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귀를 닮은 산(마이산)
2024.04.20 22:07
말의 귀를 닮은 산
진즉부터 오르고 싶었고 그래서 오랫동안 별렀으면서도 정작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산이 있었다. 바로 전북 진안에 있는 마이산(馬耳山)이다.
1979년 10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 산은 생김새가 특이하게도 말의 두 귀를 닮은 까닭에 마이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조선시대 태종 임금이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이 산의 인근을 지날 때면 그 독특한 모습이 눈에 확 띌 뿐만 아니라, 기슭에 있는 탑사(塔寺)의 불가사의한 돌탑들로 인해 유명세를 탄 지 오래다.
촌부도 오래전에 탑사에 갔다가 그곳의 돌탑들을 보며 감탄한 일이 있었다. 그 후 한동안 잊고 지내오다 조계종의 전임 총무원장이신진 원행스님이 산 아래의 금당사에 주석하시게 되어 찾아뵌 후 새삼 마이산 등정을 생각하게 되었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 2024. 4. 13.의 일이다.
[마이산]
2024. 4, 13. 아침 6시. 히말라야산악회의 도반들과 방배동을 출발하였다. 딴에는 일찍 출발한다고 생각했는데, 오산(誤算)이었다. 바야흐로 봄철 나들이 인파가 절정을 이뤄 고속도로가 저속도로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천안-논산 고속도로의 정안 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할까 하다가 좀 더 가서 여산휴게소에서 하면 차가 밀리는 것을 피할 것이라고 나름 머리를 굴렸는데, 맙소사 이곳은 한술 더 떴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우리 같은 생각을 안 하랴. 휴게소의 넓은 주차장이 나들이 차량들로 꽉 차 있었고, 겨우 비집고 들어가 주차를 하고 화장실에 가니 그 앞에 서 있는 긴 줄에 입이 벌어진다.
3시간이면 족할 줄 알았건만, 4시간 걸려 마이산의 남부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곳 역시 전국에서 모여든 인파로 인해 마이산 등산로 바로 입구의 제1주차장까지 가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멀리 떨어진 마이산 초입의 제4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걸어가야 했다.
[마이산 입구의 차량 행렬]
마이산이 있는 전라북도 진안군(鎭安郡)은 군 전체가 해발 300m 이상의 고원이다(진안고원). 그런 까닭에 다른 지역에 비해 평균기온이 낮아 우리나라에서 벚꽃을 가장 늦게까지 볼 수 있다. 바로 그 벚꽃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벚나무의 벚꽃이 이제 만개하여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꽃비가 내렸다.
결국 10시 30분이 되어서야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배동에서 적어도 새벽 5시 전에 출발하는 건데....
[마이산 등산로]
마이산 도립공원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나오는 갈림길에서 고금당 쪽으로 향했다. 이곳 갈림길에서 출발하여 -->고금당-->비룡대-->북부주차장 갈림길-->봉두봉-->암마이봉-->천왕문-->은수사-->탑사-->탑영제-->금당사-->갈림길의 원점회귀형으로 등산코스를 택하였다. 마이산을 사실상 종주하는 셈이다.
[고금당갈림길의 이정표]
등산로 시작 지점인 갈림길에서 고금당까지는 0.6km로 20분 걸렸다. 초반 0.3km는 임도(林道)로 평탄하지만 후반 0.3km는 경사가 제법 급한 바윗길이다.
고금당(古金堂)은 금당사(金堂寺)가 본래 이곳에 있었다고 하여 그렇게 불리는데, 고려말에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이곳에서 수행한 까닭에 나옹암(懶翁庵) 또는 나옹굴이라고도 한다.
푸른 하늘 밑의 푸른 산에서 물처럼 바람처럼 수행하셨을 나옹선사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 수행의 과정에 어찌 애증(愛憎)이 끼어들 여지가 있었으랴.
