걷기가 쉽지 않더군.
깃대봉과 배달은산 사이의 안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주억봉에 도착하니 어느덧 4시가 다 되었네. 당초 예정보다 30여 분이 지체되었지. 그나저나 주억봉은 해발 1,444m나 되는 큰 산의 정상 치고는 너무 초라했다네. 웬만한 산에 가면 볼 수 있는 흔한 돌 표지석 하나 없이 주억봉임을 알리는 나무 막대기가 하나 서 있더군.
본래 주걱을 닮아서 주걱봉이라 불렸다는데, 이런 저런 사연을 담은 안내판 하나 없으니 측은하더군. 산신제당과 나도밤나무는 안내판을 잘 만들어 놓았건만, 그만도 못하니 안타깝네.
강원도에는 큰 산이 워낙 많다 보니 이런 명산도 대접을 제대로 못 받는 모양일세. 산도 출생지가 중요한가 보이. 다른 도에 있었으면 도립공원 정도는 충분히 되었을 테니 말일세.
이미 시간이 늦은데다가 바람이 드세고 안개비까지 내려 정상에 오래 있을 형편이 못 되는 까닭에 서둘러 하산했네. 산의 북쪽 휴양림 방향으로 하산하였는데, 경사가 급하고 안개비가 이슬비로 변하여 등산로가 미끄러웠지. 게다가 오후 5시가 지나자 산속이라 금방 어두워져 하산길
다행히 일행 32명 전원이 다 무사하게 하산하였네만, 나 혼자만 등산화에 닿는 발등부분에 심한 통증을 느껴 고생하였지. 명색이 산악회 회장이 탈이 난 걸 알면 여러 사람을 걱정케 할 판이라, 일행이 눈치 못 채게 서둘러 속도를 내 앞서 가려니 죽을 맛이더군.
추위에 떨면서도 산행 후 예약된 찜질방(=아침뜨락 황토마을)에 가서 따뜻한 물에 담그면 피로가 풀리리라는 일념으로 달려간 찜질방의 샤워실에 더운 물이 안 나올 줄이야! 설상가상으로 방동막국수집에서 저녁으로 주문한 막국수에는 얼음까지 띄워서 나오고...
에구구~~오랜만에 힘든 산행을 했네 그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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