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넒고 갈 곳은 많다


    천산(天山)산맥은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비단길(=실크로드)과 관련하여 많이 들어왔던 터라 진즉부터 익숙한 지명이었지만, 이 산맥이 펼쳐져 있는, 국명(國名)이 ‘스탄’으로 끝나는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옛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거기에 속해 있던 공화국들이 1991년 독립하면서부터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 중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4개국과 중국에 걸쳐 있는 전장 2,500km의 산맥이 천산산맥이다. 3년 전 중국 서안(西安)에서 우루무치까지 실크로드를 탐방하면서 그 천산산맥을 먼발치로 본 적은 있지만, 그 후로도 그 산을 오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번 여름에 우연히 그 천산산맥의 키르기스스탄 지역에 ‘알틴 아라샨(Altyn-Arashan)’이라는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명산대천을 찾아 발품을 파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운수납자(雲水衲子)의 호기심과 방랑끼가 발동하여 2019. 8. 2. 알마티(Almaty)행 아시아나 비행기에 올랐다.
    키르기스스탄(Kyrgyzstan)은 우리나라에서 가는 직항편이 없는 까닭에, 일단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간 후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서 가야 한다. 이번에도 도반은 어느덧 해외 트레킹의 단짝이 된 오강원님이었다. 전체 인원은 산객 16명(남녀가 딱 반반이다)에 인솔자인 혜초여행사의 김병구 이사님을 합해 총 1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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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일정 개념도 : 알마티→케켄→카라콜→알틴 아라샨→카라콜→촐폰아타→발릭치→비슈케크→알마티]

 

2019. 8. 2.

 

    인천공항에서 오후 6시 20분에 출발한다던 비행기가 거의 1시간은 지나서야 겨우 이륙했다. 제 나라에서 떠나는 국적기가 이렇듯 툭하면 지연출발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인천공항에서 4,176km 떨어진 알마티까지의 비행시간은 5시간 50분이다. 한국보다 시차가 3시간 느린 현지시각으로 밤 10시에 알마티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 익숙한 촌부에게 상대적으로 비좁고 시설이 낡은 알마티 공항은 마치 무궁화호가 다니는 시골역 같은 분위기인데, 삼성의 QLED TV와 LG의 OLED TV가 천장에 나란히 매달려 서로 화질을 뽐내고 있는 게 눈길을 끈다(그래도 공항의 바깥 모습은 그럴싸하다). 반면에 열대야에 시달리던 촌부에게 알마티의 밤 기후는 쾌적함 그 자체였다. 그러기에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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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 공항의 바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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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내부의 삼성과 LG TV]

 

   공항에서 대기 중이던 버스(이후 여정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동 시에는 이 버스를 타고 다녔다)를 타고 밤 11시 20분에 도착한 로얄 튤립(Royal Tulip) 호텔(5성급)은 동방에서 온 촌부의 입을 벌어지게 하였다. 고풍스런 내외관이 우선 시선을 끌었고, 호텔의 복도는 대리석 기둥에 마치 미술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림으로 가득했다. 객실도 널찍하고 쾌적했다. 땅덩어리가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넓다더니 그에 비례하여 호텔 방도 넓게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긴 여행의 첫날 밤을 편하게 보낼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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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튤립 호텔의 전경과 복도]

 

2019. 8. 3.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가는 날이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났다. 한국시간으로는 아침 8시 30분이다. 모닝콜이 6시에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보다 일찍 일어난 것이다.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까닭이다, 해외여행 시에 으레 진행되는 패턴인 기상, 식사, 출발이 1시간 간격으로 진행되었다. 5성급 호텔답게 뷔페식 아침식사가 풍성했다. 사실 촌부 같은 소식가에게는 그 풍성함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아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8시에 대기 중이던 버스를 타고 키르기스스탄의 카라콜(Karakol)을 향해 출발했다. 고원지대라 그런지 한여름임에도 알마티 시내의 아침 공기가 시원하고 상큼하다. 차창에 비치는 알마티의 모습은 옛 소련 시대의 정리된 계획도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대로의 중앙분리대에 화분을 줄지어 비치해 놓은 것이 이색적이다. 철제의 밋밋한 분리대보다 훨씬 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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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 거리의 중앙분리대]

 

   시내를 벗어나 진행 방향 오른쪽에 천산산맥을 두고 키르기스스탄을 향해 때로는 험한 산을 넘고 때로는 넓은 평원을 지나 동쪽으로 가는 도중에, 3시간 20분 걸려 카자흐스탄의 케겐(Kegen) 지역에 있는 차른 계곡(Charyn Canyon)에 도착했다. ‘중앙아시아의 그랜드캐년’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 계곡은 총연장이 154km인데, 그중에서 높이 150-300m, 길이 3km의 붉은 협곡이 특히 유명하다. 기온이 38.7도나 되는(그러나 건조해서 찌는 더위는 아니다) 이 협곡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늘어선 기암괴석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것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절벽 위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 젊은 쌍들도 보인다. 이곳에서 만난 한 폴란드 젊은이가 함께 사진을 찍으며 “우리는 지구촌 한 가족으로 친구”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렇다, 해외 여행지에서는 국적을 묻지 않고 누구나 친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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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른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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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솔자 김병구 이사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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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친구와 함께]

 

    한 시간 정도 걸어 3km의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니 물살이 센 개울이 흐르고 있다. 그곳에서 탁족(濯足)을 하며 더위를 식혔다. 천산산맥의 만년설과 빙하가 녹은 물이라 매우 차서 금방 등골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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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른 계곡의 개울과 탁족]
 
   이미 낮 12시 30분이 넘은 시각이라, 이곳에 조성된 공원(Eco Park)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메뉴는 오므라이스와 소고기로 먹을만했다. 이곳에 오는 도중에 현지 가이드 누슬란(그는 전에 서울의 막걸리 제조회사에서 3년간 일하며 한국말도 익히고 돈도 많이 벌어 비슈케크에 아파트를 샀다고 자랑한다. 유머가 풍부한 데다 마술도 익혀 일정 내내 인기를 끌었다)이 노점에서 산 수박을 후식으로 먹었는데, 건조한 지역에서 햇빛을 충분히 받고 자란 것을 농익은 상태에서 딴 것이라 당도가 높아 맛이 기막히게 좋았다.
   수박뿐만 아니라 참외(멜론)도 마찬가지로 맛이 좋았다. 그런데 그 수박이 어찌나 큰지 여행객 전원(16명)이 다 먹지 못하고 남길 정도였다. 참외도 큰 호박만 하다. 이런 수박과 참외는 값도 저렴하여 이후 여행 내내 맛을 볼 수 있었다.

