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못한 보물(백덕산)
2013.03.23 21:56
보지 못한 보물
3월 들어 완연한 봄날씨가 이어진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땅속에서 나왔다가 추위에 놀란다는 경칩(驚蟄) 추위도 그냥 통과의례로 지나갔다. 한반도의 아열대화가 확실히 진행되는 모양이다. 창문으로 보이는 우면산의 기슭에는 지난 겨울 내린 눈의 흔적이 하나도 없다. 그곳이 분명 북사면(北斜面)인데도 그렇다. 그러면 강원도의 높은 산도 그럴까?
2013년 3월의 둘째 토요일인 9일, 법원산악회원 31명을 태운 버스가 이 달에도 어김없이 아침 7시 35분에 서초동 법원청사를 출발했다.
목적지는 백덕산(白德山).
강원도 횡성,평창,영월의 3개 군에 걸쳐 있는 해발 1,350m의 높은 산이다. 눈이 많이 오고 전망이 탁 트여서 태백산, 계방산에 이어 요새 새로운 설산등반지로 부상하고 있다. 북쪽 사면으로 흐르는 수계(水系)는 운교리를 지나 동쪽으로 평창강(平昌江)으로 흘러들고, 남서쪽 사면으로 흐르는 수계는 법흥리를 지나 무릉리에 이르러 주천강(酒泉江)으로 흘러든다.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에 들어간다.
토요일인데도 고속도로가 밀리지 않아 안흥까지 쉽게 도착했다. 찐빵마을을 지나 문재터널에 이르니 아침 9시 50분이다. 터널의 이쪽저쪽으로 행정구역이 횡성과 평창으로 갈린다. 등산로는 터널 위로 나 있다. 터널의 해발고도가 830m이니, 이미 거의 북한산 정상(해발 837m)에 올라온 수준이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등산객이 많음을 여실히 말해 주는 게 등산안내도이다. 42번 국도변에 인가가 있는 것도 아닌 곳에 갓길을 넓혀 주차공간을 확보한 후 번듯한 등산안내도를 세워 놓고, 간이 화장실까지 설치하여
안내판의 “산림수도 평창”이라는 말이 허언(虛言)이 아닌 듯하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눈이 이곳은 아직도 지천이다.
출발지에서 구(舊) 42번 국도까지 문재터널 위로 난 등산로는 경사가 급한데 비교적 지대가 낮은 편이라 군데군데 눈이 녹아 질퍽하다. 그 바람에 길이 미끄러워 불과 20여 분 동안에 땀을 흘리게 한다. 높은 산에 왔으니 그 정도의 신고식은 하라는 것일까.
구(舊) 42번 국도에 일행이 다 도착하자 오늘 산행은 산이 높고 눈길이 험한 만큼 다 함께 조심해서 완주하자는 다짐을 하고, 아이젠을 착용한 후 본격적으로 산행에 접어들었다.
다시 급경사 오르막길을 15분 정도 걸으니 곧바로 주능선이다(해발 925m). 바람이라도 불면 땀을 식힐 텐데 미풍조차 없다. 대신 능선길인 만큼 걷기는 훨씬 수월하다. 더구나 눈이 다져진 위로 아이젠을 착용하고 걸으니 미끄럽지도 않고, 돌부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 발걸음이 편하다. 설산등반의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능선길을 따라 20분을 오르면 널찍한 헬기장이다. 시계를 보니 11시 15분.
전망이 확 트이면서 강원도의 웅장한 산세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동쪽으로 가리왕산(해발 1,561m), 서쪽으로 치악산(해발 1,288m), 북쪽으로 태기산(해발 1,261m)이 보인다. 아직은 다 눈으로 덮인 하얀 산들이다.
특히 치악산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모습이 장관이다. 치악산 전체를 조망하기 딱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백덕산 정상까지는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길이다. 곳곳에 단애(斷崖)를 이룬 기암괴석과 송림이 어울려 있다. 변산반도의 채석강처럼 책을 켜켜이 쌓아놓은 듯한 바위들도 있다. 먼 옛날 바다 속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위태롭게 서 있는 나무도 바다 속에서 함께 나왔을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아무튼 대단한 생명력이다.