靑山兮要 我以無語(청산혜요 아이무어)
蒼空兮要 我以無垢(창공혜요 아이무구)
聊無愛而 無憎兮(료무애이 무증혜)
如水如風 而終我(여수여풍 이종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마이산의 중턱에 있는 고금당은 특이하게도 지붕이 황금빛이어서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띈다. 촌부도 후술하는 금당사에 2년 전에 처음 들렀을 때 산 중턱에 보이는 이 황금빛 지붕의 건물을 보고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일까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이날 고금당에서 뵌 효명(曉鳴) 스님께 절 지붕이 왜 황금색이냐고 물었더니 '황제의 색'이라고 하신다. 무슨 의미인지 알 듯 모를 듯하다.
그나저나 절이 높은 곳에 있는지라 법당 앞에 서면 탁 트인 풍광이 일품이다. 암마이봉의 우뚝 솟은 봉우리를 비롯하여 주위의 높고 낮은 봉우리와 그 사이의 계곡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비룡대에서 암마이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여 이후의 산행길을 짐작할 수 있다.
[고금당]
[고금당에서 바라본 마이산 능선]
이 절에 10년째 계신다는 효명 스님은 처음 뵈었을 때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람을 대하시더니 이내 친숙해져서, 고금당 이후의 등산로를 설명해 주실 뿐만 아니라 갈림길에서 헷갈리지 않게 상당한 거리를 배웅해 주셨다.
헤어지기 직전에 200년 된 산벚나무 앞에서 만개한 벚꽃이 모두 몇 송이겠냐고 스님이 물으셨다. 촌부가 “8만 4천 송이”라고 대답하자 빙긋이 웃으신다. 애당초 답이 불가능한 질문이라 선문답(禪問答)을 한 것이다.
[효명 스님과 함께]
[200년 된 산벚나무]
효명스님과 작별한 후 평탄한 흙길과 가파른 암릉이 교대로 나타나는 등산로를 따라 허위허위 걸음을 재촉하여 비룡대(飛龍臺. 해발 527m)에 도착하니 벌써 정오의 햇볕이 작열한다. 이날 날씨가 유난히 좋다. 사실 등산하기에는 구름이 해를 가리는 다소 흐린 날씨가 좋은데, 인력으로 안 되는 것을 어쩌랴.
근처에 높은 봉우리가 없어 전망이 좋은 비룡대는 뾰족한 암봉(岩峰)인 나봉암(해발 527m)의 정상에 세워 놓은 2층짜리 팔각정이다. 정자가 나무가 아니라 콘크리트로 지어진 게 흠이지만, 앞사람의 엉덩이만 보고 올라갔다가 먼저 오른 사람이 내려가 빈 공간이 생겨야 비로소 정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붐빈다. 마이산 등산로 중 가 보아야 하는 명소의 하나이다.
[비룡대와 비룡대에서 바라본 마이봉. 앞이 암마이봉이고 뒤가 숫마이봉이다]
비룡대에서 가파른 암릉길을 내려가면 곧 금당사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 능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탑영제 갈림길을 거쳐 북부주차장 갈림길에 이른다.
이 길에서는 흥미로운 장면을 볼 수 있다. 다름 아니라 거대한 바위를 가냘픈 나뭇가지가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다른 산에서도 이따금 볼 수 있는 장면이긴 한데, 유독 마이산의 이 등산로에서 자주 눈에 띈다.
나뭇가지를 받쳐 놓는다고 무너질 바위가 안 무너질 리 없겠지만, 큰 짐을 얹은 지게를 가느다란 지게 작대기가 지탱하듯이, 작은 힘이나마 보태서 바위의 붕괴를 최대한 막아 등산객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염원을 상징적으로 담은 것은 아닐까. 그 나뭇가지를 받쳐 놓는 사람의 갸륵한 정성에 산신령이 감동하여 바위의 붕괴를 막아줄지 아는가.
[바위를 지탱하는 나뭇가지들]
[북부주차장 갈림길의 이정표]
북부주차장 갈림길에는 성황당도 설치되어 있다(그래서 등산지도에 따라서는 북부주차장 갈림길을 성황당으로 표시한 것도 있다). 돌무더기 위로 장승이 두 개 있다.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다가 죽은 나무의 윗부분을 잘라내고 남은 부분에 사람 얼굴을 새긴 듯하다. 주위에 있는 돌을 하나 집어 돌무더기에 얹고 무사 산행을 빌었다.
