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에 머물며

 

   갑오년도 일곱달이 지나 여름의 한복판이다. 바야흐로 중복(7.28.)과 말복(8.7.) 사이의 시점이니 참으로 덥다. 비가 실종된(적어도 중부지방은) 장마 때문에 올여름은 유난히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7말8초의 여름휴가철을 맞았으나 지난 1월에 히말라야 다녀오느라 1주일 휴가를 써서 여름휴가를 또 가기가 쉽지 않다. 책상에 쌓이는 사건기록을 보면 여유를 가지고 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에만 매달리는 것도 주위 여건상 녹녹하지 않다. 

 

   그래서 2014년 8월 1일(금)  하루 휴가를 내 2일(토)까지 봉정암 템플스테이 겸 설악산 등산을 하기로 했다. 법원산악회의 법관회원 중 맹장(?)이라 할 만한 사람들과 함께. 어짜피 한 달에 한 번은 하는 산행이니, 이왕이면 큰 산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복지경의 설악산!

    멋지지 않은가. 

 

    그것이 나만의 생각이 아님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만난 그 많은 사람들이 단적으로 말해 준다. 서울은 푹푹 찌는 가마솥이었어도 봉정암은 방에 불을 때야 했고, 대청봉에서는 바람막이를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했다. 말 그대로 '피서'를 한다면 이만한 피서를 어디서 하겠는가.  

 

    산행코스는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봉정암에 도착해 1박하고, 다음 날 소청봉, 중청봉을 거쳐 대청봉(1,708m)에 도착하여 화룡점정을 한 후 오색약수 쪽으로 하산하는 길을 택하였다. 통상 등산하는 코스의 정반대방향을 잡은 것인데, 그것은 봉정암에서 템플스테이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 동반자들의 염원 때문이었다.  그 염원에  부합하게 봉정암에서의 1박은 멋진 추억을 남겼다.  

 

    그렇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위와 같은 역주행의 산행코스 때문에 대청봉에서 오색약수로 내려가는 경사가 하도 심하여 무릎이 몹시 아팠다. 올라갈 때도 4시간이면 충분한 길을 내려가면서 4시간 30분 걸렸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무릇 '등산은 가파르게 올라가 완만하게 내려가라'는 철칙을 어긴 죄이다.  반면에 백담사에서 봉정암 가는 길은 워낙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거의 산책로 수준이다.   

  그렇기는 해도, 가뭄이 심하여 물이 부족한 탓에 수렴동계곡에 군데군데 물길이 끊겨 웅덩이가 생긴 모습을 가슴 아프게 보아야 했던 것을 빼고는 환상적인 여정이었다.  

 

   일찌기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는  '山中寓居(산중우거)'라는 시에서, '산에는 가도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보는 게 두려워 꼭대기에는 오르지 않는다'고 했지만,  범부에게는 아직도 산은 정상에 올라야 비로소 등산의 맛을 느끼니 여전히 갈 길이 먼가 보다.  

 

      山中寓居(산중우거)

 

高顚不敢上(고전불감상)

不是憚躋攀(불시탄제반)

恐將山中眼(공장산중안)

乍復望人寰(사부망인환)

                  

                  산중에 머물며

 

              산꼭대기는 차마 오르지 않는데

              오르기 힘들어서가 결코 아니다.

              산에 사는 사람의 눈으로는

              인간 세상 바라보기가 두려워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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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동행한 신우정 판사가 쓴 산행기이다)

        

       산악세계 이방인의 설악산 체험기

       (Start Before You Are Ready!)      

                                        ---신우정 

 

나는 강원도 양양에 위치한 8군단에서 1년 동안 법무관 생활을 했었다.

그 때 설악산은 내가 살던 집에서 그 입구까지 2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흔한' 곳이었으나, 나는 그래서인지 그 가치를 크게 느끼지 못한 채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때 따라 유난히 많이 왔던 눈과 씨름하며 속히 콘크리트 가득한 서울로의 복귀만을 꿈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 정말 설악산과 제대로 몸을 섞고 왔다.

꼭대기 '대청봉'의 비석 머리까지 쓰다듬으며 진짜 이 산의 꼭대기까지 맛을 본 것이다. 조선일보 조용현 칼럼에 등장했던 표현인 '마운틴 오르가즘(Mountain Orgasm)'... 바로 그것을 느끼고 왔다.

