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지리산과의 첫 조우
2014.10.25 20:53
선순환의 즐거움
2014년 8월 1-2일 설악산을 다녀 온 후 두 달여가 지난 9월 27일 지리산에 올랐다. 전자는 월초이고 후자는 월말이니 계산상 두 달여이지만 달력상으로는 분명 8월과 9월이므로 매월 큰 산에 오른 셈이다. 그것도 남한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을 오른 후 바로 그 다음 달에 두 번째로 높은 산에 도전한 것이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우리 일행이 무슨 전문산악인들인 줄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면 어떠랴, 산이 있어 산을 찾고, 산을 찾다 보니 산이 좋아지고, 산이 좋아지다 보니 다시 산을 찾는 선순환의 즐거움은 산을 올라 본 사람만이 안다.
아래는 올봄부터 나와 함께 산에 다니면서 그런 즐거움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한 김춘수 판사의 지리산 산행기이다. 이런 글을 처음 써 본다는 그의 글 솜씨에 탄복하며 단숨에 읽었다. 산의 매력, 글의 마력이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겨울이 되어 한라산이 눈으로 하얗게 덮이게 되면 남한에서 제일 높은 이 산마저 올라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여 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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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지리산과의 첫 조우
매주 주말 많은 사람이 전국 곳곳의 명산을 찾아 오르지만, 나에게 산은 생소한 존재였다. 1년에 대여섯 번 집 근처의 산을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등산뿐만 아니라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에 관한 호기심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올해 凡衣居士 민일영 대법관님을 모시며 다양한 세상과 첫 만남을 가지는 일이 많아졌다. 창극, 서예전, 발레, 미술관, 사찰음식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반가운 초대는 산이었다. 그동안 이름만 들었던, 혹은 언저리만 맴돌던 산의 초대에 응하면, 산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 일상에 찌든 나에게 활력을 선물해 주었다.
올해 대법관님과 함께 한 산행은 소요산에서 시작하여, 월류봉, 북한산, 설악산으로 이어졌다.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는 지리산의 품에 안기고, 기운이 빠져 몸이 처질 때는 설악산의 바위 맛을 보아야 한다”는 말처럼 몇 개월 동안의 업무와 일상에 지쳐있던 지난 여름, 설악산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높으며 험준한 바위로 이루어진 골산(骨山). 처음에는 그렇게 높은 산에 올라갈 수 있을지 불안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이 왔다 간 산인데 나라고 못하겠는가라는 무모한 자신감과 한번 그 정상에 서 보고 싶다는 욕구도 공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힘들었지만 선두에서 페이스를 조절하며 이끌어 주신 대법관님과 함께 한 동료 덕분에 무사히 설악산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산행지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인 지리산으로 결정되었다. 예전부터 사진 등 매체를 통해 듣고 보아 온, 너무나 익숙한(?) 지리산은 나에게는 문학작품 속, 기사 속, 그리고 등산객들의 이야기 속 세상이었다. 2014년 9월의 산행에서 바로 그 익숙한 지리산을 만났다. 등산화를 신고 만나는 지리산과의 첫 조우였다.
우리의 산행은 대법관님의 군산, 정읍, 남원, 진주지원에 대한 격려방문의 끝과 함께 시작되었다. 마지막 격려방문지인 진주지원의 지원장님을 비롯한 진주지원 식구들과의 저녁 자리에는 황진구 부장님, 김상훈 부장님, 손진홍 지원장님, 전휴재 부장님이 지리산 산행에 동참하기 위하여 서울, 남원, 순천에서 합류하였고, 진주지원의 오권철 부장님도 산행에 함께하기로 하였다. 원래 동행하기로 한 조병구 부장님은 아쉽게도 약 2주 전의 맹장수술로 인해 동행하지 못하였다.
9월 26일 저녁 식사 후 우리는 지리산 자락 아래 중산리에 위치한 펜션으로 이동하였다. 이미 배부르게 먹은 상태였는데 거기서 또 판을 벌였다. 삼겹살, 가리비, 장어 등의 푸짐한 바비큐와 더불어 진주지역이 자랑하는 술인 ‘진주’는 나의 목구멍을 타고 계속 넘어가고 있었다. 아주 성대한 출정식이었다.
다음날인 9월 27일 새벽 4시 30분, 나는 이영훈 부장님의 씻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우려했던 바와 달리 숙취는 별로 없었다. 우리는 전날 먹은 음식이 채 소화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슬기국으로 속을 풀고 또 든든히 채웠다.