사자산은 원래 산 밑의 법흥사가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파의 본산이었던 관계로 그렇게 불렸다고도 하고, 통일신라시대 법흥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사리를 지금의 적멸보궁으로 모셔오면서 사자를 타고 왔다 해서 사자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사자산은 사재산(四財山)으로도 불린다. ‘東淸, 西蜜, 南土, 北蔘’(동쪽에 석청꿀, 서쪽에 옻, 북쪽에 산삼, 남쪽에 먹는 흙인 전분토)의 즉 4가지 보물(四財)이 있어 이 산에서는 흉년에도 굶어 죽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져와 거기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런데 그 보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오히려 누구도 보지 못하는 보물이기에 더더욱 가치가 빛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공인된 지도상으로는 분명 구별이 되지만, 불가에서는 백덕산을 사자산이라고도 지칭하므로, 과연 어느 게 백덕산이고 어느 게 사자산인지, 과연 그런 구별이 가능한 건지 부처님만 아시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초봄의 산객에게는 무사 산행만이 주된 관심일 뿐이다. 100가지 덕을 갖춘 백덕산(白德山)이나 네 가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재산(四財山)이나 범상치 않은 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두 이름을 섞어서 불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백덕산 정상으로 가는 능선과 사자산으로 가는 능선이 감싸 안은 남쪽 사면 아래쪽으로 법흥사계곡이 펼쳐진다. 법흥사로 내려가는 등산로도 있다.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5대 적별보궁(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함백산 정암사, 영축산 통도사)의 하나인 유서 깊은 절이다. 오래 전에 5대 보궁 순례길에 나서 두 번 들렀던 기억이 새롭다.
전국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사찰이 많다. 그 중 불상을 모시지 않고 법당만 있는 불전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부른다. 적멸보궁은 ‘온갖 번뇌망상이 적멸한 보배로운 궁’이라는 뜻이다.
30분 정도 걸리는 당재까지 가는 길도 군데군데 양지 바른 곳은 눈이 녹아 질퍽한 곳이 있다. 자연의 섭리가 대단한 것이 능선길을 경계로 하여 북쪽 사면은 겨우내 내린 눈이 전인미답의 상태로 그대로 있고, 해가 드는 남쪽 사면은 다 녹아 흔적도 없다. 마치 능선길에 자를 대고 금을 그어 놓은 듯하다.
인간의 힘이 아무리 대단한들 이 큰 산에 이처럼 경계를 지을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잘났다고 큰소리 쳐도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낱 왜소한 미물일 따름이다.
그렇게 쉬엄쉬엄 20여 분을 가노라니 작은 당재(비네소골 안부)이다. 이곳에서 북쪽(왼쪽)으로는 비네소골로 내려가고 남쪽(오른쪽)으로는 법흥사계곡의 관음사로 내려간다.
어느덧 오후 1시가 넘었다. 강영석 총무가 시간이 늦었다며 이곳에서 점심을 먹자고 한다. 하긴 배가 고프다. 그런데 골바람도 많이 불고 평탄한 곳도 없어 많은 식구가 둘러앉기가 부적절하다. 박연춘 부총무가 20분만 더 가면 식사하기 좋은 곳이 나온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모두들 민생고 해결이 급해서일까 오르막길을 한걸음에 내달아 동쪽 먹골 방면 능선이 갈라지는 삼거리(해발 1275m)에 도착했다. 바람도 없고 공터가 널찍하여 식사하기 제격이다. 배가 얼마나 고팠으면 다들 허덕이는 모습이 안쓰럽다. 시간 조절에 실패한 회장의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 지나가던 등산객이 한 마디 한다. 500m만 가면 정상인데, 갔다 와서 밥을 먹지 그러냐고.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점심식사를 더 늦추었다가는 민란이라도 일어날 판이다. 특히 오늘 처음 나온 이영훈 부장은 배가 너무 고파 사색이 다 되었다. 실정을 몰라 아침을 제대로 안 먹고 온 것이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후다닥 밥그릇을 비우고 났을 때의 포만감을 어찌 필설로 다하랴. 산에서 먹는 매생이국이 정말로 별미이다. 일부러 준비하여 보온병에 담아온 김비서관의 정성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 와중에도 서울대학교 교문을 빼닮은 나무가 한 그루 있어 나그네의 발길을 부여잡는다.
