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구조조정

2010.02.16 10:57

범의거사 조회 수:15842

(목요일언)

                            어느 구조조정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민사소송법 제292조 2항).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서'합니다"(형사소송법 제157조 2항).

"거짓말이 있으면"은 "거짓말을 하면"으로 바꿔야 語法에 맞을 것같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다. 맹세의 語源이 맹서(盟誓)인지, 아니면 맹세의 사투리가 맹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째서 민사소송의 증인으로 나온 사람은 "맹세"를 하는 데 비하여, 형사소송의 증인으로 나온 사람은 "맹서"를 하여야 하는 것일까?

  法은 우선 상식에 부합해야 설득력이 있다. 法은 법률가들의 말장난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밤낮으로 재판만 하는 판사들조차도 사무분담만 바뀌면 민사재판과 형사재판의 차이 때문에 한동안 헷갈린다. 위에서 들은 예는 그야말로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좀 더 예를 들어보자.
판사가 심증형성을 위하여 똑같은 현장검증을 하였는데도, 이를 민사판결에서 증거로 쓰려면 "검증결과"라고 하고, 형사판결에서는 "검증조서의 기재"라고 한다(둘 다 알기 쉽게 "현장검증에 의하면"이라고 해서 안될 게 무언가).
판사가 자기에게 부족한 전문지식의 보충을 위하여 똑같은 사람에게 감정을 시켜 감정서를 제출 받아 놓고는, 이를 증거로 쓸 때 민사판결에서는 "감정결과"라고 하고, 형사판결에서는 "감정서의 기재"라고 한다(둘 다 "감정인 아무개의 감정에 의하면"이라고 하면 얼마나 알기 쉬운가).

민사재판의 변론 갱신 전에 한 증언은 여전히 "증언" 그 자체가 증거로 되는데, 형사재판의 공판절차 갱신 전에 한 증언은 그것을 기재한 "공판조서의 기재"가 증거로 된다(재판을 하는 판사나 받는 당사자나 모두 아무개의 증언을 증거로 삼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英美式의 배심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법관이 재판을 하는데도 傳聞法則은 형사재판의 金科玉條이다. 그런데 같은 법관이 하는 민사재판에서는 그런 법칙이 있는지 조차 모른다(직업법관에게는 오히려 증거의 증명력 판단이 가장 중요한 話頭가 아닐는지).

증거를 적시할 때 민사판결에서는 "서증"을 먼저 앞세우고 다음에 "증언"을 쓰는 데 비하여, 형사판결에서는 거꾸로 "증언"을 먼저 쓰고 "서증"은 그 다음에 내세운다(어느 것을 앞세우든 그게 무슨 대수인가?). 게다가 똑같은 증인의 말인데도 민사판결에서는 "증언"이라고 표시하고, 형사판결에서는 "진술"이라고 표시한다.

판결을 써놓고 틀린 곳이 있어 고치려고 하면, 민사판결에서는 그냥 해당부분을 수정하고 訂正印만 찍으면 된다. 그런데 형사판결에서는 해당 부분을 수정하고 訂正印을 찍는 외에 다시 줄 밖에다 "삭3자, 가2자" 식으로 써넣어야 한다(이야말로 그 구별 근거를 설명할 적당한 말을 찾기 어렵다).

항소심에서 제1심판결을 고치려면, 민사항소심에서는 "원판결"을 "취소"하는 데 비하여, 형사항소심에서는 "원심판결"을 "파기"한다[아무리 제1심판결이 마음에 안들기로서니 '찢어서(破) 버린다(棄)'는 살벌한 표현을 꼭 써야 할까, '원판결'과 '원심판결'의 구별은 또 무엇인가].

  그 밖에도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소송법학자들과 그들로부터 대학에서 이론을 배운 판사들은 거창하게 직접주의다, 증거법칙이다, 운운하며 어려운 말을 동원하여 민사재판과 형사재판이 차이가 나는 이유를 설명하려 들지만, 재판을 받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도대체 무엇이 다른지 알 길이 없다.

  뉴욕에서 사용하는 1달러 지폐는 로스앤젤레스에서도 그대로 1달러 지폐인데, 뉴욕의 법률은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이쯤 되면 도대체 법은 국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법률가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가(For whom does the law exist? For the people, or for the lawyers?) 하는 항의성 소리가 미국에서 나올 만하고, 그것이 반드시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닐 것이다.

  정말로 달라야 할 것은 달라야 하고 그것을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르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굳이 다르게, 그럼으로써 어렵게 하는 것은 少數 識者層의 횡포일 뿐이다. 툭하면 법률을 뜯어고치는데, 이왕이면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을 하나하나 대조하여 쓸 데 없이 다르게 되어 있는 부분들을 통일하는 작업을 하여 보는 것은 어떨까? 요새 유행하는 구조조정을 법률가들도 한 번 해 볼 수는 없을까? (1998. 6. 25.자 법률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