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왕이런가(왕방산)

2013.02.28 18:27

범의거사 조회 수:11012

 

                       모두가 왕이런가

 

   2013년 1월 1일에 대관령 능경봉 신년 해돋이 산행을 하였지만, 그 때는 동해에서 떠오르는 계사년의 첫 해를 맞이한다는 의미에 중점을 두었는지라, 금년 한 해의 산행을 시작하며 산신령께 무탈산행을 기원하는 말 그대로의 시산제(始山祭)는 2월 16일에 포천 왕방산에서 지냈다.

 

  설을 쇠고 난 후 1주일밖에 안 되는 시점이건만, 서울에서 비교적 가깝고 산이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지내는 시산제여서 그런지 평소보다 많은 인원(54명)이 참가하였다. 계사년의 정기산행이 성황을 이룰 듯한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특히 법원산악회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원로회원 세 분이 참가하셨고, 더구나 시산제의 축문까지 정성스레 작성하여 오셨으니 감사하기 그지없다.

  등산안내도1.jpg

  

   왕방산(王訪山 737.2m)은 동쪽의 포천시와 서쪽의 동두천시 사이에 있는 산이다. 그러나 거리상으로는 포천시 바로 뒤에 있으므로 사실상 포천시의 주산(主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일찍부터 포천의 진산(鎭山)으로 불리어 왔다.

 

   872년(신라 경문왕 12년)에 도선대사가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그의 명성을 듣고 헌강왕이 친히 행차하여 방문하였다 하여 그 절의 이름을 ‘왕방사(王訪寺)‘라 하고, 산도 왕방산(王訪山)’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났다가 서울로 환궁하는 도중에 왕자들의 골육상쟁 소식을 듣고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산에 있는 절을 방문하여 며칠 동안 체류했다 하여 절 이름을 ‘왕방사’, 산 이름을 ‘왕방산’이라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지명이 임금님의 행차와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왕방사는 17세기에 이르러 왕산사(王山寺)로 불리다가 그 후 폐사가 되었는데, 대웅전.jpg1947년에 다시 복원하면서 지금의 보덕사(普德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거창한 창건설화에는 걸맞지 않게 지금은 그냥 별 특징이 없는 평범한 절이다. 다만 절마당의 주차장이 넓고 그 옆에 방문객용 화장실을 갖추어 놓은 것을 보면 찾는 신도가 많은 듯하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때가 토요일의 아침의 이른 시각인데도 대웅전에 예불하러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요사이 웬만한 사찰들이 다 그러하듯이 포천시 포천동 호병골에서 보덕사로 올라가는 길도 포장이 되어 있다. 그런데 그 길이 좁고 꼬불꼬불하기가 보통이 아니어서 45인승 대형버스가 올라가기에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건만, 거의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기사님의 운전솜씨 덕분에 아침 9시 50분에 보덕사 절마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뜻 보아도 해발고도가 상당하여 그만큼 등산시간이 단축되었다. 명색이 산악회의 회장으로 산을 다니면서 등산시간이 단축된 것을 환영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린다.

 

   여장을 정리하여 아침 10시에 산행을 시작했다. 정상까지 2.1km이다. 보덕사의 바로 옆으로 난 등산로는 아직 눈이 하얗게 덮여 있다. 서울 근교의 산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만큼 서울에서 북쪽으로 온 것이다. 하지만 아이젠을 착용하고 걷는 길은 여유가 있다. 지난 주중에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주말에는 추울 거라고 해 다소 걱정을 했는데, 그게 다 기우였다. 바람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파란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여 마치 가을하늘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파란 하늘과 흰 눈의 조화가 너무 멋지다.

 

파란 하늘과 흰 눈.jpg

  

  시간이 지나면서 한 명 두 명 두꺼운 겉옷을 벗어 배낭에 넣기 시작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지나온 뒤로 포천 시내가 보인다. 하얀 눈길을 걸으니 설산(雪山) 산행임이 분명한데, 힘들기는커녕 소풍 나온 듯 미음완보(微吟緩步)함은 산신령이 안겨 준 행복인가. 왕의 행차인들 이보다 나을 게 무엇 있으랴. 왕방산을 찾아 산천경개를 즐기는 이 순간의 우리 모두가 바로 왕이 아닐까.

 

   법원산악회의 산행이 대개 그러하듯이 오늘도 산을 통째로 전세 낸 양 다른 등산객을 만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정상 바로 밑의 헬기장이다. 시산제를 지낼 장소로 물색하여 둔 곳이다. 역시 눈이 하얗게 덮여 있다. 출발한 지 불과 한 시간 만에 도착했으니 순조로운 산행이다.

 

   다른 많은 산들의 헬기장과는 달리 이곳은 꽤나 넓다. 거의 작은 운동장 수준이다. 무언가 다른 용도로도 사용되는 것 같다. 주위를 살펴보니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다. 그러면 그렇지. 그 정자(왕방정, 王方亭)에 올라가자 포천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멋진 조망이다. 그 뒤로 멀리 운악산, 연인산도 보인다.

