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정녕 잊어야 하나(킬리만자로)

 

           이제는 정녕 잊어야 하나 

 

     3년을 별렀다. 갑자기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만 아니었으면 진즉 3년 전 여름에 다녀왔을 곳, 킬리만자로! 마침내 그곳을 다녀왔다. 그런데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에 돌이켜 보면 코로나로 흘려보낸 3년의 기간이 참으로 아쉽다. 이순(耳順)이 진즉 지나고 고희(古稀)를 향해 달려가는 나이에 맞은 3년은 결코 젊은 시절의 3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벼르고 벼르다 올랐건만 결국 정상에 이르지 못하고 눈물의 회군을 해야 하는 아픔을 3년 전이었다면  겪지 않았을 텐데... 세월의 흐름에 따른 노화현상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아무튼 처참한 실패로 끝난 킬리만자로 트레킹을 정리해 본다.    

 

 

 킬리만자로(Kilimanjaro)

 

   현지의 스와힐리어로 ‘빛나는 산’이라는 뜻의 킬리만자로는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해발 5,895m)이자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큰 휴화산이다.

   탄자니아의 드넓은 초원 위에 나 홀로 우뚝 선 이 거대한 산은 아프리카의 상징이기도 하고,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Snow)”,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우리에게 이름이 친숙한 산이다. 

   열대 우림지대부터 빙하지대까지 다 체험할 수 있어 그만큼 험하면서도, 별도의 장비 없이 두 발로 오를 수 있는 세계 최고봉이기에 등산객들에게는 꼭 올라보고 싶은 꿈을 꾸게 하는 매력적인 곳이다. 

    

   촌부는 정확히 10년 전인 2013년 8월에 탄자니아를 공식 방문한 일이 있는데, 그때 처음 만다라 산장(해발 2,720m)까지 가 본 후로 언젠가는 정상에 올라 보리라고 늘 마음속 한쪽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모시(Moshi)   

 

    2023. 8. 12. 새벽 1시 50분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행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중국 남부, 미얀마, 인도의 중부 상공을 거쳐 아디스아바바까지 10.239km를 날아가는 데 10시간 50분 걸렸다. 그곳에서 4시간 기다려 비행기를 갈아타고 킬리만자로 공항까지 1,386km 가는 데 다시 2시간 10분 걸렸다.

 

    현지 시각으로 같은 날 오후 12시 40분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와의 시차가 6시간이다. 환승한 비행기를 포함해 두 비행기 모두 에티오피아 항공이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같은 국적기는 안 다닌다. 

 

[항공노선도]

 

    에티오피아 항공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항공사라고 하지만(국제노선이 127개, 국내선이 22개이다), 이 항공사의 비행기는 처음 타보는 데다 에티오피아(Ethiopia)의 국력을 생각할 때 솔직히 미안하게도 탑승 직전까지만 해도 과연 안전할까 하는 걱정을 했다. 그런데 막상 탑승한 후의 소감은 놀랍게도 우리나라 국적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행기가 새것인 데다 부드러운 이착륙과 청결하고 친절한 기내서비스 모두 만족스러웠다. 괜한 노파심으로 걱정을 한 것이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갈 적 올 적 모두 거의 만석이었다는 것이다. 아디스아바바 공항 또한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다. 아디스아바바가 아프리카의 관문공항 역할을 한다는 말이 허언(虛言)이 아닌 듯하다. 

 

    대한항공이 케냐의 나이로비 공항 직항편을 운항하다 중단한 것과 아디스아바바 공항에 취항하지 않는 것의 속사정을 알 수는 없으나, 이번에 다섯 번째로 아프리카를 다녀온 촌부가 보기에는 다소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에티오피아 항공과 아디스아바바 공항 모습]

 

    킬리만자로 공항은 10년 전과 변한 게 거의 없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출국장까지 걸어가야 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그 공항에서 탄자니아 입국 비자를 받는 데 1시간이 걸렸다. 일 처리가 매사 만만디다.