   식사 후 차른 계곡의 입구로 되돌아갈 때는 이곳을 운행하는 택시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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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른 계곡의 택시]

 

    차른 계곡을 벗어나 다시 평원과 산악지대를 교차하며 남쪽으로 2시간여 달려 오후 3시 40분에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에 도착했다. 해발고도가 1,940m인 국경선에는 양쪽 모두 군인들이 검문을 한다. 옛 소련 시절에는 없던 절차가 아닐까.      국경 통과에는 대략 30분이 걸렸다. 국경선의 이쪽저쪽은 다 넓은 초원지대이다. 그 초원지대에 철조망을 치고 국경선임을 표시하고 있다. 태초에 지구가 생겼을 때는 분명 그런 것이 없었으리라. 결국 후세의 인간들이 부린 탐욕의 산물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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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국경 검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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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선 철조망]

 

    국경 검문소에서 남서쪽의 카라콜까지는 1시간 30분 걸린다. 카자흐스탄 쪽의 산악지대는 풀이나 나무가 없는 황무지에 가까운 데 비하여 달리 키르기스스탄 쪽은 풀이 자라는 초원지대가 많다. 그 초원지대에서 트레일러에 꿀통을 싣고 이동하며 벌을 키우는 양봉업자들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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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지대의 양봉업자]

 

     오후 6시 40분, 카라콜(Karakol)에 도착했다. 카라콜은 목하 공사 중이다, 정비를 위해서인지 도로들을 온통 파헤쳐 놓았다. 해발 1,740m에 위치한 카라콜은 인구 7만 명의 소도시로, 천산산맥 트레킹(겨울에는 스키)을 위한 전초기지이다. 설악산 등산을 위한 전초기지인 속초에 해당하는 곳이다. 구글 지도에는 아직도 프세발스크(독립 전의 옛 소련 시절 지명. 프세발스크는 이곳을 탐험한 러시아 대령의 이름이다)로 표기되어 있다. 한적한 산골도시인지라 고층빌딩은 없고, 옛 소련 시절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넓은 도로들이 바둑판처럼 배열되어 있다.

 

   공사로 먼지가 풀풀 나는 길을 빙빙 돌아 겨우 호텔(Karagat Hotel)에 도착했다. 3성급이지만 이곳에서는 그나마 좋은 호텔에 속한다. 방도 널찍하고 쾌적하다. 에어컨이 없어 다소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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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콜의 Karagat 호텔]

 

   호텔 구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는데, 소, 양, 말, 닭 등의 꼬치구이가 나왔다. 여기에 코냑과 포도주를 곁들이니 훌륭한 식사가 되었다. 비주류인 촌부로서는 맛을 모르지만, 주당들은 코냑과 포도주의 맛이 좋다고 칭찬한다.
   세계에서 최초로 포도주를 만들어 마신 곳이 조지아라서 우리나라에도 조지아 포도주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조지아 출신인 스탈린은 조지아 포도주 대신 키르기스스탄 포도주를 즐겼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 포도주의 품질이 좋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값이 저렴하여 금상첨화이다.

 

    저녁식사 후 호텔 밖으로 나가 거리를 둘러볼까 했는데, 도로공사로 먼지가 많이 나 포기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짐을 정리하고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장거리를 버스로 타고 오랜 시간 이동한 피로가 몰려온 것이다.

   

2019. 8. 4.  

 

   알틴 아라샨(Altyn-Arashan) 트레킹의 첫날이다. 이날은 대략 6시간 걸려 12km를 걷는다. 예정된 모닝콜 시간보다 30분 이른 아침 6시에 일어났다. 간밤에 잘 잔 덕분인지 몸이 가볍다. 창가에 서니 산골도시의 조용한 풍광이 눈에 들어오고 멀리 설산도 보인다. 아침식사가 7시 30분에 시작되는지라 그 전에 거리 구경에 나섰다. 이른 시각이라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 않아 전날처럼 먼지가 날리지 않았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관공서로 보이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뒤로 잘 정돈된 공원이 보였다. 때가 일러서 그런지 거리나 공원에 사람들은 없었다. 언뜻 본 느낌으로는 한적한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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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콜의 아침 풍경]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 짐을 세 가지로 나누어 꾸렸다. ⓵앞으로 2박 3일 동안 계속 가지고 다닐 것, ⓶2,600m에 있는 산장까지 가지고 갈 것, ⓷여행가방(캐리어)에 넣어 호텔에 두고 갈 것의 세 가지이다. 앞의 두 가지를 챙겨 8시 30분에 호텔을 나섰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달려 알틴 아라샨 트레킹 시작점인 악수(Ak-Suu)에 도착했다. 해발 1,840m 정도 되는 곳이다. 간단한 맨손체조로 몸을 풀고 9시 5분 트레킹의 첫발을 내디뎠다. 


   등산로는 계곡을 따라 나 있다. 그 계곡에는 설산의 빙하가 녹은 물이 소리 내서 흐른다. 높은 산과 우거진 숲이 조화를 이룬 계곡이 알틴 아라샨(Altyn-Arashan)이다. ‘알틴 아라샨’이라는 말 자체가 바로 ‘최고의 계곡’(직역하면 황금계곡<Golden Valley>인데, 여기서 황금은 ‘최고’라는 의미이다)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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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틴 아라샨 트레킹의 초입]

 

   계곡 안으로 들어갈수록 가문비나무의 숲이 짙어진다. 이 가문비나무들은 유난히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한데, 여느 가문비나무들과 달리 천산산맥에서 자라는 독특한 수종이라고 한다.

 

천산산맥19.jpg [가문비나무 숲]

 

   계곡 안에서는 전화, 인터넷 등 외부통신이 두절된다. 문자 메시지도 불가능하다. 히말라야를 품고 있는 네팔은 해발 4,000m가 넘는 고지대에서도 카톡이 되는데 이곳은 그렇지 못하다. 뉴질랜드의 밀포드처럼 일부러 외부세계와 단절시킨 것은 아니고, 아직 개발이 덜 된 탓이다. 그만큼 청정지역이라는 의미도 되지만, SNS가 생활의 필수요소가 된 현대인들에게는 아무래도 불편한 상황이다.

 

    등산로에는 우리 일행처럼 걷는 사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을 탄 사람들, 자동차를 탄 사람들도 있다. 말은 그렇다 쳐도 사실 자동차(SUV에 가까운 차종인데, 택시 표시를 단 것도 있다)가 다니기에는 길이 워낙 울퉁불퉁한데도(물론 비포장이다) 굳이 돈을 내고 타고 가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관광차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런 말이나 택시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택시는 해발 2,600m 지점의 산장까지만 다니고, 말은 3,600m 지점의 텐트촌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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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송수단인 말과 자동차]

 

   12시에 점심식사 장소(해발 2,240m)에 도착했다. 혜초여행사에서 미리 마련해 놓은 간이시설이 있는 곳이다. 옛 소련 시절에 만든 군용트럭(외양이 매우 단단해 보인다)을 이용하여 먹거리를 운반해 왔다. 밥, 빵, 컵라면(진라면), 샌드위치, 소시지, 계란, 과일(사과, 참외, 토마토), 오이 등 풍성하다. 지난봄 파타고니아 트레킹 때 점심식사가 너무 부실하여 애를 먹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먹거리는 풍성해서 좋은데 간이화장실 시설은 조악하기 짝이 없다. 하긴 이는 고산 트레킹에서 늘 부딪히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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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 장소] 

 

   점심식사로 배를 불린 후 다시 길을 떠났다(12시 45분 출발). 이곳에서 계곡과 잠시 헤어져 산록을 오른다. 이는 그만큼 등산로의 경사가 급해 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숲을 지나고 야생화가 만발한 초원지대를 지나면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마른하늘에 갑자기 천둥소리가 요란하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빗줄기가 이슬비에 가까워 그냥 걸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비옷을 꺼내려 하니까 비가 그친다. 이러기를 몇 번 되풀이했다. 결국 산장에 도착할 때까지 비옷은 내내 배낭 속에 머물렀다.