[성황당]
이제껏 갈림길에서는 직진을 했는데, 이번 갈림길에서는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300m 떨어진 봉두봉으로 향했다. 해발 545m의 이 봉우리는 전체적인 모양이 둥근 형상이기 때문에 봉두봉이라고 불린다고도 하고, 봉황의 머리 같이 생겨서 봉두봉(鳳頭峰)이라고 불린다고도 한다. 아무튼 암봉의 봉우리지만 정상에는 숲이 무성하고 쉬어갈 수 있는 벤치가 설치되어 있다. 그 숲 사이로 이제껏 지나온 고금당과 비룡대가 보인다.
[봉두봉]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1시 50분이다. 더운 날씨 탓에 갈증이 나는 목을 물 한 모금으로 적시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암마이봉 정상까지 가려면 바쁘다. 봉두봉에서 탑사 쪽으로 내려가다 탑사 갈림길에서 이번에는 왼쪽으로 진행해야 암마이봉으로 갈 수 있다.
이제는 암마이봉이 지척에 있는데, 그 정상은 요원하다. 봉우리의 아래를 빙 둘러 북사면으로 돌아가야 정상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나오기 때문이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이 길은 험하고 지루하다. 지친 다리에 힘도 불어넣을 겸 기를 받기 위해 도반들과 함께 봉우리의 암벽에 두 손을 대고 산신령께 빌었다.
“힘을 주소서~!”
[암마이봉과 그 암벽]
이처럼 암마이봉을 지척에 두고 빙 둘러 돌아가노라면 거대한 암봉에 마치 벌집처럼 구멍들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풍화혈(風化穴)이라고 일컫는 타포니(Tafoni)로 이 또한 마이산의 상징이다.
마이산은 약 1억 년 전까지는 호수였고, 그 바닥에 자갈, 점토, 모래 등이 퇴적되어 있었는데, 지각변동으로 호수가 융기하여 지금의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런데 봉우리의 북쪽 사면은 식생과 토양으로 덮여 있어 암석의 풍화가 비교적 느리게 진행된 데 비하여, 남서쪽 사면은 경사 60° 이상의 급경사 지역 지표면이 햇빛에 노출되어 태양열에 의한 기온의 차이가 심해 풍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풍화 과정에서 암석을 이루는 자갈과 모래 사이에 물이 침투해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쐐기 작용 자갈이 빠져나간 자리에 구멍이 난 것이 바로 타포니다. 마이산 타포니의 크기는 직경 5~10m, 깊이 2m 정도로 매우 큰 편으로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다.
[마이산의 타포니]
암마이봉의 북사면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입구에 다다르니 많은 사람들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정상까지의 거리는 450m로 경사가 매우 급하다(경사도 70-80%). 북사면은 오로지 바위뿐인 남사면과 달리 나무가 자라기 때문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계단과 바윗길로 이루어진 이 길의 경사가 급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배낭을 입구에 벗어놓고 오른다. 30분 정도 걸리는 정상에 오른 후에는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굳이 메고 갈 일이 아닌 것이다. 촌부도 그렇게 할까 하다가 산악인의 알량한 자존심에 그냥 배낭을 맨 채 올랐다. 그만큼 힘이 드는 것은 감수하면서.
암마이봉의 정상으로 오르다 보면 바로 코앞에 있는 뾰족한 형상의 숫마이봉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아예 숫마이봉을 조망하는 전망대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숫마이봉의 중턱에 있는 묘한 모습의 화엄굴도 볼 수 있다. 이 굴은 득남, 입시, 승진 등을 위한 영험한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숫마이봉]
오후 3시 15분 마침내 암마이봉 정상에 도착했다. 멀리서 바라볼 때의 모습과는 달리 정상은 평탄하고 널찍하다. 높이가 687.4m임을 알리는 자연석 표지석 앞에는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정상의 올라온 반대편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제까지 거쳐온 고금당, 비룡대, 봉두봉과 이후 하산길에 지날 탑영제, 금당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르느라 흘린 땀을 시원한 바람이 씻어준다.