    하긴 공항뿐이 아니다. 탄자니아는 결코 대한민국이 아니다. 이곳 사람들은 “뽈레뽈레”를 입에 달고 산다. “빨리빨리”와 발음이 비슷한 이 말은 정작 그 뜻이 “천천히 천천히”이다. 그만큼 서두르는 법이 없다. 심지어 “No Hurry! In Africa”라는 글귀가 적힌 표지판을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처럼 냉엄한 안보 여건하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야 하는 환경이 아닌 까닭에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만큼 발전이 더딘 것도 사실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직도 스마트폰이 아닌 구형 셀룰러폰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것은 다 그런 연유가 아닐까 싶다. 국토 면적 94만5천㎢(우리나라의 9.5배)에 인구 6,744만 명으로 잠재력이 큰 나라에서 언제까지 “뽈레뽈레”를 주문처럼 외우고 살 것인지.

   

[킬리만자로 공항]

 

   공항에서 대기 중이던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모시(Moshi)로 이동했다. 1시간 걸린다. 도중에 광활한 옥수수밭이 차창에 어리는 모습을 보며 10년 전을 떠올렸다. 가는 길의 도로변 노천시장이 옛 모습 그대로였다. 잠시 차에서 내려 시장 구경을 하면서 이번 산행에 동행하신 월우스님이 호텔에서 먹자고 토마토를 구입하셨는데,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았다.             

  

 

     오후 3시 30분 모시에 도착했다. 모시는 인구 22만 명으로 킬리만자로주의 주도(州都)이다(해발고도 750m). 무엇보다도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등산객들한테는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곳이다. 중심가는 번화하지만, 그 뒤의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길을 바로 마주하게 된다. 그게 현주소이다. 

 

   우리 일행이 짐을 푼 스프링랜드(Springland) 호텔은 도시 외곽에 있다. 당초 인솔자인 혜초여행사 박장순 이사님이 호텔이 초라해서 불편할 거라고 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순수 호텔이라기보다는 리조트에 가깝다. 열대 식물들로 조경이 잘 되어 있고, 숙소는 2층 건물이다. 방 안에는 침대마다 모기장이 설치되어 있다. 촌부가 모기장이 설치된 호텔에서 자 본 경험으로는 스리랑카 여행했을 때 다음으로 두 번째이다.    

  [스프링랜드 호텔]

 

  모기장을 언급하는 김에 예방주사 이야기를 해야겠다. 

 

  먼저 황열병(Yellow Fever) 예방주사이다. 

 

  이는 아프리카의 중부지역에 속하는 나라를 여행할 때 필요하다(북부나 남부지역은 필요 없다). 접종 증명서가 없으면 이들 나라 입국이 불가능하다. 탄자니아도 이에 속한다. 전에는 한 번 맞으면 유효기간이 10년이어서 10년마다 다시 맞아야 했는데, 지금은 유효기간이 종신이어서 한 번만 맞으면 된다. 10년보다 더 오래전에 맞았던 사람도 맞았던 병원에서 접종 증명서만 새로 발급받으면 된다(촌부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말라리아(학질)이다. 

 

   이건 예방주사가 아니라 예방약을 복용한다. 말라리아모기로 감염되는 말라리아는 주로 열대지방에서 환자가 발생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발병한다. 탄자니아도 열대지방인 만큼 원론적으로는 예방약을 복용하는 게 맞다(여행 며칠 전부터 복용을 시작해 여행기간 내내, 그리고 여행 후 다시 1-4주 복용). 촌부도 의사의 권유로 약을 구입해서 출발일부터 처음 이틀 동안 복용을 했다. 