   도중에 비가 그치고 구름 속에 숨었던 해가 얼굴을 내밀 때면 하얀 설산이 눈부시게 빛나는 텐트 피크(Tent Peak. 봉우리가 마치 텐트처럼 삼각형으로 보인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현지어로 ‘유르타 피크’라고도 한다. 유르타는 이곳 유목민들의 천막이다)가 자태를 뽐낸다. 해와 더불어 구름 속을 들락날락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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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샹화 만발한 초원지대와 텐트 피크]

 

   오후 3시 20분 오락가락하는 이슬비를 맞으며 해발 2,600m의 산장지대에 도착했다. 이곳은 오로지 산객들을 위해 만든 시설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다. 유르타로 된 산장들이 제일 많고, 목조건물이나 시멘트 건물로 된 산장들도 군데군데 있다. 시설이야 비교가 안 되지만, 분위기만큼은 마치 요세미티 빌리지 같다.
   점심 먹고 헤어졌던 계곡을 이곳에서 다시 만난다. 산장 바로 옆으로 계곡이 흐른다. 이곳의 계곡물도 알프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짙은 회색빛이다. 설산의 눈 녹은 물이 석회석지대를 통과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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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지대와 그 옆으로 흐르는 회색빛 계곡물]

 

   우리 일행이 묵은 산장(Guesthouse Altyn Arashan)은 목조건물이다. 규모가 제법 크고 지금도 건물을 더 짓고 있다. 2인 1실의 방에는 침상과 이불이 비치되어 있다. 방에 따라서 화장실이 있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방에 전등이 있는데, 전력 사정이 나쁜 탓에 그야말로 희미한 불빛이다. 그래도 이 산장에는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유황온천장이 있다. 다만 규모가 작아 한 번에 두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다. 온천물이 뜨겁지는 않지만 그래도 잠시 몸을 담갔다 나오자 한결 피로가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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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틴 아라샨 산장과 내부 객실]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30여 분 눈을 붙였다가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맑게 갰으나, 기온이 다소 쌀쌀하다. 텐트 피크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산장 주위를 가볍게 산책하는데, 젊은 남녀 몇 명이 지나가다가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세요?”
하고 묻는다. 깜짝 놀라서 그렇다고 하자, 한국에 갔다 온 적이 있다는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이라고 소개를 한다. 천산산맥의 이런 깊은 산속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닌 사람들을 만나다니...  바야흐로 국제화시대이다. 우리 일행의 현지 가이드 누슬란도 서울에서 3년간 일하고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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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을 할 줄 아는 키르기스스탄 사람들]

 

   오후 6시에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는 양고기 코스 요리이다. 양을 한 마리 잡아서 굽고, 삶고, 찌고, 볶고, 국 끓이고... 온갖 형태의 요리를 해서 먹는 것이다.
   산이 전 국토의 90%를 차지하여 본래 유목민 국가였던 키르기스스탄은 소, 말, 양을 많이 키우는데, 소와 양은 주로 식용으로 키운다. 그래서 양 한 마리 잡는 것을 마치 우리가 닭 한 마리 잡는 것처럼 쉽게 생각한다. 그 양을 잡아 코스 요리로 먹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보통 1시간 30분이다. 우리처럼 ‘빨리빨리’ 서두르지를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식사에 흥미로운 전통이 하나 있다. 잡은 양의 머리(고사 지낼 때 상에 오르는 돼지머리를 생각하면 된다)와 네 발을 큰 접시에 받쳐서 그 자리의 최고 연장자에게 제일 먼저 올리고, 그가 한 점 먹은 후에야 비로소 식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곳의 오랜 식사예법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장유유서(長幼有序)인 셈이다. 비록 유교문화권은 아니지만, 동양적인 전통이 남아 있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게 해서 양의 머리가 식탁으로 보내져 왔는데, 맙소사, 그것을 촌부가 시식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제껏 해외 트레킹을 다니는 동안 늘 촌부보다 연장자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촌부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이젠 나도 늙었구나’ 하는 感傷에 젖어야 했다. 이젠 그만 다니라는 것인가.  하긴 머리에 백설이 내리기 시작한 게 언제인데...

오호통재(嗚呼痛哉)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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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머리와 발]

 

  괜한 설움을 시 한 수로 달래 본다.

 

    반 넘어 늙었으니 다시 젊든 못하여도  

    이후나 늙지 말고 매양 이만 하였고저

    백발아 너나 짐작하여 더디 늙게 하여라.

 

   조선 중기의 문신 이명한(李明漢. 1595-1645)이 지은 시조이다. 여지껏 나이 먹어 늙은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나 그러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은 400년 전의 시인이나 지금의 촌부나 다를 바 없다. 이를 생각하면 모름지기 하루하루의 삶을 보람있게 보낼 일이다.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부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제법 굵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거위털 패딩을 입고(산장에는 난방시설이 없어 밤에 춥다. 그래서 등에 핫팩도 붙였다)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동방 나그네가 잠을 청하기에는 참으로 이른 시각이었지만, 할 일이 없었다. 밖에는 비가 오고, 휴대폰은 먹통이고, 전깃불은 흐려서 글을 읽고 쓸 수도 없고....  

 

2019. 8. 5.

 

   예정된 기상시각 6시보다 일찍 5시 40분에 일어났다.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드는 바람에 중간에 화장실을 가느라 깬 적도 있고 다소 춥기도 했지만, 비교적 푹 잔 까닭에 아침 컨디션은 괜찮았다. 방 안에서 간단히 몸을 풀었다. 아침식사로 나온 김치찌개와 된장국의 맛이 좋았다. 

 

   비옷, 우산, 전날 착용 후 벗어 놓은 속옷과 양말 등 불필요한 짐은 따로 싸서 차편에 호텔로 내려보내고, 아침 7시 40분 산장을 나섰다. 이날도 6시간에 걸쳐 12km를 걸어야 한다. 목표지점은 해발 3,600m 지점에 있는 아라콜 캠프이다. 그곳까지 계곡의 냇물이 계속 동행한다.