 

왕방정.jpg

 

  시산제는 통상 하는 대로

 

1.개회 선언--> 2. 산악인 선서(모든 회원)--> 3.강신(降神)[초혼문(招魂文) 낭독. 회장]--> 4. 참신(參神)(모든 회원 3배)--> 5. 초헌(初獻)(첫 잔 올리고 3배. 회장)--> 6. 독축(讀祝)(축문 낭독. 이종구 원로회원)--> 7. 아헌(亞獻)(둘째잔 올리고 3배. 부회장)--> 8. 종헌(終獻)(셋째잔 올리고 3배. 부회장)--> 9. 헌작(獻酌)(모든 회원들 잔 올리고 3배)--> 10. 소지(燒紙)(축문을 태워 하늘로 올려 보냄)--> 11. 음복(飮福)(고시래 후 술과 음식을 나눠 먹음)--> 12. 폐회 선언

 

의 순서로 진행하였다.

 

시산제.jpg

 

    산악인 선서는 이번에 처음 도입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산 이은상선생이 만든 것을 원용하였다.

 

                                   선서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선서.jpg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아무런 속임도 없이,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초혼문은 작년에는 미리 준비하지 아니하여 즉석에서 지어냈으나, 이번에는 미리 준비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 혼 문

 

법원산악회 모든 회원들은 지난 한 해 동안 무사하게 산행할 수 있게 도와 주신 천지신명님과 이 땅의 모든 산신령님께 감사드립니다.

 

초혼문.jpg또한 계사년 올 한 해 동안 무사히 산행을 하도록 보살펴 주시길 기원하옵니다.

 

부족한 정성이지만 성심을 다하여 조촐한 제물을 마련하여 정기어린 이 곳 왕방산 기슭에서 산신령님께 바치오니, 산신령님께서는 인간세상에 내려오시어,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회원들이 지고 올라온 시루떡이 시산제가 끝날 때까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통째로 삶은 돼지머리의 웃는 모습은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이런가.

 

축문.jpg

 

    헬기장에서 왕방산 정상은 지척이다. 역시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다. 저 멀리 북쪽에 보이는 산이 국사봉이고, 그 왼쪽 옆에 보이는 산이 소요산이고, 남서쪽으로 보이는 산이 해룡산 아닐까? 요새 웬만한 산이면 다 있는 전망 안내도가 없는 게 아쉽다.

 

 

   왕방산의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석에는 왕방산이 한자로 “王方山”이라고 씌어 있다. 왜 “王訪山”이 아닐까 하고 의아해했는데, 표지석 옆면에 이유가 적혀 있다. 포천시 지명위원회에서 논의 끝에 “王方山”으로 표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무슨 논의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명의 산객(山客) 입장에서는 기껏 내려오던 의미 있는 좋은 이름을 무미건조한 이름으로 바꾼 게 아쉽다.

 

정상.jpg

 

   정상에서 장기바위를 거쳐 570고지 암봉까지 가는 능선길은 대부분 경사가 밋밋하여 걷기가 편하다. 물론 험한 바위를 만나 오르락내리락 돌아가야 하는 곳도 있고, 양지바른 곳은 이따금 눈이 녹은 곳이 더러 있어 질퍽거리지만, 대개는 눈이 덮인 평탄한 길이라 걷기가 편하다. 겨울산행의 때 아닌 호강이다. 길의 양옆으로는 소나무숲이 우거진 곳이 많다는 것도 특징 중 하나이다. 능선길의 좌측 포천 쪽으로는 대진대학교의 교정도 보인다.

 

   암봉에서 오지재고개까지 내려가는 길(3.4km)은 경사가 다소 급하다. 사실 다른 산 같으면 경사오지재.jpg랄 것도 없는데, 그동안 내내 편하게 걸었는지라 급한 경사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게 다 사람 마음 아닐까.

 

  경사가 급하지 않다 보니 눈은 많은데도 박영극 부회장님이 모처럼 엉덩이썰매용으로 가져온 마대자루가 그 효용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또한 세상살이의 한 단면이리라.

 

  ‘재’도 고개라는 뜻인데, 거기에 다시 고개라는 말을 덧붙인 오지재고개는 포천과 동두천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이다. 또한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왕방산과 해룡산(660.7m)이 갈라진다.

 

   이곳으로 하산하여 보니 커다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등산안내가 아니라 산악자전거길 안내이다. 왕방산은 이쪽 서사면(西斜面)에서 산악자전거타기 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많이 알려진 듯, 그 내용이 적혀 있다.

 

   등산은 왕방산에서 하고, 식사는 소요산 입구에서 함은 신의칙 위반 아닐까. 소담골 식당의 맛있는 등갈비 김치찜과 버섯전골이 그 죄를 사하고도 남는 것을 어쩌랴.(끝)

 

○ 산행일정:

 

07:40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출발

 

09:50 보덕사 주차장 도착

 

10:30 어룡동 갈림길

 

10:50 보덕사 갈림길

 

11:00 헬기장 도착. 시산제 거행

 

12:40 시산제 종료 출발

 

12:45 왕방산(王訪山 737.2m) 정상

 

13:20 장기바위

 

14:10 암봉(570봉)

 

14:20 오지재 고개 도착

 

14:45 목욕탕 도착(코리아 스파월드 031-867-1501)

 

16:00 음식점 도착(소요산 소담골 031-867- 5990 메뉴 : 등갈비 김치찜)

 

17:30 음식점 출발

 

20:00 서초동법원종합청사 도착

 

행정구역도.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