    그런데 전술한 박장순 인솔자님이 먹지 말라고 했다. 모시는 도시이기 때문에 말라리아가 발병하는 예가 드물고, 트레킹은 해발 1,920m의 고지대에서부터 시작하여 기온이 낮기 때문에 모기에 물릴 염려가 거의 없어,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킬리만자로 트레킹에서 단 한 명도 발병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괜히 약을 먹으면 두통, 소화불량 등의 부작용으로 고생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말라리아 환자가 종종 나오는데, 그렇다고 예방약 먹는 사람 있냐는 것이다.

    촌부의 경험으로는 이 말이 설득력이 있다. 이번에 동행한 일행 중 예방약을 복용한 사람은 두세 명에 불과하고(그나마 며칠만), 정말이지 두통과 메스꺼움으로 고생만 했다. 

 

    오후 7시 30분에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긴 여행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만다라(Mandara) 산장

 

   2023. 8. 13.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서울 시각으로는 오전 11시이니 아무래도 시차 적응에 시간이 걸린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영상 18도의 서늘한 날씨가 객을 맞는다. 열대야에 시달리는 서울과는 천양지차이다.

   어디선가 새벽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이슬람사원의 독특한 기도 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탄자니아는 국민의 35%가 이슬람교도이다(30%는 기독교). 현직 대통령이 여성인데, 그녀도 이슬람교도이다.  

 

   오전 8시 35분에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스프링랜드 호텔을 출발하였다. 목적지는 킬리만자로 등정의 관문인 마랑구 게이트이다. 출발에 앞서 짐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산행하는 데 필요 없는 물건은 분리하여 여행 가방(캐리어)에 담아 호텔에 남기고, 5박6일 간의 산행 동안에 필요한 물건들은 여행사에서 나누어 준 카고백에 넣어 포터에게 맡기고, 산객은 산행 중에 기온 변화에 따라 갈아입을 옷, 점심도시락과 간식을 챙겨 각자 배낭에 넣어 가져가는 것이다.  

 

[등산 개념도]

 

   오전 10시 20분에 마랑구 게이트에 도착했다. 이곳은 해발고도가 1,920m 되는 까닭에 날씨가 쌀쌀하여(영상 5도) 배낭에서 자켓을 꺼내 입었다. 그런데 “뽈레뽈레”의 탄자니아답게 입산신고를 하고 허가를 받는 데 2시간 가까이 걸렸다. 결국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산행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마침내 킬리만자로를 오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마랑구 게이트 앞에서]

 

   마랑구 게이트로부터 이날의 종착지인 만다라 산장까지(거리 8km)는 전술한 대로 10년 전에 올라 본 곳이다. 이곳은 적도 밑에 위치한 까닭에 밀림지대이다.

   영화 속에서 보는 그대로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울창한 숲이 이어진다. 이끼로 덮인 갖가지 형태의 거목들이 눈길을 끈다. 등산로의 경사가 완만하여 걷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걸을 때는 땀이 나서 자켓을 벗어야 하지만, 쉴 때는 도로 입어야 한다. 열대지방이지만 고도가 높아 기온이 낮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에 역시 열대지방에 있는 키나발루산(해발고도 4,095m)을 오를 때는 거의 종일 비를 맞아 고생을 했는데, 이곳은 짙은 안개로 하늘이 흐렸다 갰다 할 뿐 비는 오지 않았다. 스콜(squall)이라고 불리는 열대성 소나기도 오지 않았다.    

 

[밀림지대]

 

   오후 2시 20분 피크닉 사이트에 도착하여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도시락은 모시에서 출발할 때 여행사에서 나누어 준 것으로서, 샌드위치, 빵, 닭다리 튀김, 볶은 땅콩, 삶은 달걀, 비스켓, 과일쥬스 등으로 구성되었고, 이후의 도시락도 늘 똑같았다. 그런데 삶은 달걀에 뿌려 먹을 소금이 없어 짭짤한 땅콩과 함께 먹는 요령도 생겼다.

   식사가 끝날 무렵 현지 가이드가 과일과 차를 준비해 주었다. 밀림 속에서 먹는 색다른 맛이 즐거움을 선사하였다. 