 

   산장을 나서면 처음 한동안은 평평한 초원지대를 지난다. 그러다가 고도가 높아지면서 숲속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전날과 달리 가문비나무의 높이가 점점 작아진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가문비나무를 보지 못하게 된다. 초원지대는 걷기가 수월해 힘이 들지 않긴 하지만, 아무래도 트레킹의 맛이 덜하다. 그러다 우거진 숲이 나오고 오르막 내리막의 경사가 제법 있는 길을 접하게 되면 숨이 찬 대신 트레킹 본래의 맛이 난다. 그러기에 늘 일장일단이 있는 게 세상사 아니던가. 아무튼 표고차 1,000m의 등산로를 6시간 만에 걸으려니 경사가 급한 언덕을 여러 번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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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콜 캠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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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콜 캠프 가는 길. 가이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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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콜 캠프 가는 길. 오강원님과 함께]

 

   해발 3,000m를 넘어가면서 고산증 증세가 조금씩 나타났다. 일행 중에 다소 힘들어하는 분들도 눈에 띈다. 고산 트레킹을 처음 오신 분들이 더욱 그렇다. 촌부가 처음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의 푼힐(해발 3,200m) 트레킹을 할 때 3,000m를 돌파하면서 힘이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정도는 별 무리 없이 오른다.
 
   산행 중에 구름이 많이 끼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덕분에 덜 더워서 걷기에 오히려 좋았다. 정확한 고도를 알 수 없으나 해발고도가 높아지면서 어느 순간 더 이상 나무는 보이지 않고 바위산과 초원지대만 펼쳐진다. 그 위에 야생화가 만발하고, 방목하는 소와 말이 풀을 뜯고 있다. 그들에게 동방에서 온 산객들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여기서는 ‘소 닭 보듯’ 하는 게 아니라 ‘소 사람 보듯’ 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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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낀 하늘, 소, 말, 그리고 촌부]

 

    오후 2시 20분 해발 3,600m의 아라콜(Ala-Kol) 캠프에 도착했다. 당초 예정했던 6시간보다 40분 정도 더 소요되었다. 이곳은 좌우와 뒤편으로 산이 둥글게 감싸고 있어 밀포드의 니콜라스 써크(Nicolas Cirque)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산봉우리에서 눈 녹은 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그 물이 내를 이루어 계곡 아래로 흐른다. 


    올라온 쪽을 되돌아보면 높은 준령들이 줄지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저곳을 지나왔단 말인가. 스스로 대견하다. 다음날 넘어야 하는 아라콜 패스의 능선까지 난 길은 거의 수직에 가까워 기가 질린다. 더구나 그쪽으로는 풀 한 포기 안 보인다. 내일은 꽤 힘들겠구나. 지레짐작을 한다. 고도가 높은 탓일까, 바람이 많이 불고 제법 쌀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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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콜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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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콜 캠프에서 바라본 올라온 곳]

 

    캠프에는 혜초여행사에서 유르타 4동과 1인용 텐트 6개를 설치해 놓았다. 안에는 사람 수에 맞추어 침낭도 비치해 놓았다. 유르타는 6인까지 들어갈 수 있으나 최대 4인씩 사용했고, 원하는 사람은 텐트를 사용했다. 유르타 한 동은 식당으로 사용했다.

 

    이곳은 아라콜 패스를 넘기 위해 하룻밤을 보내는 곳이긴 하지만, 본래 아무런 시설이 없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래서 서양의 젊은이들은 대개 각자 텐트를 가지고 온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여행사에서 미리 숙소를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여름 한 철 운영한다) 그 안에서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 이곳까지 텐트를 지고 올 일은 아니다. 
  캠프에는 또 1인용 간이화장실을 설치해 놓았는데, 출입문을 전체의 반 높이로 만들었다. 통풍이 잘되어 냄새를 줄이기 위한 것이다. 간단하지만 유용한 아이디어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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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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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중간중간 견과류나 초콜렛 등의 간식을 먹긴 했지만, 캠프에 도착하니 배가 몹시 고팠다. 여행사에서 유르타에 차려 놓은 제육볶음과 미역국의 맛이 꿀맛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급히 먹으면서 과식을 했고, 이게 이후 세끼를 굶어야 하는 고생의 단초가 되었다.

 

   본래 해발 3,600m 지점이면 당연히 고산증 증세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촌부는 비록 그동안 여러 번의 고산 트레킹 경험이 축적되어 이제는 그 정도 고도에서 고산증을 심하게 느끼지는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산은 고산이다. 산소 부족으로 당연히 오장육부의 기능이 저하된 상태이기 때문에 과식을 하면 안 된다. 그걸 깜빡 잊고 과식을 하는 바람에 그대로 체하고 말았다.

 

   경치를 감상하며 캠프 주변을 거닐다가 유르타에 들어왔을 때 미열이 나고 머리가 아팠다. 속도 울렁거렸다. 처음에는 고산증인 줄 알았다. 그래서 아스피린과 타이레놀을 먹었는데 효과가 없어 다이아막스와 비아그라까지 먹었다. 그런데도 증세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그제서야 체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도리 없이 저녁식사를 걸렀다. 같은 유르타를 쓰는 일행 중 한 분이 한방침으로 손과 발을 따 주셨다. 비록 큰 효험은 없었지만 감사할 따름이다.   

 

   유르타 안에 가스난로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가뜩이나 산소가 부족한 마당이라 켜지 않았다. 그 바람에 밤중에는 제법 추웠다. 겨울 내복에 거위털 패딩까지 입었지만 컨디션이 안 좋으니 더욱 추위가 느껴졌다. 비치된 침낭에 들어가 잠을 청했지만 편하지가 않다. 애초에는 1인용 텐트에서 자 볼 생각도 없지 않았는데, 언감생심이다.

 

   이래저래 깊은 잠이 들지 않고 자주 깨서 유르타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에 별이 쏟아진다. 별자리를 찾아보려다 포기했다. 별이 하도 많아 구별이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많은 별들 사이로 은하수가 펼쳐졌다. 전에 언제 보았는지 기억도 안 나는 바로 그 은하수다. 뱃속은 불편하고 머리는 아플지언정 눈만큼은 호강에 겹다. 그 멋진 광경에 반해 고개가 아프도록 하늘을 쳐다보다 문득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에 몸서리를 치며 유르타 안의 침낭을 다시 파고들었다. 이날 따라 왜 날이 그리도 더디 밝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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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과 은하수]

 

2019. 8. 6.

 

   잠을 계속 설치다 얼핏 잠이 들었나 싶은데, 유르타 바깥이 소란스러워 눈이 떠졌다. 아침 기온이 쌀쌀한데 일찍 일어나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간밤보다는 좋아졌지만 여전히 두통이 남아 있고, 속도 울렁거린다. 아침식사도 걸러야 했다. 인솔자인 김병구 이사님이 걱정스런 얼굴로 누룽지 끓인 물을 가져다 주셔서 한 모금 마셨다.

 

   아침 7시 55분, 아라콜 패스를 향해 출발했다. 이날은 이 고개를 넘어 그 아래 해발 1,800m 지점까지 총 13km를 8시간 예정으로 걸어야 한다. 이 일정은 출발부터 힘들다. 풀도 안 자라는 급경사의 미끄러운 언덕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캠프에서 보면 능선이 바로 코앞이건만, 그곳까지 걸리는 시간이 1시간 30분 내외이다. 

