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남춘천행 기차에 오르다(금병산).
2015.05.31 15:00
법원도서관장으로 재직할 때 함께 근무하였던 국과장, 그 때 이래로 함께 근무하였거나 현재 근무하고 있는 조사심의관들이 모여 반든 등산모임이 서리풀산악회이다.
그 서리풀산악회에서 4월 18일에 춘천 교외의 금병산을 찾았다. 이미 지난 해 가을 산행 때 김용안 집행관이 제안하여 올봄 산행지로 정해 놓았던 곳이다.
산이 흙산인데다 그다지 높지 않아 걷기 좋았고, 기차로 접근할 수 있어 주말의 차량정체를 걱정 안 해도 좋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근래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여간해서는 함께 산행하기가 어려웠던 최진영 전 국장님이 현재 춘천에 귀향하여 살고 계신지라 이번산행에는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요인이었다.
법원도서관장직을 마친 후로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건만, 한결같이 가족처럼 대하는 얼굴들이 너무나 반갑고 고맙다. 앞으로도 이 모임이 영원히 이어지길 기대하여 본다.
아래는 함께 산행한 주선아 조사심의관의 산행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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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남춘천행 기차에 오르다"
산행이 결정되고 한동안 ‘산행기 전체를 잘 쓰지는 못하더라도 첫 문장만큼은 잘 써보자!’라고 다짐했었는데, 이 문장, 어떠신지요?
1. 출발
2015년 4월 18일 토요일 아침,
이날을 위해 새로 산 등산화와 봄꽃과 잘 어울리는 화사한 연두색 옷을 꺼내입고 용산역으로 향했습니다. ITX 타는 곳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무도 안 보입니다. 막간을 이용해서 초콜릿(‘초콜렛’이라고 썼다가 뭔가 이상해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찾아보니 표준어는 ‘초콜릿’인가 봅니다. ‘초콜릿’이라……. 한 번도 그렇게 발음해본 적이 없건만, 표준어의 세계는 정말 오묘합니다)과 초코바를 사서 가방에 넣으니 든든합니다. 역시 등산엔 초콜릿이지!(다시 써봐도 어색한 ‘초콜릿’) 한 10분 정도 역을 헤매다 보니, 알록달록 등산복 차림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입니다.
등산복을 입으셔도 카리스마를 잃지 않으시는 대법관님, 메일만 봤을 때는 다정다감한 이미지였으나 막상 뵙고 보니 상남자 스타일이신 송봉준 회장님(‘상남자’도 표준어가 아닌가 봅니다), 저와 커플룩 차림으로 오셔서 더욱 친근한 심활섭 부장님, 산처럼 큰 배낭 속에 맛있는 것을 가득 넣어오신 원종삼 사무관님과 박재송 계장님, ‘영양바’를 정겹게 나눠 주신 윤성혜 과장님, 어쩐지 수줍어 보이시는 배의철 심의관님, 산악인의 풍모가 언뜻(?) 엿보이는 김용안 집행관님과 황의곤 집행관님, ‘로맨스 그레이’의 대표주자 최진영 국장님, 허리에 파스를 붙이시고도 산행을 완수하신 의지의 사나이 조기열 판사님, 매일 얼굴 봐도 지겹지 않은 우리 한경근, 나윤민 심의관님.
2. 남춘천행 기차
9:30 출발하는 춘천발 ITX 2071호 열차. 총무님이신 원 사무관님과 박 계장님이 정성스럽게 프린트한 좌석표를 꼭 쥐고 열차에 올랐습니다. 대학 시절 엠티(MT) 가던 바로 그 길이 아닙니까! 어느새 제가 대학에 입학했던 20년 전, 1995년을 떠올리자 어쩐지 짠합니다. 그땐 20년이 지나 서리풀 산악회의 막내로서 이 길을 다시 지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세월의 흐름에 다소 감성적인 기분에 젖어들다가 허전한 마음에 아까 윤 과장님이 주신 영양바를 우적우적 먹다 보니 어느새 도착입니다. (산에서 대법관님께서 “주 판사는 아까 기차에서 혼자 뭘 그렇게 맛있게 먹었어?”라고 하신 것이 바로 저 영양바입니다. ^-^)
남춘천역에서 김유정역에 도착하니 11시쯤 되었습니다. 김유정역. 참 예쁜 이름입니다.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평화로운 마을. 김유정역 입구에서 최진영 국장님께서 나눠 주시는 김밥과 물을 챙기고, 등산화 끈 조여 매고, 썬크림 안 바르신 분들은 썬크림도 꼼꼼히 바르시고, 이제 출발합니다(윤 과장님의 손바닥 반만한 크기의 거울 보시면서 썬크림 바르시느라 고생하신 대법관님! 다음 산행 때는 큰 거울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3. 금병산 오르는 길
금병산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정보를 가지고 출발했습니다(정보의 출처는 ‘서리풀산악회 2015년 상반기 등산 안내’ 유인물).