 

정말 무언가와 진정으로 교감하는 일은 언제나 재미있고 감동적인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런 점에서 그것을 느끼게 해 주신 범의거사(凡衣居士) 민일영 대법관님에 관해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Authentic) 산악인... 민일영 대법관님께는 '진정한'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골프를 소재로 인생을 논한 The legend of Bagger Vance(베가번스의 전설)에서 골프(인생) 칠 때 남 스윙 따라하지 말고 자신의 “Authentic Swing”으로 치라는 대사를 들으면서 ’Authentic‘이라는 단어를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고, 거기서 많은 것을 유추해 내고 있다.

 

'자신의 심장을 따르는(Following your heart)''진정한(Authentic)'에 대한 나의 정의이다. Following your heart 이론에 따르면, 진정하게 살면 자신도 그것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의 행복과 함께 결국 excellency라는 최고의 결론까지 거머쥐게 된다. 나아가 그 것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도 흐뭇한 감응을 받게 되고 그 행복 에너지가 전파되게 된다. 나의 심장의 참된 박동이 다른 사람에게도 힘을 불어넣는 것이다.

 

민 대법관님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산악인이다. 정말 제대로 Mountain Orgasm을 맛보신 분으로 확신한다. 산에 계실 때 가장 행복해 보이신다. 그 분의 심장은 계속 산을 외치고 있고, 민 대법관님은 그것을 충실히 따르고 계신다는 것이 나의 분석이다.

 

이제 그 분의 진정한 행복 에너지가 이 번 설악산 기행을 통해 어떻게 산악세계 이방인이었던 나에게도 스며들었는지 총총히 보고하고자 한다.

 

올해 나의 첫 휴가 날이자 8월의 마수걸이 날, 나는 그 날 아침부터 전날 먹은 술 때문에 일어나기조차 힘들었으나, 매일 하던 습관을 버릴 수 없어 그 날도 부리나케 수영을 하고 집결지인 대법원으로 향했다. 무지 더울 것이라는 예상으로 반바지와 반팔 티, 선글라스, 여름용 모자 등 가장 땀을 안 흘릴만한 장비들로 무장한 채 민 대법관님과 그 남자들 - 이영훈, 박영호 부장님, 위광하 판사님, 김춘수 판사님 - 을 오전 8시 대법원 테니스 코트 옆에서 만났다.

 

올해 시작한 부업이 '대법관님 운전사'이다. 간혹 필요할 때마다 대법관님 차량을 몰고 있는데, 이 번 갈 때 올 때에도 부업을 하였다. 가장 길게...

 

한 번의 휴게소 방문을 거쳐 약 4시간만에 점심 장소에 도착했다. 그 날 예정된 코스가 백담사에서 시작하여 봉정암에 올라 템플 스테이(temple stay)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낙산사 홍련암 사무장님 - 순박하면서 산 잘 타게 생긴 분이었다. 이 번 여행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에게 많은 보시(布施)를 하였다 - 은 백담사 부근 식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갖은 강원도 야채와 순두부 등을 곁들인 황태구이 정식으로 몸을 충전하고 - 나는 그 때 내 심장을 따라 밥 두 그릇을 먹었다 - 우리는 그 날 등반의 거점인 그 유명한 백담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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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전경]

  

지금까지 보았던 절들에 비해 웅장한 규모였다. 그 뜨거운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 사실이 인상적이었는데, '우리나라 12번째 대통령이 묵었던 방'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역사적인 방을 포함하여 대강의 모습을 훑은 후 우리는 서둘러 목표지인 봉정암 등반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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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입구]

 

여름 등반도 처음이었거니와 30도가 넘는 날씨에서의 등산을 사뭇 걱정했던 터라 초 슬림으로 옷을 입었건만 역시 덥기는 더웠다. 하지만 울창한 숲의 냄새와 청정 계곡물에 힘을 얻어 나는 조금씩 조금씩 봉정암에 다가서고 있었다.