 

   전날 저녁과 이날 아침을 내리 굶은 촌부가 걱정이 되었는지, 김병구 이사님의 지시를 받은 현지 산악가이드가 내 배낭을 달라고 한다. 자기가 메고 가겠다는 것이다. 가벼운 옷가지 몇 개와 무릎보호대 정도가 들어 있는 까닭에 그리 무겁지 않아 촌부가 그냥 메고 가도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공연히 걱정을 끼칠 듯하여 군말 않고 넘겨주었다. 그리고 일정 거리를 가면 교대해서 메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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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콜 패스의 능선에 오르는 길]

 

   오전 9시 20분, 마침내 아라콜 패스의 능선(해발 4,000m)에 힘겹게 오르니 이제까지와는 다른 별세계가 펼쳐졌다. 해발 3,600m에 있는 아라콜 호수가 눈부시게 화창한 날씨에 에메랄드빛 색깔을 뽐내고 있다.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데, 호수가 워낙 커서 파노라마로 찍지 않으면 한 화면에 다 들어가지 않는다.

 

   그 호수를 빙 둘러 호위하듯 만년설로 덮인 설산의 봉우리들이 이어진다. 봉우리 위로는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설산의 아래로 빙하가 만들어지고, 그 빙하가 녹은 물이 다시 호수로 흘러든다. 한 폭의 그림 그 자체이다. 그 가운데 한 봉우리는 그 밑의 빙하까지 포함하여 꼭 알프스의 몬테로사를 닮았다. 능선에 오르느라 힘들었던 순간들은 산정의 아라콜 호수를 보는 순간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오로지 멋지다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대자연이 연출하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두통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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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콜 호수]

 

   알틴 아라샨 트레킹 코스의 백미답게 이곳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트레커들로 붐빈다. 아라콜 패스를 넘으면서 산정(山頂) 또는 산정의 이쪽저쪽에서 만나 간단하게라도 인사를 나눈 사람들의 국적만 해도 키르기스스탄은 물론이고,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슬로베니아, 이스라엘 등 다양하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온 나이가 지긋한 부부는 능선의 정상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즐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호수를 마냥 감상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왔다는 한 노신사(?)는 먼저 한국말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왔다. 깜짝 놀라 한국말을 할 줄 아느냐고 물으니, “몰라요”라고 대답하면서 박장대소한다. 한국말을 딱 두 가지 할 줄 아는데, 그게 바로 “안녕하세요?”와 “몰라요”라는 것이다. 그의 유머 넘치는 대답에 촌부도 한바탕 웃었다. 해외 트레킹의 묘미 중 하나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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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은 키르기스스탄인. 다른 두 여자는 벨기에에서 온 자매]

 

   아라콜 호수를 충분히 감상한 후 호수를 둘러싼 산의 능선을 따라 아라콜 패스(해발 3,900m)로 가서 올라온 길과는 반대쪽으로 호숫가로 내려갔다. 이 길도 올라온 만큼이나 경사가 급하고 미끄럽다. 이쪽 역시 나무나 풀이 자라지 않는다. 내려가다 보니 호숫가에 텐트를 친 사람들이 보인다. 물론 젊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저들은 식수를 어떻게 조달하지?’
‘설마 호숫물을 먹는 것은 아니겠지?’
꼬리를 무는 상념을 어찌할거나. 가끔 도지는 정말 영양가 없는 고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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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콜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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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콜 패스에서 호숫가로 내려가는 길]

 

   호숫가로 다 내려가 바위들이 널려 있는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비로소 초콜렛을 조금 입에 넣었다. 허기진 배가 더 많은 공급을 요구했지만 참았다. 아직은 안심할 단계가 아니다.

 

   호숫가를 벗어나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인데다 너덜지대이다. 걷기가 매우 힘들다는 이야기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호숫물이 흘러내리며 만든 폭포이다. 수량이 풍부하고 낙차가 커서 멋지다. 폭포 밑으로는 계곡(카라콜 계곡)이 이어진다. 빙하 녹은 물답게 매우 차다. 너덜지대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곳곳에 나무가 자라고 야생화도 즐비하다. 하산길은 줄곧 이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이 계곡과 또 다른 계곡들이 수시로 합쳐지는데, 하류에서는 급기야 수량이 엄청난 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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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콜 폭포와 야생화]

 

   계곡에서 손도 씻고 발도 씻으며 한참 내려가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점심식사가 마련되어 있는 유르타에 다다랐다. 어느새 오후 2시 20분이다. 높은 산의 트레킹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음식 중의 하나인 컵라면이 과일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촌부에게는 여전히 그림의 떡이다. 대신 초콜렛과 약간의 견과류, 그리고 콜라로 허기진 속을 달랬다.

 

   일행 중 전날 밤과 또 다른 한 분이 역시 한방침으로 촌부의 손과 발에 한방침을 놓아 주었다. 손가락 끝에 한방침을 찌르는 순간 검붉은 피가 유르타의 천장까지 치솟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어찌 이 지경이 되도록 그냥 있었냐? 그런 몸으로 아라콜 패스를 넘다니 정말 대단하다, 아니 지독하다’
는 평을 들었다.

    안 넘으면 어쩔 것인가, 촌부 혼자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튼 손발을 다시 따고 그분이 내준 한방 소화제를 먹고 나니까 속이 후련해진다. 감사할 따름이다. 일행 중 최고 연장자가 되어 이 무슨 추태람...

 

    점심식사 후 카라콜까지 타고 갈 트럭이 기다리고 있는 해발 1,800m 지점까지 내려가는 하산길 또한 풍광이 참으로 아름답다. 계곡과 초원이 잘 조화를 이루어 마치 돌로미테의 그런 곳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수량이 풍부한 계곡을 대하면 뉴질랜드 밀포드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초원 곳곳에는 대자연을 즐기러 이곳을 찾은 젊은 사람들이 쳐놓은 텐트들이 보인다. 길에서는 한국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이제는 그만큼 많이 알려졌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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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의 계곡과 초원]

 

   예정보다 30여 분 늦은 오후 4시 20분, 트럭이 기다리는 곳에 도착했다. 옛 소련 시절의 군용트럭을 개조한 차인데, 튼튼하기 이를 데 없다. 다리가 아플 만할 때 차를 타게 되어 좋긴 한데, 길이 워낙 험해 트럭이 춤을 춘다. 차가 멈출까 봐 걱정이 될 정도로 덜컹거렸다. 그 차를 타고 카라콜의 호텔(8월 3일에 처음 묵었던 Karagat Hotel)에 도착하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사흘 만에 더운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까 날아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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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트럭을 개조한 차]

 

   오후 7시 30분에 호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는 티본스테이크. 그러나 한양나그네는 조심스러워 누룽지를 끓여 먹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거기에 콩을 간 수프 한 그릇을 덧붙였다. 객지에 나와 한번 체하면 이렇듯 고생을 한다. 그러기에 조심 또 조심을 할 일이다. 


   객실로 올라가 하루 일정을 간단히 정리 메모한 후 곧바로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반나절을 거의 굶다시피 해서 배가 고프니 피로가 더 몰려오는 것 같다.

 

2019. 8. 7.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이제는 다시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늘 하던 대로 8시에 아침식사, 9시에 출발하는 패턴이 이어졌다. 이날은 콕투스 초원을 걷는 날이다. 총연장 11km로 소요시간은 3시간 40분 정도이다.

