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육산(肉山)도 있네(청태산)
2016.01.03 21:12
구암 보시게.
근래 들어 그대를 이따금 볼 때마다 몸이 점점 굼떠간다는 느낌을 받았네만, 안 좋은 병마가 찾아왔다는 말을 직접 들으니 가슴이 저려오네그려.
자네나 백동(白冬), 담허(淡虛) 우리 모두 까까머리로 만나 죽마고우로 지내온 지 어언 45년의 세월이 흐르지 않았는가. 그 중에서 자네가 제일 건강한 삶을 영위할 것으로 다들 생각했는데, 이 무슨 청천병력인가. 더구나 필부한테는 주치의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침과 뜸을 시술해 주던 그대 아닌가.
조속한 쾌유를 비네.
구암대사,
대사도 알다시피 우리나라에는 국토면적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산이 많지 않나. 정말이지 매번 산행을 할 때마다 정상에 서면 보이는 건 모두 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리고 그 산들의 대부분이 화강암과 그것이 풍화된 흙으로 이루어져 있어, 동네 뒷산이라면 모를까 제법 이름이 난 산을 오르노라면 상당 구간 바윗길이나 돌길을 걷게 마련이지.
그러다보니 비록 등산화를 신었다고는 하지만 발바닥, 발목, 나아가 무릎에 이르기까지 부담이 많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고, 필부는 그것을 감내한 채 아픈 무릎을 달래가며 오늘도 산을 찾는다네.
더 늙으면 가고 싶어도 못 갈 테니 갈 수 있을 때 가능한 한 많이 가자는 심사로 산행에 나서네만,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네.
언젠가 월출산과 오대산에 함께 갔을 때 펄펄 날던 대사의 모습이 아련하네.
이보시게 구암,
이처럼 으레 바윗길이나 돌길을 떠올리며 나서는 산행길이건만, 법원산악회의 지난 을미년 송년 산행(2015. 12. 12.)에서는 천만 뜻밖의 경험을 하였다네.
지금은 ‘웰리힐리파크’라는 요상한 이름으로 바뀌었네만, 우리에게는 ‘성우리조트’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의 스키장 있지 않나. 그 스키장의 뒷산이 해발 1,194m의 청태산인데, 이 산이 그야말로 육산(肉山)이었네.
청태산 자연휴양림에서 출발하여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웰리힐리 스키장으로 내려오는 등산로를 걷는 동안에 바위 위를 걸을 일도, 돌길을 지날 일도 없었네. 나뭇잎으로 뒤덮인 흙길을 시종일관 걷노라니 마치 동네 뒷산 산책하는 기분이었네. 해발 1,194m의 높은 산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네.
자연휴양림에서 처음 출발할 때는 등산로가 북사면의 음지에 위치하여 눈이 쌓여 있어 아이젠을 착용하여야 했지만, 양지바른 능선에 올라선 후에는 눈이 없어 아이젠을 벗는 게 상식인데(아이젠을 착용한 채 바위 위나 돌길을 걸으려면 매우 힘들거든),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없었네.
눈 대신 나뭇잎이 두껍게 쌓인 푹신한 청태산의 흙길에서는 아이젠이 눈길에서처럼 오히려 미끄럼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였네. 양탄자 위를 사뿐사뿐 걷는 기분이랄까, 참으로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네.
청태산이 바위를 찾아보기 어려운 흙길의 육산인지라 산의 전경 또한 아늑하였네. 강원도의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은 대개 봉우리가 뾰족하기 마련인데, 이 산은 주봉이나 그 옆의 봉우리나 모두 어머니 젖가슴처럼 둥그런 모습이어서 푸근하기 그지없네. 그러다보니 어느 봉우리가 정상인지 헷갈릴 정도였지.
이 날은 전문산악인 뺨치게 산을 좋아하고 많이 다니시는 대법원장님이 동행하셨는데, 당신 께서도 워낙 편안한 산행길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셨네.
그에 비하여 당신께서 펼쳐놓으신 지도와 나침반으로 확인한 남쪽의 백덕산과 남서쪽의 치악산은 강원도 산의 진면목을 보여 주듯 멀리서도 정상의 뾰족한 산세를 한 눈에 감지할 수 있었네.
산이 이러하다 보니 산행 중 내리막길에서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도 한결 덜하여 5시간이 넘는 산행을 하면서도 그리 힘든 줄 몰랐다네. 이에는 12월 12일이라는 계절에 비하여 따뜻한 날씨도 물론 한몫했네만.
구암,
청태산 산행의 어렵지 않음을 이렇게 구구절절이 말하는 뜻을 그대도 능히 짐작할 것으로 믿네. 어서 병마에서 벗어나 백동, 담허와 함께 예전처럼 ‘이바구’를 즐기면서 ‘이 산 저 산’ 다녀보세.
다가오는 2016년은 병신년(丙申年)이네. ‘병 없이 신 나게 사는 해(년)’라는 말일세. 대사의 건강을 기원하네.
을미년 세모에
우민(又民)이 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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