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道紀行(해남, 강진, 보길도)

2010.02.16 11:18

범의거사 조회 수:7112


 

            南道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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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토요일 전일근무제와 두 아들의 개교기념일(11.1. 土)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생긴 이틀의 여유를 이용하여 南道旅行 길에 올랐다. 해남, 강진, 보길도의 孤山과 茶山의 유적지를 둘러보려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하도 멋있게 그려 놓아 언제부터인지 나의 머릿속에는 南道에 대한 환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딴에는 준비한답시고 비행기표도 미리 사두고 안내책자도 미리 검토하는 등 한 달여 전부터 부산을 떨었는데,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한 달 전에 미리 사 둔 비행기표가 탈이 난 것이다. 시간에 맞추어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좌석표를 받으러 갔더니, 아뿔싸, 목포행 비행기가 이미 떠나 버렸단다. 10.26.부터 동절기용으로 시간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니 그럼 연락을 해 주든가, 시간변경계획이 진작부터 되어 있었을 테니 그에 맞추어 표를 팔아야지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항의해 보았지만, 떠난 버린 비행기를 어찌하겠는가. 그나마 광주행 비행기의 좌석을 선심 쓰듯 마련하여 주는 대한항공 직원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판국이다.
   항공사나 항공표를 판매하는 여행사의 써비스정신이 이러고도 ‘관광한국’ 운운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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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南道旅行의 前進基地로 잡은 동백산장 여관이 자리한 大興寺 앞은 여느 유명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식당, 여관 및 상점으로 꽉 차 있었다. 나이트클럽까지 보였다. 역시 예상대로 밤늦도록 먹고 마시고 떠드는 소리에 잠을 설쳐야 했다.
   정부에서는 선진국 진입 운운하는데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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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히 大興寺 입구의 매표소에서 대웅전까지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어 俗世의 소음이 전달되지 않을 듯싶은데, 昨今에 전국의 어느 절에서나 유행처럼 벌어지고 있는 佛事가 大興寺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시끄럽기는 매한가지이다. 두륜산의 깊은 산중에 고요히 은둔하고 있는 절의 모습을 그려 본 게 애당초 잘못이다.
   곱기로 소문난 두륜산의 단풍이 올해에는 칙칙하기만 하다. 오랜 가을가뭄 탓인가, 아니면 그렇게 보는 내 마음 탓인가?  

 

임진왜란 때 獄에서 풀려 난 이순신 장군이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2척의 병선으로 왜선 133척을 물리친 神話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곳--울돌목을 제일 먼저 찾았다. 초등학생인 두 아들에게는 이번 여행길 중 그래도 친숙한 곳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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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 300여 미터의 이 좁은 해협은 그야말로 '바다의 峽谷'답게 바닷물이 마치 깊은 산의 계곡물처럼 빨리 흐르고, 곳곳에서 소용돌이가 친다. 물소리 또한 요란하다. 때문에 울돌목(鳴梁)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 두 번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는 시간에는 바닷물의 흐름이 멈춘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울돌목의 주변에는 鳴梁大捷을 기리는 공원이 조성되고 기념탑과 전시관이 세워져 있는데, 그보다는 울돌목을 가로 질러 진도를 육지와 연결하는 다리가 눈길을 끌었다.
   國粹主義者라고 지탄을 받을지는 몰라도, 아무튼 서울나그네의 눈에는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보다 훨씬 더 멋있게 보였다.

 

    울돌목을 떠나 최근에 발견된 공룡화석지를 거쳐 綠雨堂으로 향하였다. 孤山 尹善道가 살았던 綠雨堂은 先人의 정취가 은은하게 감도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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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물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많은 서책이 잘 보존되어 있고, 恭齋 윤두서의 자화상이 눈길을 끈다.

"어느 쪽에서 보아도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애" 하는 경호의 寸評이 그럴싸하다.

   유물관에는 東國輿地圖도 전시되어 있는데, 고산자 김정호가 이 지도의 잘못된 곳이 많음을 보고 大同輿地圖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고 경호가 설명한다.
   어느 새 아들한테 배우며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면서 서글퍼진다.  
   綠雨堂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海南 尹氏 가문의 넉넉함과 후한 인심에서 기인하리라.


   해남과 이웃한 강진의 茶山草堂은 이름과는 달리 '草堂'(초가집)이 아니라 '瓦堂'(기와집)이다. 후세 사람들이 복원하면서 지붕에 기와를 올린 덕분이다.
   이왕 복원하는 김에 유배지답게 草堂으로 하였으면 더 어울릴 텐데 그 심사를 모르겠다. 草堂의 오른 쪽 옆에 세운 천일각 또한 마찬가지이다. 귀양살이 하던 사람이 어찌 정자까지 지어 놓고 지냈으리오.  

   그러고 보면 이 곳에서 정약용의 진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것은 草堂 왼쪽의 바위에 새겨 놓은 '丁石'이라는 해서체 글씨뿐이라는 유홍준교수의 말이 틀린 게 아니다(자연훼손이라며 지금은 바위에 글씨를 새기는 사람은 김정일밖에 없다는 아들놈의 말에는 선뜻 응대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눈에 보이는 것만 자취이리요.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500 여 권의 책으로 남긴 선생의 혼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는지.


 

    강진읍내의 해태식당에서 한정식으로 배를 불린 후 바로 이웃에 있는 金永郞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2년 전 가보았던 평창의 李孝石 생가와는 달리 초가집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자연스레 강진과 평창이 비교되었다. 이래서 南道를 藝鄕이라고 하는 것일까.
   마당 한켠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적힌 詩碑가 초가집에 안 어울리게 장대하여 玉의 티였다.