 

   호텔에서 40분 정도 차를 타고 트레킹 시작 지점인 카라콜 카프리즈(Karakol Kapriz. 해발 1,860m)로 이동했다. 사흘 전에 알틴 아라샨 트레킹을 시작했던 악수(Ak-Suu) 근처이다. 맨손체조로 간단히 몸을 풀고 10시에 출발했다.
 
   처음에는 가문비나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다. 그러다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콕투스 초원지대를 만나게 된다. 마치 돌로미테의 ‘알페 디 시우스’를 연상케 하는 넓은 초원지대이다. 아라콜 패스가 있는 설산들의 밑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곳 초원지대에 서면 멀리 그 설산들이 보인다. 그렇다고 그 설산들까지 다가가는 것은 아니고, 초원을 걷는 내내 바라볼 뿐이다. 여하튼 설산과 초원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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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콕투스 트레일]

 

     해발 2,500m의 고원지대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평지에 가까운 이 넓은 초원지대에는 야생화가 무수히 피어 있다. 그 꽃들 사이에서 걷고, 앉고, 눕고 하며 가을 문턱으로 접어들려고 하는(이곳은 철이 빠르다) 초원에서 가슴 깊이 자연의 숨길을 들이마신다. 그 풍경을 머리에 넣고 사진에도 담는다.

     꽃이 많다 보니 벌이 달려들기도 한다. 실제로 김병구 이사님은 벌에 두 방이나 쏘였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풀과 꽃만 자라는 초원지대라 쾌청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날 따라 하늘이 유난히 쾌청했다)을 피할 그늘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덥지가 않다. 산들바람이 계속 불어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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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콕투스 트레일의 야생화]

 

    초원지대가 넓기는 하지만, 길은 한 줄기여서 앞사람을 쫓아가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게 또 하나의 매력이다. 경사도가 없으니 무릎에 부담이 갈 일도 없다. 광활한 초원에서 편하게 걷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좋은 안성맞춤의 트레일이다.

    빛나는 태양 아래 광막한 초원을 3시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느긋하게 걷기만 한다는 것,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때로는 필요한 일이 아닐까. 소위 말하는 ‘힐링’이 이에서 무엇을 더하랴. 그래서 권하고 싶다. 아라콜 패스를 넘는 트레킹이 힘들면 이곳 콕투스 트레일 만큼은 꼭 걸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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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면 알틴 아라샨이야말로 세계적인 명품 트레킹 코스에 들어갈 만하다. 콕투스 트레킹을 포함한  3박 4일의 기간 동안에, 히말라야의 설산, 알프스의 초원, 파타고니아의 산정호수, 돌로미테와 밀포드의 계곡과 폭포, 이 모든 것을 보고 즐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멋진 곳인가. 이곳을 중앙아시아의 알프스라고 부르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참으로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다!’

 

    콕투스 트레킹이 끝나는 지점에서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카라콜로 돌아와(오후 2시 25분) ‘자리나 푸드(Zarina foods)’라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메뉴는 키르기스스탄식 냉면(감자로 만든 묵을 썰어 국수에 말아 먹는 것), 만두, 과일... 언제나처럼 풍성한 식탁이다. 전날 워낙 못 먹어서 그런가, 유난히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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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나 푸드 식당]

 

    식사 후 잠깐 근처의 재래시장을 둘러봤다. 지붕이 있는 시장, 즉 바자르(Bazaar)이다. 각종 잡화와 청과물들을 팔고 있다. 그 중 한 과일가게의 주인에게 무심코 “이것 얼마예요?”하고 물었더니 눈만 멀뚱멀뚱 쳐다본다. 맙소사, 그 주인이 하도 한국 사람과 외양이 똑같아 그만 우리말로 물었던 것이다.
   이처럼 키르기스스탄에는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한국 사람과 전혀 구별이 안 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옛 소련 시절 스탈린이 연해주에서 강제로 이주시킨 고려인들의 후손인 것이다. 키르기스스탄에는 80여 개 민족이 살고 있고, 고려인은 2만 명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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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콜의 재래시장]

 

    오후 3시 10분, 재래시장에서 나와 대기 중이던 버스에 올랐다. 이식쿨 호숫가에 있는 휴양지 촐폰아타(Cholpon-Ata)로 가기 위함이다. 이동에 대략 3시간 걸린다. 이식쿨(Issyk-Kul) 호수는 천산산맥 설산의 눈과 빙하가 녹아내린 물이 만든 호수이다. 그래서 염분이 0.6%에 불과하다. 


   호수가 해발 1,600m의 고지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보아서는 크기가 어림이 안 된다. 수평선이 보이는 이 호수는 최대 길이가 178km, 최대 폭이 60km로, 면적이 제주도의 4배나 된다(6,236㎢). 최대 깊이는 668m(평균 깊이 278m)이다. 아시아에서 바이칼호 다음으로 큰 호수이다. 산정(山頂) 호수로는 세계에서 티티카카호 다음으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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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차 안에서 차창을 통해 본 이식클 호수]

 

     이러한 이식쿨 호수는 겨울에 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식쿨’이라는 이름 자체가 ‘따뜻한 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바다가 없는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의 휴양지로 사랑을 받는다. 여름에만 200만 명이 몰려든다. 러시아 사람들도 많이 온다고 한다. 그들은 옛 소련을 떠올리며 ‘전에는 여기도 우리 땅이었어’ 하고 감상에 젖을지도 모른다.

 

    이식쿨의 넓은 호숫가를 따라 촌락이 자연스레 형성되었고, 그 중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 촐폰아타(Cholpon-Ata)이다. 교통체증이 있을 정도로 인파가 몰려든다. 휴양지다 보니 리조트가 많다. 그 중 하나인 라두가(Raduga) 리조트에 짐을 풀었는데(오후 6시 40분), 그 규모와 시설에 그만 입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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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폰아타의 거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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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두가 리조트]

 

    이식쿨 호숫가의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는 라두가 리조트는 그 끝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숙소는 나무가 우거진 숲속에 대부분 별채로 되어 있다.     

    촌부가 묵은 숙소에는 침실이 세 개, 화장실이 두 개, 응접실, 부엌, 정원이 있었다. 오강원님과 촌부, 달랑 두 사람이 묵기에는 시설이 너무 아까웠다. 그것도 하룻밤만 묵는다는 게 실로 애닯은 일이었다. 이런 별채를 아예 개인 별장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고, 한 달씩 머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대가족이 와서 머물러도 될 정도이니 시간적인 여유만 있다면 촌부도 그러고 싶은 욕심이 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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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부가 묵은 별채 숙소]

 

   리조트의 호숫가에는 수영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물이 차지 않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늦은 밤에도 그곳에서 수영을 한다. 안전요원이 있는데도 야간수영을 제지하지 않는다. 각자 자기 책임하에 하라고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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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조트의 호숫가 수영장]

 

    저녁 7시 40분, 리조트 안에 있는 식당(리조트가 넓은 만큼이나 이 식당도 엄청 넓다)에서 만찬을 즐겼다. 이번에도 양을 한 마리 잡고, 거기에 더하여 각종 요리가 푸짐하게 나오는 통에 배가 불룩하게 나오도록 먹었다. 식후에 소화도 시킬 겸 호숫가를 산책하였는데, 야간수영을 즐기는 서양인들을 보니까 촌부도 당장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남산만 해진 배를 하고 물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지라 다음날로 미루고 숙소로 돌아가 꿈나라로 향했다.

