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향기를 찾아(공주, 부여)
2010.02.16 11:07
百濟의 香氣를 찾아
아이들 교육을 겸해서 백제의 유적지를 둘러보겠다고 2년 넘게 별러 오던 流浪길을 나선 것은 추석 연휴 덕에 시간을 얻은 9월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예년과 달리 그 흔한 태풍 한 번 지나가지 않는 가을 하늘은 淸明 그 자체였고, 황금빛 들녘은 길가의 코스모스와 어울려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 내고 있었다.
길만 나서면 운전대를 독점하는 妻 덕분에 이 번에도 나의 처지는 조수석에서 지도를 펼치고 이정표와 대조하는 求道者로 전락(?)하여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에 재학중인 두 아들은 뒷좌석에서 ‘웃다, 울다’를 계속 반복한다. 고함을 지르고 야단을 쳐도 잠시 조용할 뿐, 이내 웃음소리 아니면 울음소리가 좁은 차 안을 진동한다. '나도 저 나이 때는 저랬나?' 하며 어릴 적 시절을 기억하려 애써 보지만 될 일이 아니다.
충주에서 청주, 조치원을 거쳐 공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귀성길과는 반대인 남행길이다 보니 일사천리로 달릴 수 있어 2시간 만에 곰나루(熊津, 공주의 옛이름)에 닿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시내 외곽에 위치한 麻谷寺. 조계종 24개 본사 중의 하나로 태화산 중턱에 넓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麻谷寺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보철화상이 設法할 때 佛法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삼(麻) 밭에 삼 들어서듯 골짜기(谷)에 빽빽하게 모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이야 어떻든 나그네에게는 백제의 유적지를 찾아 나선 길에서 첫 번째로 대한 것이 공교롭게도 신라의 사찰이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절을 끼고 흐르는 계곡물은 村夫의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갈길을 가기에 바쁘다.
절 마당 한 가운데 金九선생이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어 눈길을 끈다. 당신이 이 나무를 심을 때는 조선 말기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후였는데,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일제 말기에 당신 휘하의 광복군이 공습을 계획하였던 목적지가 바로 이 일대인 공주군 유구면이었다고 하니 무슨 인연일까.
시내에 위치한 국립공주박물관을 들어서니 비로소 백제의 향기가 물씬 풍겨 온다. 경주박물관에 비하면 규모가 매우 작지만, 나름대로 정돈된 아기자기함과 고즈넉함이 오히려 편안한 느낌을 준다.
선사시대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재현하여 놓은 것도 특이한데, 실제 무령왕릉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하게 할 만큼 능을 완벽하게 복제하여 놓아 客의 발걸음을 부여잡는다. 무령왕릉임을 밝혀 주는 誌石이 함께 발견된 것도 그렇지만, 誌石 위에 오수전이라는 돈(買券)을 놓아 둔 백제인의 생각이 더욱 재미있다. 왕릉의 땅값으로 地神에 바친 돈이라고 한다.
박물관 정문 앞의 골동품 가게로 들어서니 방금 전에 보았던 土器, 石劍들이 비록 먼지를 뒤집어썼을망정 즐비하다. 어느 쪽의 것이 진짜인지를 알 길이 없다. 박물관의 것은 모조품이고 이 구멍가게의 것이 진짜라고 말하더라도 그대로 믿어야 할 판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우리 조상들이 그와 같은 것들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할 따름 아니겠는가.
골동품 가게를 나서서 송산리 古墳群으로 향하였다. 박물관이 그러하듯 경주의 大陵苑에는 훨씬 못 미치는 규모였지만, 인파에 시달리지 않고 사색에 잠겨 역사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좋은 것 같다.
모두 7개의 고분 중 무령왕릉인 7호 고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倭人들이 도굴하여 갔다는 안내판을 보는 순간 분노가 치밀었지만, 내 나라를 지키지 못한 탓이라는 妻의 말에 울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고분과 고분 사이로 멀리 보이는 금강의 물이 석양빛을 받아 반짝인다. 이 금수강산을 도륙 냈던 자들에게 天罰이 내려질 날을 기대하여 본다.