“금병산은 춘천 신동면, 동내면, 동산면 접경에 있는 춘천시에서 8㎞ 떨어진 높이의 653m의 산으로 전형적인 육산 형태를 지닌다. 산기슭이 비단 병풍으로 둘러친 듯 아름답다 하여 지명이 유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원호장군이 왜군을 격퇴하였을 때 우리 군대가 주둔하였다 하여 진병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금병산은 1930년대 주옥 같은 소설을 남긴 김유정(1908~1947)이 태어난 고향 산이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비단 병풍의 느낌이라기보다는 폭신폭신 따뜻한 초록색 목도리 느낌입니다. 별로 가팔라 보이지도 않아서, ‘저 정도 언덕쯤이야!’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출발했습니다.
[산행지도]
우리 산행 안내 유인물에 보면 우리가 갈 코스가 ‘김유정역(11:00) → 싸리골 → 철탑삼거리 → 산골나그네길 → 금병산 정상(653m) → 동백꽃길 → 잣나무숲 → 비닐하우스 농가 → 김유정기념전시관 → 김유정역 주차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산행기 집필 예정자(?)로서 각 지점, 즉 싸리골, 철탑삼거리, 산골나그네길, 금병산 정상, 동백꽃길, 잣나무숲, 비닐하우스 농가에 도착하면 사진도 다 찍고 그곳 특징들도 기억해뒀다가 산행기에 반영해야지 생각하면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가파른 비탈을 지나면 완만한 길이 나올 줄 알았는데, 한 4~50분 정도(객관적인 수치는 아니고 저의 체감 시간입니다) 계속해서 가파른 길만 나옵니다. 위를 보면 너무 가파르게 보여서 막막한 마음에 바닥만 보면서 걷게 됩니다. 그렇게 폭신폭신 완만해 보이는 금병산의 실제 면모가 이러했다니…….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사진도 찍으면서 여유 있게 올라갔는데,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얼굴이 벌개지면서 숨이 턱턱 차오릅니다.
헉헉헉……헥헥헥헥헥…….
그렇습니다. 저 등산 무능력자입니다.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과 입 운동(수다떨기?)밖에 안 했던 지난날들이 후회됩니다. 금병산 정상에 도착할 때까지 대체 싸리골, 철탑삼거리, 산골나그네길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만 빼고 모두 정말 편안해 보이십니다. 역시 여러 해 동안 서리풀 산악회 등산으로 단련된 체력! 여유 있게 담소를 나누며 저 비탈길을 오르시는 모습이라니. 다행히 중간중간에 최진영 국장님께서 사진을 찍어주셔서 쉬엄쉬엄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표정과 같은 포즈로 독사진 찍기를 하면서 좀 쉬고 나니, 각 지점이 어느 지점인지까지는 파악하진 못해도 예쁜 꽃과 나무와 하늘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금병산 정상입니다. 나무 계단을 올라가니 전망대인가 봅니다. 진달래꽃 무더기 너머로 춘천 시내가 한눈에 보입니다. 대법관님께서 춘천 시내 곳곳을 설명해 주시는데, 구석에서 헉헉 숨 고르느라 제대로 못 듣다가 귀신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귀신 이야기 예를 드시면서 “이쪽 변기에서 소변을 보는데 저쪽 변기의 물이 내려가고.”라고 하셨을 때는 무섭다기보다는 사람을 놀리려고 장난을 치는 귀여운(?) 귀신의 모습이 떠올라 쿡쿡 웃었습니다. 귀신이 화장실에까지 따라와서 지켜보고 있다니! 귀신이 아니었다면 내 너를 ‘성폭법위반’으로(안 되면 ‘경범죄처벌법위반’으로라도) 의율했을 것이다!
정상 부근 나무 그늘 아래서 먹는 점심. 홍어무침과 김밥. 콩과 팥이 들어간 시원한 죽(요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죽’이라고 일단 불러봤는데, 정말 맛있습니다!), 딸기, 오렌지, 포도 등 각종 과일, 양주와 봄봄 막걸리, 매실차. 요즘은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으로서 표준어를 사용하고 비속어나 근거 없는 줄임말 등은 쓰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이 느낌은 그냥 맛있다는 말로는 표현이 잘 안 됩니다. 인터넷 댓글 스타일로 이 느낌을 표현하자면
“꺗! 후루룩 냠냠냠 쩝쩝~! 완죤 맛있엉!! (>o<)”.