 

2019. 8. 8.

 

    아침 6시, 넓고 안락한 리조트에서 푹 자고 나니 아침 공기가 마냥 상쾌하다. 창밖의 새소리도 정겹다. 아침식사가 8시에 예정되어 있어 그 전에 리조트 안을 이리저리 산책했다. 고층의 콘크리트 건물들이 즐비하기 마련인 한국의 리조트와는 너무나도 다른 고즈넉한 휴식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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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조트 안의 거리와 숙소들]

 

    호숫가도 다시 나가 보았다. 이른 아침부터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작은 보트도 호숫가에 놓여 있어 원하는 사람은 끌고 나가 타면 된다. 2010년에 독일의 부스트라우(Wustrau)에 있는 법관연수원(Richterakademie)에 갔을 때 숙소 옆에 있는 루핀 호수(Ruppiner See)에서 아침에 카약을 끌고 나가 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아침식사 시각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그동안 나이를 먹어 호기심이 예전만 못한 탓이 내면의 더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보트를 그냥 지나쳤다. 대신 오리 떼가 노니는 백사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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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조트 내 호숫가의 백사장과 오리 떼]

 

   아침식사를 한 후 9시 30분에 리조트를 출발하여 이식쿨 호수 유람선을 타는 곳으로 갔다. 50분 정도 걸렸다. 가다 보니 작은 비행장이 눈에 들어온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오는 휴양객 내지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곳이란다. 이식쿨 호수는 그만큼 중앙아시아의 휴양지인 것이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나갔다. 넓은 호수를 가로질러 달리는 유람선도 멋이 있었지만, 백미는 유람선을 호수 한가운데 세우고 수영을 하는 것이다. 서울에서부터 가지고 온 수영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물이 차지 않고 잔잔하여 수영하기에 적격이다. 필수적으로 걸쳐야 하는 구명조끼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지난 연말 12월 31일에는 홍해바다에서 수영을 하더니 이번에는 중앙아시아의 고산지대에 있는 호수에서 수영이라... 30년 전 일찍이 힘들여 수영을 배워 놓은 덕에 잊지 못할 경험들을 쌓아간다. 욕심 같아서는 좀 오래 수영을 즐기고 싶었지만,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지라 30분 정도 수영을 한 후 아쉬움 속에서 다시 유람선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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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쿨 호수의 유람선과 수영]
 
   오전 11시 45분, 촐폰아타의 번화가에 있는 식당(상호가 ‘마라쉑’인데, ‘어린 양’이라는 뜻이다. 입구에 그 로고를 그려 놓았다)에 도착하여 ‘라그만’이라는 키르기스스탄식 짬뽕(본래 위구르 음식이라고 한다)과 피자로 점심식사를 했다. 피자는 인근에 있는 피자전문점에서 배달시켜 온 것인데, 평소 피자를 즐겨 먹지 않는 촌자의 입에도 감칠맛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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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쉑 식당]

 

    점심식사를 마치고 12시 40분에 비슈케크(Bishkek)를 향해 출발했다. 진행 방향 왼쪽에는 이식쿨 호수, 오른쪽에는 천산산맥(그 산맥 너머는 카자흐스탄이다)을 두고 그 사이의 호숫가로 난 2차선 길을 따라서 가다 보면 카라콜 가는 길(이때까지는 카라콜에서 이곳까지 타원형 호수의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西進하여 온 것이고, 이곳에서 호수의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東進하면 다시 카라콜에 도착한다)과 비슈케크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인 발릭치(Balykchy)에 다다른다. 이식쿨 호수의 서쪽 끝이다(카라콜은 동쪽 끝에 있다). 이곳은 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상당히 번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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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릭치를 지나면 비슈케크까지 가는 4차선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나무도 거의 자라지 않는 황량하고 험준한 산속을 달리는 이 고속도로는 5년 전에 중국 자본이 들어와 건설했다고 한다. 고속도로 옆으로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로 가는 기찻길이 동행한다. 그 기차를 타면 타슈켄트까지 사흘 걸린다고 한다.
   도중에 고속도로변의 휴게소에 들렀는데(오후 2시 40분), 버스에서 내리니 후끈한 공기가 얼굴을 덮친다. 기온이 무려 38.3도.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날씨이다. 그러나 습도가 낮아 찌는 더위는 역시 아니다. 

 

   오후 4시 30분,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인 비슈케크(Bishkek)에 도착했다. 비슈케크는 옛 소련 시절인 1930년대에 조성된 계획도시이다. 현재 인구는 100만 명 정도 된다(키르기스스탄의 전체 인구는 600만 명). 거리는 격자 모양을 하고 있고, 공원과 나무가 많다. 사람보다 나무와 차가 많은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차들이 대부분 수입된 중고차들이어서 대기오염 문제가 대두하고 있다.  

 

   호텔로 가기 전에 시간이 있어 이곳에서 여행사를 하는 한남식씨의 안내로 시내 관광을 했다. 우리 일행이 비슈케크에 도착하기 직전에 현 정부가 직전 대통령을 그의 재임 시절 부패를 이유로 체포하려고 하자 전직 대통령 측에서 반발하는 바람에 시내에서 대치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하여 시내 관광을 못 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했는데, 다행히 시내 관광에는 지장이 없었다. 

 

   먼저 빅토르 광장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숨이 탁 막혔다. 한낮이 지나 기온이 다소 내려갔을 오후 4시 40분인데도 38도가 넘었다. 과거 소련 치하에서 살던 곳답게 비슈케크에는 광장이 여럿 있고, 이제는 그 광장이 바로 관광상품이 되었다. 

 

   빅토르 광장은 말 그대로 승리의 광장이다.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만든 곳이다. 옛 소련 시대를 말해 주듯 광장에는 커다란 조형물이 있고, 그 바닥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다(모스크바 크레믈린궁의 바닥처럼). 그리고 어머니 동상이 조형물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전쟁에 나간 자식을 기다리며 빈 밥그릇을 들고 멀리 전쟁터 쪽을 바라보고 있다.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동서양의 구별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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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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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물의 어머니상과 꺼지지 않는 불]

 

   빅토르 광장 다음으로 간 곳은 알라토 광장. 관공서들이 모여 있는 중심가이자 비슈케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마나스(Manas) 거리에 있다. 이곳에는 이 나라의 건국자로 알려진 마나스의 동상이 있다(마나스는 13세기에 각지의 부족을 통합하여 키르기스스탄을 건국했다고 한다). 소련 시절에는 레닌 동상이 그 자리에 있었고 레닌광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곳에는 또한 비슈케크 중심가의 핵심광장 답게 대형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외국의 수도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인 광화문광장에서는 언제나 대형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경부고속도로로 서울에 진입하다 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대형 태극기를 정작 서울 한복판에서는 볼 수 없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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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토 광장과 마나스 동상]