그 무렵 전주에서 변성환 부장님이 등반을 함께하기 위해 합류하였다.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나서 차를 끌고 오신 것인지... 천왕봉 등정을 벼르고 있던 분답다. 이로써 우리의 등산 일행은 모두 11명이 되었다. 민일영 대법관님, 이영훈 부장님, 신우정 판사님, 김인숙 비서관님, 황진구, 손진홍, 김상훈, 오권철, 전휴재, 변성환 부장님, 그리고 나.
이미 여러 차례 지리산 천왕봉을 등정하였고 지리산 종주까지 마치신 진정한 Master이신 대법관님, 20여 년 전 지리산 종주를 이미 하신 바 있는 타칭 지리산 전문가 김상훈 부장님, 군대 시절 천왕봉을 정복하신 바 있는 손진홍 지원장님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지리산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6시 20분쯤 등산의 시작점인 경남환경교육원 근처에 도착하였다. 법계사로 올라가는 입구에서 우리는 파이팅을 외치면서 결의를 다진 후 출발하였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민일영 대법관님, 황진구 부장님, 김인숙 비서관님, 김상훈 부장님, 손진홍 지원장님, 신우정 판사님, 이영훈 부장님, 나, 오권철 부장님, 전휴재 부장님, 변성환 부장님, 조병구 부장님. 조병구 부장님은 등산의 시작 지점까지 우리를 배웅해 주셨다.]
출발 무렵, 모두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과 천왕봉 정복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는지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특히 28기 부장님들인 김상훈, 변성환, 오권철, 전휴재 부장님은 일행의 뒤쪽에서 즐겁게 걷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발 1,450m)한 절인 법계사(法界寺)에 다다랐다. 대법관님께서는 우리를 사찰 입구에서 쉬게 하시고는, 경내로 들어가셔서 우리의 안전한 산행을 기원해 주셨다. 따라나섰어야 하는데 체력을 안배해야겠다는 짧은 생각에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로 눈앞에 법계사를 두고도 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법계사와 석탑]
다시 시작된 산행. 오르면 오를수록 험난해지는 경사에 숨이 헉헉 차오르면서 다들 말수가 적어지기 시작하였다. 잠깐의 휴식시간에 지리산의 경치에 감탄하고, 또다시 앞사람의 발만 보면서 걷는 길이 계속되었다. 물을 빨아들이는 솜처럼 점점 무거워지는 다리를 의식하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 듯 고통이나 아무런 잡념 없이 그냥 걷게 되었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마저 든다.
상당한 거리를 걸어왔다 싶을 무렵 무서운 경고판이 등장했다.
“탈진, 심장마비 등 안전사고 다발 구간”!!!
군시절 낭떠러지를 끼고 있는 GOP로 가는 길에서 본 경고판이 생각났다.
“졸면 죽는다”!!!
이제부터가 진짜구나라는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역시 괜히 지리산이 아니구나, 그 정상을 아무에게나 쉽게 허락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을 시작한 지 4시간쯤 지나 마침내 지리산 능선 최고의 마루에 올랐다. 힘차게 달려온 지리산의 능선이 불끈 솟은 곳! 지리산의 준봉들이 좌우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곳,
천왕봉!
천왕봉에 오르니 사방으로 펼쳐진 지리산 자락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몇 시간을 걸어온 후에만 볼 수 있는 이 풍광은 내가 예전에 알고 있던 사진 속의 그 산이 아니었다. 따뜻한 햇볕 속에서 발아래 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과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그 광범위한 산세는 사진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설악산의 공룡능선이 보여 주던 강인함은 없었지만, 경남, 전북, 전남에 걸쳐진 인근 지역을 엄마처럼 따뜻하게 안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이 육산(肉山)의 포근함일까? 왜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 지리산의 품에 안기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9월, 아직 단풍이 물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곳곳에 꽃꽂이해 놓은 듯 알록달록한 단풍이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다.
설악산에서도 느꼈지만, 명산의 정상에서 인증사진을 찍는 일은 산을 오르는 만큼의 인내심이 필요한 일인 듯하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산에 오른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인증사진을 찍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들의 산에 대한 열정과 부지런함이 존경스러웠고,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산에 관한 문외한이었던 내가 그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들의 긴 줄을 비켜나 너무나도 절묘한 위치에서 우리는 표지석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었다.