가정의 손맛이 느껴지는 정성스러운 음식들. 튼튼해지고 건강해지는 느낌입니다. 이 음식을 다 이고 지고 올라오신 두 분 총무님, 사랑합니다!
4. 금병산 내려가는 길
이제는 하산길입니다. 올라가는 길보다는 한결 수월합니다. 그래도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조기열 판사님의 스틱에 의지하여 척척 내려오다 보니(판사님, 감사합니다!), 마치 이제 저도 산악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멋진 바위를 보고 있는데 포토그래퍼 최 국장님께서 사진을 찍어 주신다고 합니다. 금병산 한 자락 큰 바위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제 모습! 진정한 산악인의 모습입니다, 흐흐흐. 갑자기 키 큰 나무들이 가득한 숲이 나옵니다. 그땐 뒤처져 가느라 몰랐는데 이곳이 바로 우리 안내문에 나오는 ‘잣나무숲’이었나 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처럼 순간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5. 김유정기념전시관
따스한 햇살 속에서 시골 정취를 한껏 느끼며 걷다 보니, 어느새 김유정기념전시관에 도착했습니다. 김유정 선생의 생애에 관한 해설사 선생의 설명을 듣노라니,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연민이 듭니다. 지금은 천재 문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마을과 길과 기차역이 있는 주인공이지만, 어린 시절 여읜 어머니를 평생 그리워하고, 형님이 재산을 탕진해버려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짝사랑만 두 번 했으나 한 여인(박녹주 명창)은 스토커 취급을 하고 다른 여인은 친구 문인에게 시집 가버리고. 그래도 작품을 쓰는 그 순간에는 행복했겠지요. 불행했으나 노래하는 순간에는 행복했을, 영원히 사랑받는 가수 김광석처럼요.
그런데 전시관 안에 김유정 선생의 기념품으로 이상한 비디오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198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김유정 원작’이라고 적혀 있는 ‘떡’이라는 비디오 표지에 ‘연소자 관람불가’, ‘로칼 씨네마! 떡도 먹고…님도 보고…. 쿵! 쿵! 깊은 밤! 방아 찧는 소리! 온몸이 짜릿짜릿해진다! 점례가 빚은 떡은 꿀맛이었다!’라는 광고 문구가 적혀 있는 것 아닙니까! 내용은 모르겠지만 광고 문구로 보아 김유정 원작 소설 ‘떡’의 배경만을 차용해서 관심을 끈 다음 내용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김유정의 유족이 있었다면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6. 사우나와 저녁식사
다음은 사우나와 저녁식사 시간입니다. 등산하고 사우나를 가는 것은 남성들의 문화라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매우 어색했는데, 막상 사우나에 다녀오니 정말 개운합니다. 아! 이래서 남자들은 늘 운동하면 사우나하고 저녁 먹고 오는구나. 매주 운동 가는 남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녁식사는 춘천의 맛집 ‘점봉산 산채?오리 정식’ 식당입니다. 곰취나물! 정말 맛있습니다. 사우나 하고 뜨끈한 바닥에 앉아 따뜻한 음식 먹고 폭탄주까지. 매일매일 긴장하면서 지냈던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배의철 심의관님의 귀한 선물, 감사합니다.
“愁逐前年少, 歡迎今歲多(수축전년소, 환영금세다)”
“지난해의 작은 근심일랑 쫓아버리고, 올해는 많은 기쁨을 반갑게 맞이하세”
7. 마치며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다들 말씀이 없습니다. 노곤함과 기분 좋은 피로감, 그리고 아쉬움 때문이겠지요. 저녁 9시가 넘어 도착한 서울에는 촉촉한 봄비가 내립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편안하게 흔들리는 연둣빛 이파리들. 아직 지지 않은 벚꽃과 사방에 피어난 진달래. 이름 모를 작은 풀들과 노랑 하양 아기꽃들. 그 속에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열네 사람.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소리. 숨을 고르는 조심스런 발걸음... 언젠가 우리가 바쁜 일상에 파묻혀 서로를 잠시 잊은 채 살아가더라도 오늘 산행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함께이겠지요. 이 기억을 갖게 해 주신 대법관님과 회장님, 회원 여러분, 그리고 총무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산행기의 마무리도 한 문장으로 해볼까 합니다.
"아직, 봄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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