   永郞 생가를 나서는데 어느 덧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가고 있다. 서둘러 고려청자 도요지로 달려갔다.
   강진은 진안과 더불어 고려청자의 산지로 이름을 떨치던 곳인지라, 고려청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으리라고 잔뜩 기대하였는데, 그 기대가 한낱 물거품으로 되었다.
   마침 진행되고 있던 韓日간의 월드컵 축구예선전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고 있어 모든 사람들이 일손을 놓았기 때문이다. 온 국민의 관심사이니 그들을 탓할 수도 없어, 맥 빠진 걸음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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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興寺 앞 前進基地로 돌아가는 길에 月出山 기슭의 無爲寺를 들렀다. 세종대왕 때(1430년) 지은 극락보전(국보 13호)의 단아한 모습이 눈에 띈다. 완전히 벗겨진 단청이 세월을 말해주는데, 그로 인해 나무의 原色이 드러나 오히려 운치가 있다.
   구조가 주심포 맞배지붕에 배흘림기둥이라는 정도는 이제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완전히 '堂狗三年吟風月'(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無爲寺는 더 이상 '無爲'寺가 아니다. 佛事를 한답시고 돌아가는 톱날소리가 '無爲'寺를 '有爲'寺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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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南은 바다의 남쪽이 아니라 육지의 남쪽이니, '陸南'이라고 불러야 이름이 걸맞을 성싶다. 보길도로 가는 배가 해남의 땅끝, 아니 한반도의 땅끝에서 떠난다.
   땅끝---참으로 향토색 짙은 정감이 가는 순 우리말이다. 그런 땅끝을 굳이 '土末'이라고 한자어로 造語하여 부르는 이유는 무어람.  

   甫吉島로 가는 배에는 11월 初入의 아침 이른 시각인데도 생각 밖으로 사람이 제법 붐빈다. 고작 1시간 정도 가는 연안여객선인데도 자동차 여행이 보편화되어서인지 차를 싣고 갈 정도로 배가 크다.
   배에 실린 차들의 번호판을 둘러보니, 지난 밤에 합류한 진주지원장 이인복판사 차의 경남번호판은 약과다. 멀리 서울, 인천의 번호판도 보인다. 저들은 왜 그 먼 길을 고생스레 달려 왔을까.....
   쓸데없는 상념은 이내 다도해의 절경에 파묻혀 버린다.

   동해의 맑은 물과 서해의 오밀조밀함을 함께 갖춘 곳이 남해이다. 뱃전에 기대어 전후좌우의 풍경을 구경하느라 고개를 부지런히 돌리다 보니 어느 새 보길도이다.
   여행길에 나서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조급함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언제 또 오랴 싶어 하나라도 더 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有限한 인생 탓이라기보다는 부족한 수양 탓이라고 自問自答하여 본다.  

   漁父四時辭의 産室, 보길도의 洗蓮停은 우리 문화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녹슨 안내판을 지나 숲속으로 몇 걸음 들어가니 현판도 없는 정자 하나가 연못(洗蓮池)가에 서 있는데, 그 연못에는 연꽃은 오간 데 없고 시커먼 바닥이 흉칙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군데군데 고여 있는 물은 이미 썩을 대로 썩었고, 온갖 오물들로 꽉 차 있다.  그뿐인가, 연못가 한 쪽은 새빨간 칠을 한 슬레이트 지붕의 허름한 건물이 연못의 주인인 양 자리 잡고 있고, 또 한 쪽에는 보길초등학교의 시퍼런 쇠말뚝 담장이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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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이 정녕 孤山 尹善道가 시를 쓰며 지내던 곳이란 말인가. 도대체 나는 무엇을 보러 왔단 말인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孤山 선생이 알면 지하에서도 통곡할 일이다.
   어제 본 해남의 綠雨堂과 어찌하여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는지 짧은 소견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완도군의 당국자에게 물어 보면 또 예산타령이나 늘어놓으리라.  
   선착장 부근 보길면사무소에 걸어 놓은 '세계의 관광...' 어쩌구 하는 플래카드나 치워 버릴 것이지.
   대부분 사람 손으로 만들어지고 가꾸어진 유럽의 관광지를 떠올리며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를 절감하여야 했다.  

   洗蓮停에서의 씁쓸한 뒷맛은 해안을 따라 난 길을 달리며 빼어난 풍광에 매료되는 사이에 어느 정도 희석되었다. 섬과 섬 사이 마다의 김양식장에 설치된 하얀 浮漂들이 마치 바둑판같다고 했더니만, "그러면 백이 이겼네" 하고 경호가 받는다. 요새 동아문화쎈터에 바둑을 배우러 다니더니 그 값을 하는 게 밉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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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모래 대신 까만 자갈들이 깔려 있는 예송리 해수욕장은 철이 지난 탓에 우리 일행밖에 찾는 이가 없었다.
   그래도 妻나 나나 사람이 들끓는 여름바다보다는 한적한 겨울바다를 더 좋아하니 둘 다 나이를 속일 수는 없나 보다.  

   햇볕을 받아 따스한 까막돌들의 감촉이 너무 좋다. 하나같이 동글납작하고 반질반질하다. 파도가 치면 서로 부딪치며 짤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고 한다.
   신기한 것만 보면 무엇이든지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이 한 때 이 까막돌들을 사가려 했다고 하는데, 돈만 된다면 무엇이든 내 주던 시절에 용케도 거절했구나 싶다.
   우리의 문화유산, 우리의 자연을 제발 잘 보존하고 가꾸어 후손에 물려주기를 기대하여 본다.(1997.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