[암마이봉 정상과 그곳에서 바라본 전경]
정상에 올랐으니 하산할 일만 남았다. 암마이봉 입구로 되돌아 내려가는 길은 중간 부분에서 상행길과 갈라졌다가 다시 만난다. 아마도 붐비는 인파를 고려해서 그렇게 길을 낸 듯하다.
암마이봉 입구로 돌아와 은수사(銀水寺) 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150m 내려가면 천황문(天皇門. 천왕문이라고도 한다)이 나온다. 이곳은 지명에 문(門)이 있지만, 실제로 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의 고갯마루 안부(鞍部)를 지칭한다.
이곳에서 암마이봉 올라가는 길과 전술한 숫마이봉의 화엄굴로 올라가는 길, 그리고 은수사로 내려가는 길이 갈린다. 또한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기도 하다.
[천황문]
숫마이봉의 바로 밑에 붙어 있는 은수사(銀水寺)는 본래 이름은 상원사였다. 그런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머물며 기도할 때 물을 마시고 물이 은(銀)같이 맑다고 한 데서 은수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일견하여 매우 아름다운 절이라는 느낌이 확 든다.
경내에는 제작 당시(1982년) 동양 최대였던 법고(法鼓), 수령 650년의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가 있고, 태극전에는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꿈에 산신령으로부터 금척(金尺)을 받는 그림인 몽금척도(夢金尺圖. 금척수수도<金尺授受圖>라고도 한다)와 금척의 복제품이 있는데, 이미 시계가 4시를 가리키고 있어 이들을 자세히 둘러볼 여우가 없는지라, 숫마이봉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듯한 법당인 대적광전 앞에 서서 부처님을 참배하고 바로 탑사로 향했다.
[은수사 전경]
[숫마이봉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대적광전]
은수사에서 다시 300m를 내려가면 탑사가 나온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갑룡 처사가 30여 년에 걸쳐 쌓은 80여 개의 돌탑이 있는 이 절은 태고종 소속으로 마이산을 유명하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각기 다른 크기(1m~13.5m)와 모양을 갖춘 원뿔형과 일자형의 찹들이 장관을 이룬다. 그 중에서 대웅전 뒤의 천지탑 한 쌍이 가장 큰데, 어른 키의 약 3배 정도 높이이다.
아무리 강한 비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고 긴 세월을 지탱하여 온 신비스런 탑들이다. 접착제를 쓴 것도 아니고 시멘트로 굳힌 것도 아니며 홈을 파서 끼워 맞춘 것도 아닌데 오로지 다듬지 않은 자연석 돌로 쌓은 이 탑들이 온전히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는 게 경이롭다.
[탑사 전경]
[천지탑]
탑사에서 금당사를 향해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제법 넓은 저수지가 나타난다. 탑영제이다. 암마이봉, 숫마이봉과 봉두봉을 뒷배경으로 하고,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벚꽃이 만발하여 있는 유원지이다. 많은 오리배가 떠다니며 상춘객들을 즐겁게 한다.
[탑영제]
탑영제를 지나 마침내 금당사에 도착했다. 시계바늘이 오후 4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다. 해남 대흥사에서 일부러 시간 맞춰 올라오신 중앙승가대학 총장 월우 스님과 영암군청의 천재철 국장님이 반갑게 맞이하신다. 본래 오후 4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40분이나 늦어 미안하기 그지없다.
금당사(金堂寺. 金塘寺라고도 표기한다)는 김제 금산사(金山寺.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의 말사이다. 이 절의 창건에 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814년(통일신라 헌덕왕 6년) 중국 승려 혜감(慧鑑)이 창건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650년(백제 의자왕 10년) 고구려에서 백제로 망명한 보덕화상(普德和尙)의 11 제자 중 한 명인 무상(無上)이 그의 제자 금취(金趣)와 함께 세웠다는 것이다. 현재 후자의 설이 주류적인 듯하다.