 

[점심 식사]

 

   30여 분에 걸친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여 계속 오르다 보니 어느 순간 밀림이 끝나고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30분. 시계가 트인 후의 산행은 훨씬 수월하다. 대신 점점 내려가는 기온이 산객을 움추리게 한다. 

 

   오후 5시 15분 만다라 산장에 도착했다. 해발고도가 2,720m이다. 

   산장은 규모가 꽤 커서 건물이 여러 동 있다. 그중 4인실이 배정되었다. 방에는 2층 목제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난방은 안 되고, 침대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어 그 위에 가져온 침낭을 펼치고 안에 들어가 잠을 잔다.

   우리나라의 백두산 정상 높이에 있는 산장인 만큼 밤 기온이 차고 꽤 춥다. 그래서 침낭 안에 뜨거운 물통을 넣고 끌어안고 잔다. 등에는 핫팩도 붙인다. 침낭이 좋아야 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이다. 여행사에서 나누어준 침낭은 말 그대로 침낭일 뿐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 침낭의 중요성을 알았으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그냥 온 게 후회된다. 이번에 하산하면 보온이 제대로 되는 거위털 침낭을 꼭 마련해야겠다고 내심 다짐한다.

 

[만다라 산장]

 

   높은 산 속에 있는 산장이다 보니 추운 것 말고도 불편한 게 많다. 가이드가 갖다주는 한 양푼의 더운물로 세수를 하고 발도 닦아야 한다. 이는 이후의 다른 산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치질은 졸졸거리는 수돗가에서 찬물로 해야 한다. 촌부는 히말라야 트레킹 때부터 나름 터득한 경험대로 반으로 자른 수건(필요한 만큼 서울에서 준비해 왔다)을 더운물에 적셔 얼굴과 발을 닦고 그 수건은 버린다. 화장실은 공용인데, 한 번 가려면 손전등을 켜고 한참 찾아가야 한다.  

 

   이미 주위가 깜깜해진 오후 6시 50분에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김칫국을 곁들인 쌀밥이 맛이 좋다. 킬리만자로 2,720m 산속에서 흰 쌀밥이라니! 호강을 한다. 전기 사정이 열악하여 전등빛이 그리 환하지 못한 게 흠이다. 그런다고 밥이 코로 들어가랴. 

   식사 후 이번 산행에 함께 하는 가이드, 요리사, 포터들(총 50명)이 모두 나와 노래와 춤으로 환영식을 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프리카인들은 흥이 참 많은 것 같다. 

 

[저녁식사와 현지인들의 환영식]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기에 밤 9시 조금 넘어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두꺼운 티셔츠와 자켓과 바지를 입고, 등산 양말도 신고.   

             

호롬보(Horombo) 산장

 

   2023. 8. 16. 이날도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아침 식사는 7시가 되어야 하건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된 시차와 한기가 뼛속으로 스며드는 불편한 잠자리가 일찍 눈을 뜨게 만든다. 

  두꺼운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오니 동쪽 하늘에 밝아오는 여명이 장관이다. 몸을 풀 겸 가볍게 산책을 하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8시에 출발했다.  

 

[만다라 산장의 여명]

 

   호롬보 산장을 향해 올라가는 길(거리 11km)에 방향을 약간 틀어 마운디 분화구를 들렀다. 화산이 폭발했던 작은 분화구 안에는 풀만 무성했다. 동물의 왕국 응고롱고로(Ngorongoro) 같은 곳과는 거리가 먼 말 그대로 작은 분화구일 뿐이다.

 

[마운디  분화구]

 

  날씨가 전날처럼 흐렸다 갰다 하면서 비는 오지 않는다. 길옆에 보이는 온갖 야생화에 시선을 뺏기면서 걷고 또 걷는다.