 

봉정암에 오르는 약 4시간 정도의 시간동안 몇 군데 휴식 포인트가 있었고, 관점 포인트가 있었는데 - 관전 포인트는 곧 촬영 포인트였다 -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봉정암에 오르기 약 1시간 전쯤 만났던 계곡 물과 쌍룡폭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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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룡폭포]

 

어찌나 시원했던지 수없이 그 계곡 물을 손수건에 적셔 온 얼굴에 무차별로 뿌려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까지의 열기가 모조리 수그러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산악세계 이방인의 미증유(未曾有)의 고통이 어느 정도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쌍룡폭포는 그 모습 자체도 기이했거니와 용이 승천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니 기념 촬영을 하고 싶어 결국 독사진까지 찍었다. 그 기이함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는지 촬영인파로 북적댔다. 이전에도 느꼈고, 이 번 여행에서도 느꼈지만 내가 사진 찍기 좋아하는 곳은 대부분 남들도 좋아한다. 보는 눈은 비슷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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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룡폭포]

 

이제 봉정암이 눈 앞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 담담하라고 하는데, 봉정암은 그 당도의 직전까지 도도하게 자신을 보호하고 있어 그 땅을 밟는 순간 승리의 쾌감으로 담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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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암 전경]

  

오후 630분경 우리는 그 날 묵을 방에 배낭과 등산스틱을 내려놓고, 저녁식사할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봉정암은 기도발이 잘 통한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란다. 저녁 시간 때인지라 그 날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산사에서 제공하는 절 밥 - 1m 거리에서 보니 사발에 밥과 미역 냉채 비슷한 국과 오이를 버무린 웰빙 건강식으로 보였다 - 을 봉정암 도처에서 먹고 있었다.

저 밥을 먹겠지하고 예상하면서 걸어갔으나, 낙산사 홍련암 사무장님에게 인도되어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웰빙 산사 뷔페가 준비되어 있었다.

 

등산 후의 즐거움으로 먹는 것을 꼽는 사람이 가장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술 먹기 위해 등산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등산은 술 먹기 위한 최적화된 신체를 제공하는 것 같다. 술도 그런데 밥은 어떻겠는가? 아무 것이나 먹어도 다 꿀꺽 삼킬 판에 유기농으로 추정되는 산사의 다양한 채소들의 매력과 봉정암 된장국의 풍미를 엄청 느끼면서 정말 뚝딱 한 그릇을 해치웠다.

 

포만의 행복감을 느끼며 간단히 세면을 마친 후 우리는 식사장소에서 약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봉정암 기도발의 중심인 사리탑으로 향했다. 자장 율사에 의해 부처님의 뇌사리(뇌의 사리)가 보관되어 있다는 그 영험한 탑(불뇌보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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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뇌보탑]

 

 해질 무렵이었으나, 사리탑 주위에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부처님을 통해 실현하기 위한 많은 사람들로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이렇게 험준하고 높은 곳에, 그것도 지금 시대도 아닌 먼 먼 옛날에, 이렇게 단아하고 기품 있는 예술 작품이 만들어졌는지 선조들의 지혜와 기술에 감탄을 하면서, 사리탑 앞에 마련된 기도 매트 위에 나또한 나의 꿈과 희망을 부처님께 고백하였다.

 

그 후 조금 지나서... 나는 너무도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결국 Mountain Orgasm에 몸을 떨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아름다움에 감탄해 본 적이 있느냐고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이제는 확실히 ""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리탑 기도 후 대법관님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약 5분 정도 오른 직후 나는 진정 '아름다움에 도취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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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속의 공룡능선]

  

석양의 광채를 몸에 가득 담은 채 아름다움을 마구 내뿜는 설악의 자태는 왜 설악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불리는지를 너무도 선명하게 알려주었다. 남성적인 듯 여성적인... 부드러운 듯 강한... 범접할 수 없는 귀티를 발산하는 공룡능선의 그 굴곡과 형태에 매료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름다운 얼굴이 완벽한 조명을 받아 여신(남신) 미모로 탄생되듯이, 그 날 그 순간의 공룡능선은 그(그녀)를 비추는 천혜의 조명을 받아 너무도 완벽히 빛나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산을 타는지에 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해 준 이 번 설악산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실로 Mountain Orgasm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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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줄 왼쪽부터 민일영 대법관님, 박영호, 이영훈 부장님뒷줄 왼쪽부터 필자, 김춘수, 위광하 판사님]

 

이제 긴 밤이 남았다. 봉정암에서는 우리에게 방을 2개 제공하였고, 대법관님 방 바로 옆방에서 나를 포함한 다섯 남자들은 동침을 하게 되었다. 정말 5명이 한꺼번에 누우면 빼곡히 들어차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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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암의 숙소]

  

대법관님과 함께 산사에서 디저트로 제공한 씨알 굵은 포도, 복숭아를 실컷 음미하고 방에 침입한 벌레들을 소탕한 후 대략 10시 무렵부터 잠을 청했는데, 잠은 잘 오지 않았다.