 

   키르기스스탄이 1991년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레닌 동상은 근처의 다른 곳(광장의 뒤쪽)으로 옮겨졌다. 가까운 곳이라서 그곳으로 가보았다. 오른손을 앞으로 비스듬히 뻗고 있는 전형적인 레닌 동상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 동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동상이 있으니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함께 조성한 동상이다. 두 사람이 무언가를 열심히 의논하는 듯한 모습이다. 러시아나 동유럽,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동상이다.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와 결별한 나라에서 이들 동상을 여전히 공원에 두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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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레닌 동상. 아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동상]

 

    시내 관광을 끝내고 오후 6시 20분에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고려인이 경영하는 한식당이다. 규모가 꽤 크다. 외국에 나가 한식당을 가보면 대개 소규모이기 마련인데, 이곳은 외부의 간판부터 크고, 내부도 정갈하면서 상당히 넓다. 감자만두, 순대, 잔치국수, 소고기무침, 가지나물 등 여러 가지 입에 맞는 음식이 많이 나왔고, 특별식으로 단고기(보신탕) 수육이 나왔다. 단고기의 요리방식이 북한식이라고 하는데, 서울에서 먹던 것과 큰 차이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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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당]

 

   식사 후 호텔(Jannat Hotel)로 가 여장을 풀었다. 이 호텔은 5성급으로 시설이 좋았다. 호텔 앞마당에서는 잔치(무슨 잔치인지는 모르겠다)를 하고 있었다. 호텔 맞은편에는 ‘글로부스(Globus)’라는 대형 쇼핑몰이 있다. 기념품이나 선물을 구입하기 좋은 곳이다. 호텔에서 잠시 쉬었다 가 보았다. 공업이 없다시피 한 나라여서 진열된 상품이 대부분 수입품인데, 그 가격이 의외로 저렴하다.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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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트(Jannat) 호텔l

 

2019. 8. 9.

 

   이번 여정의 마지막 날이다. 6시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의 패턴이 그대로 이어졌다.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이동하여 카자흐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에 도착했다. 처음에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다음 날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갈 때 통과했던 산악지대의 검문소와는 달리 이곳의 검문소는 국경을 넘으려는 차량과 사람들로 매우 붐볐다.
 
   국경을 보다 빨리 통과하기 위한 방편으로 우리 일행의 여행가방(캐리어. 개당 평균 20kg 정도는 되지 않을까)은 따로 모아 검문소로 보냈는데, 현지 짐꾼이 그 캐리어를 운반하는 게 거의 예술(마술?)이다. 평소 많이 해 본 솜씨이겠지만, 17개나 되는 여행가방을 한데 묶어 끌고 가는 솜씨라니... 입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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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쪽에서 본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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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방을 한번에 운반하는 예술 같은 솜씨]

 

    전혀 다른 말과 글을 사용하는 서유럽의 각국에서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넘어갈 때 별 어려움이 없는데(심지어 국경을 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랫동안 함께 옛 소련의 일부였고, 말과 글도 비슷한 이곳에서는 두 나라 사이를 오가기가 만만치 않아, 국경 통과에 한 시간 이상 걸린다. 함께 옛 소련의 일부였다가 독립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조차도 국경을 넘을 때 아무런 검문 없이 넘는 것과도 대비된다. 유럽에는 유럽연합(EU)이라는 공동체가 결성되어 있는 결과이다(발트 3국은 그 회원국이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이런 것이 불가능할까? 멀리 동방의 일개 촌부가 이러쿵저러쿵 할 것은 아니지만, 서로 인접하여 있고 말과 글이 비슷한 데다 함께 옛 소련에서 독립한 유사한 처지의 국가들끼리 자유 왕래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국경을 통과하여 카자흐스탄으로 들어가면 3시간 30분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야 수도 알마티(Almaty)에 도착한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광야를 거의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이어지는 이 고속도로는 키르기스스탄처럼 중국 자본이 건설했다고 한다. 몇 년 전 아프리카에 갔을 때도 중국인들이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세계 각지로 손을 뻗치는 중국의 영향력이 확장일로이고 두려울 정도이다. 중국이 요새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의 끝이 어디일까? 중국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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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 가는 고속도로]

 

   이번 여정의 첫날 밤에 도착하여 다음 날 일찍 떠나는 바람에 도시 구경을 못했던 알마티에 들어서니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도시가 번화하고 발달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구경에 앞서 오후 1시에 한식당 명가로 가 점심식사를 했다. 소고기전골과 상추쌈이 입맛을 돋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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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당 명가]

 

    식사를 마치고 침블락(Shimbulak)으로 갔다. 도심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이곳에는 스키리조트가 있다.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도심에서 가깝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그래서 리프트를 타는 곳의 광장에는 기념품 가게, 식당 등의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삼성 휴대폰과 LG TV 광고판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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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블락 스키리조트]

 

   스키리조트의 정상까지는 리프트와 곤돌라를 세 번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고지대이다(1,593m→2,260m, 2,260m→2,860m, 2,860m→3,200m), 두꺼운 옷을 준비하지 않고 올라갔다가 추위에 떨어야 했다. 리조트의 정상이 해발 3,200m인 데다 그 위로는 설산의 만년설이 바로 코앞에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바람까지 불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하기야 지금 그들에게 추위가 문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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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리조트 정상]

 

   날씨가 맑으면 알마티를 잘 조망할 수 있다는데 구름이 끼어 여의치 않았다. 리조트 정상에 있는 유르타에 들어서자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팔고 있었다. 그 꿀맛이라니...
   리조트 정상에서 한 시간 정도 머물다가 곤돌라와 리프트를 타고 다시 내려왔다. 내려와 보니 상가가 있는 광장에서 사람들이 살아있는 독수리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 치기 어린 호기심에 촌부도 사진을 찍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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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의 카페가 있는 유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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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와 함께]

  

    스키리조트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간 곳은 서울의 남산에 해당하는 곳이다. 어느새 오후 6시 30분이다. 산이 시내 복판에 있는 까닭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정상에서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다만, 구름이 낀 건지 공해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하늘이 깨끗하지 않아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기념품점에 들러 카자흐스탄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하나 샀다. 키르기스스탄에 올 때부터 모자를 하나 사려고 했는데, 결국 떠나기 전에야 겨우 구입한 것이다. 그것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

 

    이 산의 정상 부위는 하나의 공원이다. 각종 조형물, 놀이기구에 더하여 작은 동물원도 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데도 케이블카가 쏟아내는 인파가 계속 몰려든다. 남녀노소 할 것 없다. 요컨대 알마티 시민의 휴식처인 셈이다. 

 

    이곳 정상 부위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식당의 테라스에 있는 식탁에 앉으면 그 아래로 시내의 전경이 보인다. 점차 석양빛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이곳에서 이번 여정의 마지막을 보내며 정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고, 이제는 공항으로 가야 하는 동방의 나그네들은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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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아래의 알마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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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내내 동행한 현지 가이드 누슬란과 식당의 테라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