전자가 후자를 닮은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수령을 짐작하건대, 이 나무가 먼저 현재의 모습을 띠고 나중에 서울대학교 교문이 생겼으리라. 설마 교문의 설계자가 이 나무를 본떠 설계했으랴마는, 너무나 닮은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오후 2시 25분,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백 덕산 정상은 불과 4~5평 넓이의 암봉이다. 영월군에서 표지석을 세운 것으로 보아 행정구역상으로 영월에 속하는 모양이다. 높은 산의 정상치고는 참으로 비좁아, 발을 잘못 옮기면 천길 아래로 추락할 위험이 있다. 때문에 단체로 증명사진 한 장 찍기에도 아슬아슬하다. 그 대신 좌우로 가리는 게 없으니 전망은 환상적이다. 강원도의 고산준령들이 사방에 빙 둘러 있다. 동쪽의 가리왕산과 북서쪽의 사자산, 그리고 그 밑으로 이어지는 구봉대산(해발 870m)는 알겠는데, 나머지 산들은 이름을 모르겠다.
산, 산, 산....
그 많은 산들을 다 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나, 그래도 널리 이름이 다 알려진 산들, 아니 하다 못해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들을 생전에 다 오를 수 있다면...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가듯 점점 삶이 점점 황혼으로 접어드는 판국에 허망한 욕심일 뿐이다.
산에 오르면 각종 아리랑을 구성지게 부르는 서울가정법원의 정성희 과장이 이번에는 조지훈선생의 시 ‘완화삼(玩花衫)’을 읊는데(싯귀 중 ‘차운산’을 백덕산으로 바꿔서 읊었다) 예사롭게 들리지 않음은 자격지심의 발로일까. 앞으로 칠백리를 가기에는 한양나그네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이 너무 짧다.
차운산 바위 위에 구름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
정상에서 내려와 점심식사를 했던 먹골삼거리로 되돌아왔다. 먹골로 내려가기 위해서이다. 정상에서 지체한 시간이 너무 길어 하산시간이 촉박하다고 강영석 총무가 재촉한다.
헬기장을 지나 내리막길의 경사가 어느 정도 되는 곳에서는 많은 눈 덕분에 엉덩이썰매를 즐길 수 있다.
용감한 이혜영 과장이 먼저 시범을 보인 뒤를 따라 길에 주저앉으니 하산이 순식간이다. 덕분에 아픈 다리도 휴식을 취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따로 없다. 그렇게 걷고 타고를 30분 하다 보면 먹골 안부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능선과 작별하고 북쪽 먹골계곡으로 내려선다.
빽빽한 전나무숲을 지나 임도를 가로지르면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온다. 봄이 오는 소리이다. 겨우내 내린 눈이 조금씩 녹아 그 물이 모이고 모여 계곡수를 이룬 것이다. 계곡을 거의 다 내려올 때쯤이면 그 물이 도랑을 이루어 콸콸 흐른다. 마치 여름에 큰 비가 온 후 같다.
“깊은 산 골짜기 작은 물방울 하나 떨어져
내를 이루고,
작은 내 모이고 모여 큰 강을 이루네”
오후 4시 30분. 예정보다 1시간 정도 늦게 하산을 마쳤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가 산행의 피로를 풀라고 데려다 준 원주 시내의 ‘웰빙 24시 불가마사우나’는 보는 이의 입이 벌어지게 한다. 거대한 건물 전체가 목욕탕이다. 그런 곳에서 40분만에 나오려니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지난 달 시산제 당시에 갔던 동두천의 목욕탕도 그러더니, 중소도시의 목욕시설이 서울보다 훨씬 좋고 저렴하다는 데 놀란다.
목욕 후에 찾은 ‘이금옥 손두부’ 식당의 손으로 만든 두부 맛 또한 일품이다. 산이 좋은가, 물이 좋은가, 음식이 좋은가.... 왜 기를 쓰고 서울에서만 살려고 한담.
돌아오는 길에 안흥에 들러 ‘심순녀할머니집’에서 안흥찐빵을 사 회원들에게 한 상자씩 나눠 주는 것으로 오늘 시간 조절에 실패한 미안함을 달랬다. (끝)
(산행코스)
문재터널-옛 42번 국도-주능선(925봉)-헬기장-1120봉 삼거리-당재-작은 당재(비네소골 안부)-1275봉 삼거리-백덕산 정상-1275봉 삼거리-동릉-헬기장-터골(먹골)갈림길 안부-먹골-호헌교
총연장 : 11.3km
산행시간 : 6시간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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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사진을 한 번 보고 난 후로 '책'보는 마음을 멀리하고 한 번 보면 두 번 보고 싶고,두 번 보면 세 번 보고 싶군요.
고맙습니다.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두꺼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