   동행한 천재철님(영암군 기획실장)이 그 중 몇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꽃이라며 이름을 가르쳐 주는데, 견문이 짧은 탓에 금방 잊어버리고 또 묻기를 반복한다. 

 

 

 

   오전 10시 30분 해발 3,000m 지점을 통과했다. 이제부터는 고산증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미 키가 작은 관목이나 자랄 고도인데, 그마저 안타깝게도 몇 년 전에 불이 나서(등산객의 실화로 추정) 타죽은 나무들의 잔해가 을씨년스럽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관목조차도 안 보이고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불탄 지대와 초원지대]

 

   그나마 가끔 해를 가려 주던 구름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땡볕이 작열하는 가운데, 저 능선을 넘으면 되려나 싶어 열심히 오르고 나면 또 다시 더 높은 능선이 펼쳐지길 몇 번이던가. 오후 1시 20분에 해발 3,400m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간이 휴게소(휴게소라고 해야 지붕 밑에 식탁이 몇 개 있고, 간이화장실이 있을 뿐이다)에 도착하여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할 때는 산을 오르느라 땀을 흘려 벗었던 자켓을 다시 입어야 한다. 땀이 식으면 금방 썰렁해지고 몸에서 열을 뺏기면 고산증이 찾아온다. 등산객들이 식사를 하는 곳이라 먹이가 있기 때문일까, 독수리 만한 까마귀가 식탁 주위를 맴돈다.    

 

[점심식사와 까마귀]

 

   식사를 마치고 다시 천로역정(天路歷程)의 길이 시작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능선을 넘고, 계곡을 건너고, 산굽이를 돌고.. 넓은 천지에 사람이라고는 우리 일행뿐이다.

   가끔 하산하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잠보~”하면 “잠보~”하고 답한다. 이곳에서 주고받는 인사말이다.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는 뜻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든 여러 번 본 사람이든 동일한 인사말이다.

 

 

[천로역정]

 

    다리도 아프고 배낭을 멘 어깨에 힘이 빠질 무렵 박장순 인솔자님이 한 곳을 가리킨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봉우리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킬리민자로의 주봉 우후루피크가 벌써? 그게 아니고 킬리만자로에서 두 번째 높은 마웬지봉(Mawenzi)이다. 해발 5,149m의 높이를 자랑하는 정상 부근이 구름에 가렸다 나타났다를 되풀이한다. 흠, 그새 많이 올라왔구나! 그 봉우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기를 받아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웬지봉 앞에서]

  

   어느 순간 저 앞에 보이는 능선만 넘으면 호롬보(Horombo) 산장이 나온다는 박장순 인솔자님의 말대로 힘들여 그 능선을 넘으니 커다란 산장이 눈에 들어온다. 킬리만자로에서 가장 큰 산장이다. 큰 만큼 시설도 제일 좋다. 4시 30분 마침내 호롬보 산장에 도착했다. 해발 3,720m 되는 곳에 있다. 이젠 산장 뒤로 마웬지봉이 바로 지척에 보인다.  

 

   호롬보산장은 우리 일행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온 등산객들로 붐빈다. 해발 4,720m 지점에 마지막 산장인 키보(Kibo) 산장이 있지만, 그곳은 잠시 쉬어가는 역할만 할 뿐 호롬보 산장이 킬리만자로의 실질적인 베이스 캠프이다. 그래서인지 산장 확장을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호롬보 산장]

 

     만다라 산장에서처럼 배정된 4인실에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6시 40분에 저녁식사를 했다.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정도의 고도에 도달하면 소화기능이 떨어진다. 때문에 식사량을 조절하여 소식을 했다.

 

     그런데 약한 고산증 증세가 나타났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인다. 소화제와 아스피린을 먹었더니 다소 진정되긴 했으나 여전히 몸이 무겁다. 무언가 조치를 필요로 하는 신호인데, 종일 걷느라 힘들어 그런 것이니 자고 나면 괜찮겠지 하고 침대에 누웠다. 오염원이 없어 밤하늘에 별이 쏟아지는 가운데 잠을 청했지만, 깊은 잠을 못 이루고 설쳤다. 