끊임없는 목탁 소리와 딱딱한 방바닥에 잠은 설쳤지만, 절간의 생활은 멈춤이 없는 수행의 연속이구나라는 생각을 비몽사몽간 하면서 결국 새벽 5시 무렵 예정대로 다른 분들과 함께 눈을 떴다.

 

대법관님께서는 이미 새벽 3시부터 새벽예불을 하고 오신 상태였다. 대법관님의 불심에 다시 한 번 속으로 감탄하면서 우리는 저녁식사 때와 똑같은 장소에서 유난히 밥이 맛있었던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서둘러 설악산의 꼭대기 대청봉을 향했다.

 

봉정암에서 대청봉까지는 대략 2시간이 걸렸다. 완만한 경사인데다 중간에 휴게소도 2개나 있는 등 전날 등반보다 훨씬 수월하였고, 무엇보다도 에어컨처럼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불어주어 매우 상쾌한 산행이었다.

 

한 여름에 피서 제대로 왔다고 생각하면서, 어느덧 전문 카메라기사가 된 2- 이영훈, 박영호 부장님 - 을 통해 주위 풍광을 확실히 우리 것으로 만들면서, 쉬엄쉬엄 걷다 보니 어느샌가 대청봉 비석이 내 눈 안에 들어와 있었다. 1년 동안 그 주변에 살았어도 오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 곳에 결국 오른 것이다.

 

대청봉 자체나 대청봉에서 볼 수 있는 주변 경관은 의외로 평범하였다. 과장과 가공을 되도록(?) 혐오하기에 여기에서 대청봉의 모습을 내가 본 것과 달리 묘사할 생각은 없다. 날씨가 흐린 탓이었을 수도, 전날 본 광경이 너무 수려했던 탓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솔직히 '정상에 올랐다'는 쾌감 외에 나를 자극하는 것은 없었다. 정상의 허무함! 어쨌든 우리는 약 20분이나 기다려 정상 컷을 찍는 데 성공하고 오색약수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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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민일영 대법관님, 필자, 위광하 판사님김춘수 판사님, 이영훈 부장님, 박영호 부장님]

   

대청봉 등반 코스 중 가장 가파른 코스가 오색약수터에서 시작하는 코스라고 한다. 우리는 그 코스를 하산코스로 택하였다.

올라가면서 가파른 계단의 연속으로 주위에 어느 것 하나 아름다운 경치는 구경하기 어려우나, 다만 대청봉까지 가장 짧은 거리로 오를 수 있다는 오색약수터 코스는 인생의 한 단면을 투영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의 계단을 성큼성큼 밟으면서 주위는 돌보지 않은 채 가장 단기간에 정상에 오르려 하는 것과 어찌나 비견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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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약수로 내려가는 길]

 

4시간 30분 동안 가파른 하산의 길에 인생을 생각하면서 결국 오색약수터에 당도하였다. 온천 물에 몸을 담궜다. 25시간의 빼곡히 들어찬 여정의 피날레였다. 모두 함께 활짝 웃었다. 진정으로(Authentically)...

 

지금까지 나에게 산행은 "올라갈 때의 고통, 정상에서의 잠깐 동안 느끼는 성취감, 내려올 때의 고통"으로 요약된다.

'신의 한 수'라는 영화에 "고수에게 인생은 놀이터, 하수에게 인생은 고통"

라는 대사가 등장하는데, 나에게 적어도 산행은 고통이 태반인 셈이다. 말 그대로 하수임에 분명하다. '정상에서 느끼는 잠시 동안의 성취감을 위해 왜 올라갈 때나 내려갈 때 고통을 겪어야 되는 것인가?'가 지금까지 산악세계 이방인으로서의 항변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내가 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 100% 자발적이라고 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산을 탈 수 있을지는 의문이나, 올해 나의 산악세계 입문은 지금까지 경험만으로도 인생의 스펙트럼을 보다 맛깔스럽게 색칠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나와 같은 산악세계 이방인들을 위해 네덜란드 있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Steven Pressfield"Do the work"라는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Start before you are rea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