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음인가 기다림인가(고대산)
2012.03.19 11:24
높음인가 기다림인가
분명 봄이 오는 길목이건만 아직은 날씨가 쌀쌀하다. 겨울잠에서 깨어나 세상 밖으로 목을 내미는 개구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꽃샘추위가 며칠 계속되었다. 다행히 주말이 되면서 기온이 다소 올라가 새벽길을 나서야 하는 산객들의 걱정을 덜어준다.
경칩(驚蟄)이 5일 전에 지나간 3월 10일, 고대산 등반길에 나섰다. 법원산악회의 정기산행이다.
전국토의 70%가 산이다 보니 우리나라에는 정말 명산이 많다. 내 딴에는 틈나는 대로 명산을 찾아 주유천하(周遊天下)하였다고 자부하였지만, 법원산악회의 정기산행에 따라 나서기만 하면 대개는 생소한 곳이라 주눅이 든다. 다리에 힘 빠지기 전에 부지런히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한다.
처음 고대산 산행을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산이 높아서 고대산(高臺山)인가, 임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의 전설이라도 깃들어서 고대산(苦待山)인가, 아무튼 누군가가 이름을 감칠맛나게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는 전자이다.
높이 832m. 경원선 철도가 휴전선에 가로막혀 멈춘 곳에 고대산이 솟아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최북단인 연천군 신서면과 강원도 철원군 사이이다.
사실 이 정도 높이의 산은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즐비한 백두대간에 갖다 놓으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 일대에서는 높다고 뽐낼 만하다. 이 산의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철원평야와 6·25 때 격전지인 백마고지(395m)가 바로 내려다보이고, 그 뒤로 휴전선 너머 북녘 땅도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또한 실향민이 분단으로 인한 망향의 한이 가슴에 서려 북녘의 두고 온 가족이 그리워질 때, 멀리서나마 북녘 땅을 바라볼 수 있는 명산으로 복계산(福桂山,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1,057m)과 더불어 이 산을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높은 곳에서 통일의 그날을 고대(苦待)하며 오르는 산이 바로 고대산(高臺山)인 셈이다.
수려한 전망과 적당한 코스 등 최적의 산행여건을 갖췄음에도 전략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전에는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았다.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이제껏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산이 지닌 매력이다.
이 산의 산행 출발지에서 불과 도보로 10여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경원선 기차역의 최북단인 신탄리역이 있는데, 그곳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그 철마가 달릴 수 있는 날이 바로 통일의 그 날일 것이다.
2
3월의 둘째 토요일인 10일, 아직은 찬 기운에 옷깃을 여며야 하는 아침 7시 40분에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를 출발했다. 유치원생이 소풍 가는 것도 아닌데, 지금도 산행 전날 밤에는 잠을 설친다. 그래서 차만 타면 이내 부족한 잠을 보충하느라 수면삼매경에 빠져 드는 게 버릇이 되었다. 도중에 언뜻 눈을 떠서 창밖을 보니 눈발이 날린다. 눈이 오면 산행이 힘들텐데...하는 생각도 다시 몰려오는 잠 속으로 묻혀버린다.
9시 30분, 고대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눈도, 바람도 없는 화창한 날씨다. 아까 눈을 본 것은 꿈이었던가. 산행기점인 주차장은 널찍하면서도 포장이 잘 되어 있다. 연천군에서 공을 들인 듯하다. 구체적인 용도를 모르겠으나 아직 개장을 하지 않은 번듯한 건물도 있다. 그만큼 이제는 찾는 이가 많아진 것일까, 아직 초봄이건만 우리 일행이 타고 온 버스 말고 관광버스 두 대가 이미 와 있다. 이 좁은 국토에 5천만이 넘는 인구가 사는데, 어디인들 사람이 없으랴.
9시 45분에 등산을 시작했으나, 새로 들어선 건물로 인하여 처음 예정했던 산행기점인 제2등산로 입구를 찾지 못하여 제3등산로로 갔다가 우회하는 곡절을 겪은 끝에 제2등산로 입구를 겨우 찾았다. 등산로 입구를 정비할 마당이라면 표지판도 찾기 쉽고 보기 쉽게 설치하면 금상첨화련만...
눈에 보이는 풍경은 평화롭기만 한데,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이면에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
21세기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김씨 3대 세습왕조가 몰락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으리라.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말등바위를 지나자 앞에 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두런두런 의논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대가 높아지면서 등산로가 눈에 덮여 있는 것이다. 겨우내 내린 눈이 다져져 미끄럽다. 혹시 몰라 가져온 아이젠이 효용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대개는 아이젠을 가져왔는데, 미스 인천법원(?) 출신 김인숙 비서관을 비롯한 몇몇은 그렇지 못하다. 지난 달 시산제 때 아이젠을 가져갔다가 그냥 가져간지라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마당에 새삼 무슨 아이젠이 필요하랴 싶어 그냥 왔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만
길 양옆에 있는 쇠줄을 잡고 겨우 겨우 걸음을 옮기다 결국 바위에 무릎을 찧었다. 산악회장 체면에 아프다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절뚝이다 나중에 하산하여 목욕탕에 가서 보니 피멍이 들었다. 오호통재라.