 

   사실 이때가 서울을 떠나오기 전 아산병원 김순배 교수님이 처방해 준 고산증 약을 복용할 시점이었다. 하다못해 김교수님이 처방해 준 약 중 호롬보 산장에 도착하거든 먹으라고 한 수면제만이라도 복용했어야 했다. 김교수님이 고산증을 견디려면 무엇보다도 잠을 잘 자야 한다고 강조했건만. 그걸 잊었고 끝내 화근이 되었다. 

 

하산

 

    2023. 8. 17.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가 많이 아프다. 잠을 자면 나을 줄 알았는데 더 심해졌다. 가이드가 타온 따뜻한 홍차를 마셨는데, 그만 다 토하고 말았다. 아, 이건 아닌데.... 겨우겨우 속을 달랜 후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지만 속이 울렁거려 먹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숭늉만 몇 모금 마시고 숙소로 돌아왔다. 

 

   본래 이날은 본격적인 산행 대신 고산증 적응을 위해 해발 4,100m 지점의 얼룩말 바위(Zebra Rock)까지 갔다가 돌아와 쉬는 날이다. 아침 9시 일행이 출발했다. 해가 나면 숙소 안보다는 바깥이 더 따뜻한 까닭에 촌부도 햇볕을 쐬면서 컨디션을 회복해 보려고 나섰다. 촌부 걱정을 하는 일행더러 알아서 천천히 따라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라고 했다. 

 

   촌부는 가이드 한 명과 함께 천천히 올라갔다. 햇볕을 받으며 걸으니 추위에서 벗어나 컨디션도 어느 정도 회복되는 듯했다. 그러나 점점 힘이 부치기 시작하면서 두통과 울렁증이 다시 찾아왔다. 그래도 참고 올라갔지만 4,000m가 고비였다. 더이상 갈 수가 없었다. 일행은 이미 시야에서 멀리 사라졌다. 결국 산장으로 돌아와야 했다.

 

[해발 4,000m 지점]

 

    숙소의 침대에 누우니 추운데도 잠이 쏟아진다. 그러다 바깥이 소란스러워 잠이 깼다. 일행이 돌아온 것이다. 모두들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본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무리해서 올라간들 정상까지 갈 수 있을지 알 수도 없거니와, 일행에게 커다란 짐이 될 게 뻔했다. 박장순 인솔자님과 의논해 하산하기로 했다. 호출하면 앰뷸런스가 와서 타고 내려가면 된다고 한다.     

 

   너무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3년을 벼른 산행이었는데 중도에 포기하고 하산하려니 너무 가슴이 아파 피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 심정을 숨기고 일부러라도 괜찮은 표정을 보이려고, 본래 정상에 서면 기념으로 찍으려고 월우 스님이 준비해온 플래카드를 들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 쓰라린 심정을 어찌 필설로 그려내랴.

 

[플래카드]

 

    오강원님이 어떻게 혼자 가냐고 함께 하산하겠다고 하시는 것을 만류했다. 촌부는 하산하지만 어렵게 온 길이니 끝까지 올라가시라고 했다. 촌부 몫까지 해 주시라고 부탁했다.

    세 시간 정도 기다리니 앰뷸런스가 왔다. 앰뷸런스라고 해서 병원 구급차는 아니고 그냥 지프차였다. 오전부터 동행했던 가이드와 함께 그렇게 하산을 했다. 산에서 내려와 대기 중이던 현지 여행사 차로 갈아타고 모시의 호텔로 돌아왔다. 