해발 110미터에 위치한 公山城은 강 건너 북쪽에서 보면 마치 ‘公’자처럼 보인다 하여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仁祖 임금이 李适의 亂 때 피신하여 와 머무르기도 하였다는데, 성곽이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았다.
주차장에서 東門으로 이르는 오르막길의 옆에 비석들이 즐비하게 서 있어 가까이 가 보았더니 공주감영에 근무하였던 역대 충청도관찰사들의 頌德碑였다.
관찰사마다 너나 할 것 없이 백성들로부터 德을 칭송받았는데 어찌하여 역사책에는 백성들이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못 이겨 신음하다 급기야는 봉기까지 하는 이야기만 나오는 것일까? 다른 곳은 다 그랬어도 공주만큼은 안 그랬다는 것인가?
"道伯마다 厚德하면 욕먹을 이 뉘 있으며
首領이 善政하면 백성들이 봉기하랴
아서라, 視而不見이니 안 본 듯이 하리라.“
여관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부여 쪽으로 길을 잡았다. 공주시내를 벗어나는 길목 고갯길에 다다르니 커다란 탑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東學軍慰靈塔이다.
이 곳 우금치(牛禁峙)는 1894년 10월, 2차로 봉기한 동학군이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하여 10만 군사를 이끌고 온 곳인데, 엉뚱하게도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倭軍에 의하여 열흘간의 전투 끝에 무참하게 몰살을 당한 곳이다. 겨우 1,000여 명만 살아남았다고 하니, 그 寃魂을 누가 달래 줄 것인가. 외세의 개입을 자초한 당시의 爲政者들은 지하에서 과연 편하게 자고 있을는지.....
탑 앞에 서 있는 작은 비석에는 동학군의 恨이 서린 붉은 핏빛의 글이 씌어 있어 보는 이를 전율케 한다.
"백성은 하늘이다."
聖王이 중흥의 기치를 내 걸고 熊津으로부터 遷都(538년)한 泗泌城(부여)은 熊津에서 고작 30여 분 거리이다. 1500여 년 전에는 물론 그도 먼 거리였을 것이다.
읍내로 들어서니 백제문화제의 개최를 알리는 현수막이 秋客을 맞이한다. 王都였을 때는 경주 못지않게 번성하였을 것이 틀림없는데, 지금은 邑의 규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백제의 쇠락을 보는 듯하다. 철저하게 신라문화권 위주로 개발해온 이제까지의 문화정책도 한 몫 하였으리라.
그런데 국립부여박물관 만큼은 그 어느 박물관보다도 정돈된 느낌을 준다. 넓은 부지에 넉넉하게 자리한 건물이 우선 한 숨 돌릴 여유를 가져다주지만,
내부의 유물 전시도 여간 세세하게 신경을 쓴 게 아니다.
2,000원 주고 빌린 헤드폰을 쓰고 유물 앞에 서면 그에 관한 해설이 나오는데, 자리를 옮길 때마다 그에 맞추어 해설이 저절로 바뀐다. 귀신이 哭할 노릇이라고 좌우를 둘러 보다 위로 고개를 드니 천장에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다. 고대유물 전시관에 초현대식 전자시설이라!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이다.
투박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우아한 자태를 뽑내는 백제의 瓷器들을 감상하다 문득 발길이 한 곳에 멎었다. 너무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金銅龍鳳香爐가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라의 금관에 비길 바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그 어느 匠人도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다. 그 아름다움을 그려낼 재간이 없는 게 안타깝다.
이 香爐를 본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길은 제 값을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틀랜타 올림픽에도 갔다 온 이 향로를 정작 국내에서는 관람한 사람이 몇이나 될 지 궁금하다.
박물관을 나와 계백장군 동상을 먼발치로 바라보고 定林寺趾로 갔다.
절은 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었는지 보이지 않고 5층 석탑만 덩그러니 남아 길손을 맞는다.
우리나라 石塔의 始祖라는데 어쩌다 그리도 쓸쓸한 운명이 되었는지... 더구나 1층 塔身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이 자기의 공을 새겨 놓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亡國도 설워라커늘 敵글조차 새길까"
定林寺趾에서 한 마장 거리에 있는 扶蘇山城은 그 안에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여느 산성들과는 달리 전부 史蹟地로 단장되어 있다.