창건 당시의 위치는 지금보다 약 1.5㎞ 떨어진 곳이었곳이었는바, 전술한 고금당(古金堂)이 바로 그곳이다.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긴 것은 1675년(숙종 1년)의 일이다.
[금당사 극락보전]
해남에서 오신 두 분, 그리고 산행 도반들과 함께 조계종 전 총무원장 원행(圓行) 스님이 계신 처소(설법전. 說法殿)로 들어갔다. 스님은 총무원장으로 계실 때부터 여러 번 뵈었고, 총무원장을 물러나 금당사에 내려와 계시게 된 후에도 찾아와 뵌 일이 있어 친밀하다. 처음 뵙는 사람도 스님의 그야말로 후덕하고 자비로운 모습에 반하여 끌린다.
전에도 스님과 차담을 할 때면 우리 역사와 도자기에 관한 스님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스님이 몸소 타 주시는 보이차를 마시며 1시간 30여 분 차담을 하면서 새삼 스님의 깊은 학식에 감탄하였다. 차를 마신 후에는 스님께서 보이차 전차(磚茶)를 각 사람마다 1편씩 주셨다.
[차를 내리시는 원행스님]
[설법전 앞에서]
[금당사 경내]
차담을 끝내고 저녁식사를 하러 사하촌(寺下村)의 식당으로 갔다. 원행스님께서 몸소 저녁식사로 한정식을 사 주시고, 그에 더하여 귀경하는 차 안에서 먹으라고 꽈배기와 강정까지 사 주셨다. 당신을 찾아온 사람을 빈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는 스님의 자비행에 새삼 감복하였다. 주차장까지 배웅을 해 주시는 스님에게서 전임 총무원장의 위세를 찾아보려 한다면 그건 오히려 스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리라.
산행으로 흘린 땀을 씻을 요량으로 근처에 있다는 ‘진안홍삼스파’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불통이다. 이미 저녁 7시 30분이 넘은 야심한 시각에 진안에서 목욕탕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헛된 욕심이다. 서울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었다. 긴 하루였다.
글을 맺으며, 불청객을 극진하게 맞아주신 원행스님, 멀리 해남에서 일부러 달려 오신 월우스님과 천재철 국장님, 초면에 물과 커피를 내 주시고 길을 안내해 주신 효명스님, 그리고 산행을 함께하며 늘 힘이 되어 주시는 도반님들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끝)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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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
2024.04.21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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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거사
2024.04.21 09:39
에궁,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누구나 하는 것을 흉내내 것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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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텃골
2024.04.21 07:39
여행의 묘미 중 하나가 보면 처음 보는 풍경이며 낯선 사람들에서 느껴지는 생경함의 매력이다. 그러나 익숙한 풍경이나 다시 만나는 지인들의 반가움이 여행을 더욱 정감있는 여행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 마이산 글이 그렇다.
아련하지만 아하! 거길 그렇게 걸으셨구나.
그래 거기 그런 곳이 있었디.,
그리고 낯익은 동반자의 그림자가 스치면 반갑고.
...
근데 경이로움 하나.
얼마나 그간 버풂이 크셨기에 어딜 가시든 지인들이 글케 반기실까? 특히 스님들이란 나이 관계없이 큰절 받으며 거만한 대접만 받든데 오히려 대접을 받다니..
스님들한테 대접 받는 분은 부처님 뿐일텐데..
그니까 부처님 산행기 였네여. -
우민거사
2024.04.21 09:42
아이고, 교수님 무슨 그런 말씀을~
소생은 그저 부처님을 먼 발치에서 우러르는 촌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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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회
2024.04.21 16:17
전주 집 가까이 있어 내려가면 드라이브겸 산 아래 몇차례 갔지만 아픈 무릎 때문에 올라 가진 못했습니다, 덕분에 생생하게 산행을 그려봅니다, 감사합니다 -
우민거사
2024.04.22 10:07
탑사에서 은수사, 천황문을 거쳐 가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도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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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단하십니다.
아직 청년이십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