 

하산 후

 

    2023. 8. 18. 고산증의 최고 치료제는 하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호텔에서 자고 나니 아직 머리가 약간 아프기는 해도 컨디션이 거의 회복되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오전에는 내내 호텔에 머무르며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오후부터 혜초여행사 및 현지 여행사의 관계자들과 의논하여 일행들이 2023. 8. 20. 오후에 하산하여 돌아올 때까지 관광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킬리만자로 최대의 마테루니 폭포(Materuni Waterfall. 높이 93m) 폭포도 가고(모시에서 차로 1시간 간 후 산속의 황토길을 다시 1시간 더 걸어가야 한다), 커피농장에 가서 커피 원두를 찧고 볶아 커피를 만들어 보고, 아루샤 국립공원에 가서 걷는 사파리 2시간과 드라이빙 사파리 2시간을 체험했다. 

 

[마테루니 폭포]

 

[커피 만들기]

 

    걷는 사파리는 아프리카에서 드문 체험이다. 이곳에는 맹수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 드라이빙 사파리에서는 커다란 호수(호수 이름이 ‘Big Momella Lake’이다)를 덮을 정도로 수십만 마리의 홍학(=Flamingo. 플라밍고)이 떼를 지어 있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물소, 얼룩말, 원숭이, 기린 등 사파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들은 물론 다 볼 수 있다.

 

   아루샤 국립리공원의 사파리를 끝내고 아루샤의 그랑 멜리아 아루샤 (Gran Melia Arusha) 호텔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호텔 바로 앞에 메루산(Meru Mt. 해발고도 4,565m)이 있어 장관이었고,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주메뉴인 꽃등심스테이크(Rip Eye)가 너무 짜서 옥의 티다.  

 

[걷는 사파리 가이드 레인저와 함께]

 

[물소와 홍학]

 

[그랑 멜리아 아루샤 호텔의 식당에서 본 메루산] 

 

    마지막으로 정글 속의 키쿨렛트와 온천(Kikuletwa Hot Spring. ‘젬젬온천’으로도 불린다)에 가서(모시에서 두 시간 걸리는 길의 반 정도는 비포장도로를 가야 하는데, 그 상태가 워낙 안 좋아 접근성이 떨어진다) 타잔 체험을 했다. 명칭은 온천이지만 계곡물이 아마도 지열을 받아서인 듯 미지근하다.

   온천가의 높은 나무에 밧줄을 매고 손잡이를 달아놓았는데, 이것을 잡고 계곡 위로 점프했다가 물로 다이빙한다. 처음에는 무서워 보였는데 지켜보니 할 만하여 도전해서 성공했다.  온통 서양사람들만 있는 틈에서 유일한 동양인으로 점프와 다이빙을 하며 타잔 흉내를 내다보니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곳에 갈 때 미리 수영복을 준비해 가야 하는데, 탈의실이 마땅하지 않으므로 미리 입고 그 위에 적당한 옷을 걸치고 가는 게 현명하다. 그걸 몰랐던 촌부는 타고 간 지프차 안에서 갈아 입어야 했다.  

 

[타잔 체험]

 

   이 온천을 가는 길의 도로 양옆으로 사탕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기계를 이용하여 재배하고 수확하며, 수확물을 운반하기 위한 기찻길도 놓여 있다. 20세기 초 하와이로 이민 간 우리나라 교포들이 저런 사탕수수밭에서 땀을 흘리며 힘들게 일했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숙연해졌다.   

 

[사탕수수밭과 밭을 잘 보기 위해 지프차에 올라간 모습]

 

    관광 일정을 다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호텔이 스프링랜드 호텔에서 아메그 호텔<Ameg Ladge Kilimanjaro>로 바뀌었다. 넓은 초원 위의 1층짜리 건물들 여러 동에 객실이 있다. 리조트에 가까운 고급호텔이다) 킬리만자로 정상 등정에 성공하고 귀환한 일행들과 다시 만났다.

 

   다들 역전의 용사처럼 보였는데, 너무 힘들어서 고생이 심했다고 푸념한다. 다리를 절뚝이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나는 그들이 한없이 부러웠건만, 정작 본인들은 오히려 내가 보낸 관광일정을 부러워했다. 세상일이 매사 상대적임을 새삼 느낀다.    