칼바위지대를 벗어나자 다시 전망이 탁 트인 능선길이 기다린다. 등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등산 자켓을 벗어 배낭에 넣었다. 시원하고도 상쾌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셔 본다. 정상인 고대봉이 저만치 보인다. 그런데 선발대는 진즉에 앞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정상인 고대봉에 다다르기 전에 대광봉이 먼저 나온다. 11시 50분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팔각정의 전망대가 있다. ‘고대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등산객이 쉬어가기에는 좋지만, 높은 산에 팔각정은 아무래도 안 어울린다. 여기서 신선놀음 할 것은 아니지 않는가.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시멘트콘크리트가 아닌 목조건물이어서 다행이다.
등산지도상에 나와 있는 삼각봉은 지나치는지도 모르게 지나고, 고대산 정상인 고대봉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12시 13분이다.
제2등산로 입구 출발지로부터 2시간 10분 정도 걸렸다. 총연장이 3.2km이므로 적당한 시간이 걸린 셈이다.
2년여 만에 등산을 한다면서도 임해지 판사는 여전히 힘이 넘쳐 나는 듯하다. 사법연수원 교수와 연수생 신분으로 나와 처음 인연을 맺은 이래 어느덧 15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언제나 씩씩한 모습이 보기 좋다.
그런가 하면 작년 양평 중원산에서 처음 법원산악회 산행에 따라나섰을 때는 사색이 되다시피 했던 황진구 부장은 그 동안 충분히 적응하여 이젠 완전히 프로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리고 서울고등법원에서 근무할 때 산을 많이 다닌 보람이 있어서인지 변성환 판사는 초행길임에도 여유가 만만하다.
세 사람과 김비서관은 다 싫든 좋든 올 한해 나와 함께 이 산 저 산 다녀야 할 판이다. 사주팔자에 그렇게 씌어 있는 것은 아닐까...
고대산 정상인 고대봉에는 목재로 만든 헬기장이 있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다. 김비서관이 준비한 점심이 꿀맛 그 자체이다. 집이 인천이라 산행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힘든데, 점심까지 준비하여 온 그 정성이 고마울 따름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고대산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백마고지와 탁 트인 철원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문외한의 눈에도 이 산이 군사전략적 요충지임을 알겠다. 남쪽으로는 금학산(947m)과 지장봉(877m)이 이어지는데, 역시 눈에 덮여 있다. 고대산과 금학산을 이어서 일주하는 등산코스도 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12시 50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길은 제3등산로를 택하였다. 이 길 역시 잔설이 덮여 있고, 군데군데 바닥이 얼음으로 결빙되어 있어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으면 내려가기 힘들다. 유인희 사법보좌관이 등산자켓을 벗어 깔고 엉덩이썰매를 타고 내려가는데, 나도 따라할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포기하였다. 엉덩이에 살이 없는 것을 어쩌랴.
하산길은 총연장이 3.7km로 올라갈 때보다 길다. 그래서인지 비록 총 소요시간은 2시간이 채 안 되어 올라갈 때보다 덜 걸리는데도 다소 지루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길이 미끄러워 더 그럴 것이다.
그 궁금증을 폭포 앞의 표지판이 풀어준다. 폭포 옆 깎아지른 바위절벽의 무늬가 마치 표범 무늬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해야겠지만, 범부의 눈에는 그 무늬가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사물을 보는 혜안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을 터.
원점회귀하여 주차장에 돌아오니 오후 2시 45분이다. 산행예정시간 5시간을 정확히 지켰다. 이는 법원산악회 산행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오후가 되면서 기온이 올라가 언 길이 녹는 바람에 등산화에 흙이 많이 묻어 잘 떨어지질 않는다. 물로 씻어야 하는 고민을 관광버스가 해결해 줄 줄이야. 요새는 관광버스에 압축공기를 뿜어 등산화의 흙을 터는 장비가 갖추어져 있다. 골프장에서 골프가 끝난 후 골프화를 청소하는 공기압축기를 연상하면 된다. 서비스가 좋아졌다고 감탄했더니 누군가 거든다.
“버스 기사가 청소하기 귀찮아서 비치한 거랍니다.”
아무렴 어떠랴,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이다. 이것도 상생(相生)인가... (2012.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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