[점심 식사 후 아쉬운 마음에 정식으로 다시 인증사진을 찍었다. 표지석 바로 왼쪽 옆은 오권철 부장님. 뒷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이영훈 부장님, 변성환 부장님, 손진홍 지원장님, 신우정 판사님, 전휴재 부장님, 민일영 대법관님, 김인숙 비서관님, 김상훈 부장님, 황진구 부장님, 나.]
금강산도 식후경! 대법관님과 우리의 만류와 사양에도 불구하고 진주지원에서 손님 접대를 하겠다며 맛있는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 주었다. 우리를 위해 고생스레 도시락을 준비하였을 직원들에 대한 고마움, 천왕봉 등정에 성공한 기쁨으로 그 어느 때보다 맛난 점심을 먹었다.
배를 든든히 채운 후 중봉, 써리봉, 치밭목 대피소를 거쳐 하산했다. 우리는 가끔씩 멈춰서 바라본 풍광과 아담하고 소박한 치밭목 대피소에서의 커피 한잔에 힘을 얻어 걷다가 어느 계단 앞에 멈추었다. 한쪽에서 작게나마 폭포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보이지는 않았다. 계곡 쪽으로 내려가니 웅장한 모습의 폭포가 눈앞에 펼쳐졌다. 수십 미터의 거대한 암벽이 3단을 이루어 시원하게 물줄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무제치기 폭포'.
물이 떨어지면서 포말을 날려서 스스로 무지개를 치는 폭포라 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산행에서 만나는 폭포만큼 청량감을 주는 것이 또 있을까.
[무제치기 폭포. 사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듯 실제의 웅장함을 반영하지 못하고 작게 나왔다. 과거 우륵이 이곳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에 맞춰 나무에 매단 실을 튕겨가며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무제치기 폭포의 아름다움에 짧은 시간 빠져 있던 우리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하산하는 길은 원시림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였고, 곳곳에 “곰 출현 주의”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지리산은 등산할 때도 그러했지만, 하산할 때도 끊임없이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지리산의 ‘곰 출현주의’ 표지판. 사나운 표정이며 송곳니가 곰보다는 호랑이 같다.]
하산을 시작한 지 3~4시간이 지났을 무렵부터 무릎에 신호가 오기 시작하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 모두 무릎과 허벅지의 통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다들 열심히 걸었다. 특히 황진구 부장님은 계단을 내려갈 때는 모뎀의 속도로 내려오시다가도, 평지에 이르면 LTE급 속도로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산을 시작한 때로부터 6시간 남짓의 여정 후, 드디어 우리는 종착지인 새재에 도착하였다. 시종일관 제일 앞장서셨던 대법관님께서는 도착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하이파이브로 격려해 주셨고, 또 축하해 주셨다.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치는 그 작고 간단한 행동의 큰 울림이란! 천왕봉 등정 성공에 대한 자축과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는 안도감, 함께 땀 흘린 동지애, 고단한 심신에 대한 위로 등등 여러 의미를 함축하는 작지만 큰 세레모니였다.
우리는 경남 산청군에 소재한 어느 목욕탕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저녁 식사를 하였다. 몹시 지친 나머지 제대로 밥이 넘어갈까 하는 우려도 있었으나, 기우에 불과하였다. 꽤나 이른 시각(오전 11시 무렵)에 점심을 먹었던 탓도 있었지만, 귀한 한우와 송이 앞에 식욕이 되살아나 모두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산행 막판의 고통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나의 지리산과의 첫 만남은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찬 포만감과 천왕봉에 올랐다는 뿌듯함 속에서 끝이 났다.
산행 내내 앞에서 이끌어 주신 대법관님과 아마추어인 서로를 말없이 격려하면서 함께 걸었던 부장님들을 비롯한 동행이 없었다면 11시간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내가 만난 지리산은 천왕봉에서 본 경치와 흙길에서 만난 나무, 폭포, 바위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산을 오른 사람들도 지리산에서 만난 멋진 풍경이었다. 역시 먼 길을 가는 가장 쉽고도 빠른 방법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익숙하고도 낯선 지리산과의 첫 조우는 더욱 근사했다.
등산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입문한 올해,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러 산을 올랐다. 소요산에서부터 설악산, 지리산까지...
앞으로도 나의 산행은 계속될 것이고, 산행 그 자체에서 즐거움과 새로움을 찾을 수 있겠지만, 더 욕심을 내 본다. 언젠가 나도 고요하고 변치 않는 산을 닮은 인자(仁者)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고.(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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