 

[아메그 호텔의 모습]

   

 귀국 

 

 2023. 8. 21.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다 11시에 호텔을 나섰다. 시내에 장터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 후 유니온 카페(Union Cafe)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1933년에 문을 연 이 카페는 모시의 관광명소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요새 유행처럼 번지는 번쩍번쩍한 카페들에 비하면 초라하기만 한데, 문을 연 지 9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연륜의 흔적이 스며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유니온 카페]

 

   처음 이곳에 올 때는 한적했던 킬리만자로 공항의 출국장이 시장바닥처럼 붐빈다. 마치 집단 대탈출이라도 하려는 듯 혼잡하기 이를 데 없다. 모를 일이다.

   온 길의 역순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라 먼저 아디스아바바로 가야 하는데, 킬리만자로 공항을 이륙하여 얼마 되지 않아 창밖으로 킬리만자로산이 선명하게 보인다. 유난히 날이 좋아서 잘 보이기 때문일까 창밖을 보라고 기내방송까지 한다.

   킬리마자로산을 오른쪽에 두고 빙 돌아가는 항로 덕분에 한참 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정작 그 산에 가서는 못 본 풍경이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려면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비행기에서 본 킬리만자로산]

 

   아디스아바바에서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항로는 갈 때와 달리 인도, 미얀마, 중국 남부의 상공이 아닌 파키스탄, 파미르고원, 중국 북부의 상공을 지나는지라, 그 덕분에 파미르고원의 하얗게 눈이 덮인 세계의 지붕을 볼 수 있었다. 이번 여정의 보너스이다. 

 

[귀로의 항공노선도와 파미르고원]

 

    모든 여정이 끝난 지금, 정상 등정 실패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다시 되짚어본다. 왜 그때 갑자기 고산증이 찾아왔던 것일까. 돌이켜 보면 결국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 글의 첫머리에서 썼듯이 내가 3년 전의 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킬리만자로 산행을 위해 체력을 기른다고 지난여름 내내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주말마다 산(도봉산, 청계산, 연인산, 금대봉, 운악산 등등)을 오른 게 오히려 체력을 약화시켰다.

   산행을 앞두고 말라리아를 예방한다고 먹은 약은 괜히 두통과 메스꺼움만 유발했다.

   마란다 산장에서 호롬보 산장으로 올라갈 때 좀 더 천천히 가면서 컨디션 조절을 했어야 했는데 이를 간과했다.

   마지막으로 속담에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안 짖는다고 했던가, 기껏 준비해 간 고산증약을 타이밍을 놓쳐 먹어보지도 못한 게 뼈아픈 실책이다.                   

        

   글을 끝내며 지난 일정을 돌아보려니 새삼 아쉬움과 미련이 남고, 킬리만자로의 산신령님이 야속하기만 하다. 정말 정상을 꼭 등정하고 싶었던 곳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제는 잊어야 하는 걸까. 정녕 가슴 속에 묻어야만 할 슬픈 옛이야기로 남겨야 하나.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중 마지막 부분을 떠올린다.

 

아무리 깊은 밤일지라도 한 가닥 불빛으로 나는 남으리 

메마르고 타버린 땅일지라도 한줄기 맑은 물소리로 나는 남으리 

거센 폭풍우 초목을 휩쓸어도 꺽이지 않는 한 그루 나무 되리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그래, 다시 배낭을 걸머지고

어디엔가 있을 나의 표범을 찾아 길을 나서자꾸나.      

 

   끝으로, 이번 트레킹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애쓰신  혜초여행사의 박장순 이사님과 박진형 대리님 이하 관계자분들과 아프리카 현지 여행사의 관계자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님들의 건승을 빈다. (끝)  

 

킬리만자로의 표범.mp3

(킬리만자로의 표범 + 미워미워미워)(조용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