山城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三忠祀에는 백제의 멸망을 끝까지 막아보려고 애쓰다 죽은 세 명의 충신 成忠, 興壽, 階伯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그들의 魂을 달래고 있다.
山城에서 해를 맞이하는 누각 迎日樓를 돌아 발걸음을 옮기니 軍倉터가 나타난다. 타다 남은 벼가 발견되어 군창터임을 알게 된 이 곳에는 4개의 창고를 지었던 주춧돌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데, 그 군량미를 배급받던 군사들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잘 닦인 산길을 1킬로미터 정도 더 가자 드디어 落花岩이 나타난다. 亡國의 恨을 치마폭에 감싸고 천길 낭떠러지 아래 시퍼런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진 3천 궁녀의 혼백들이 아직도 갈 길을 못 찾고 근처에서 맴도는 것 같다. 저 강의 이름이 白馬江이 아니라 白花江이 아닐까.
落花岩 밑의 고란사(皐蘭寺)로 가니 고란초(皐蘭草)는 볼 수 없어도 의자왕이 마셨다는 皐蘭水가 지금도 암반에서 솟아나고 있어 나그네의 목을 축여 준다. 산조차 옛 산이 아니건만 물은 옛 물 그대로이니 이 또한 조화가 아니겠는가.
물을 마시는 사이 큰 아들놈이 혼자 절의 축원명부에 우리 4식구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다 적어 놓고 와서는, 돈이 없어 시주를 못해 스님 보기 미안했다며 멋 적은 표정을 짓는다. 얼른 그의 손에 시주돈을 들려 보냈다.
신이 나서 뛰어 가는 뒷모습이 여간 대견스러운 게 아니다. 강보(襁褓)에 싸여 있던 게 엊그제인데....
이왕 나선 길이니 끝까지 기분을 내자고 妻와 의견이 일치되어 절 밑 선착장에서 유람선에 올라탔다. 구드래 나루까지 1.5킬로미터, 대략 10여 분 거리를 오가는 배이다.
위에서는 몰랐는데, 落花岩 바로 밑을 지나며 올려다보니 절벽의 중턱이 온통 빨갛다. 단풍이 들었거나 본래 잎이 그런 색인 식물들이 바위를 덮고 있는 것이겠지만, 나그네의 눈에는 그것이 삼천궁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절벽을 붉게 물들인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렇게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속도 모르고 피가 물 들은 것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는 작은 아들놈에게 무어라고 설명을 하여야 하나.
부여까지 온 김에 논산으로 차를 몰았다. 은진미륵으로 더 잘 알려진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상(石造彌勒菩薩像)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요량이다.
길을 묻고 지도를 살펴가며 관촉사 입구까지 갔는데 마땅히 보여야 할 石佛이 안 보인다. 15년 전의 기억을 더듬건대 분명 큰 길에서 보였건만, 지금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관촉사의 매표소에서 표를 사며 물었다. 여기가 은진미륵이 있는 곳이 맞냐고. 석불 앞에 새로이 지은 불당 때문에 이젠 길에서는 안 보인다나. 계룡산을 바라보던 부처님의 눈길에 지금도 신도안이 보일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꼭 그렇게 앞을 막아야 했는지....
아무튼 높이 18미터의 국내 최대 석불인 은진미륵은 고려 제4대 광종 19년(968년)에 조성을 시작하여 제7대 목종 9년(1006년)에 겨우 완성된 그야말로 거대한 돌부처이다. 기중기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만들었을까. 커다란 귀가 어깨까지 쳐진 모습이 이채롭다. 1,000 년의 풍상을 겪어 오고도 의연함을 잃지 아니함은 고려인들의 얼이 그 안에 서려 있기 때문이리라.
백제의 향기를 맡기 위한 여행길을 신라의 절에서 시작하여 고려의 석불에서 끝내는 기묘한 旅程을 논산에서 마감하였다.
은진미륵을 본 기념으로 관촉사의 매점에서 부부용 찻잔을사고 나니 주머니에 천 원짜리 몇 장만 남는다. 귀갓길의 휴게소에서 저녁으로 컵라면을 사주면 아이들이 좋아하겠지.(1996.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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