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卽是空(오대산)

2010.02.16 11:27

범의거사 조회 수:6630


                         色卽是空

   

사또님,

   나른함이 더해 졸리운 오후입니다. 지난 주말(6/12-6/13)에 五臺山을 다녀 온 피로가 가시지 않음인가요? 不然이면, 재미도 없는 법원실무제요(형사편) 原稿를 검토하려니 흥이 나지 않음인가요? 1학기 강의가 끝나고 나니까(다음 주부터 보름 동안 시험을 보지요. 연수생들에게는 실로 잔인한 달입니다. 지금 시보로 나가 있는 2년차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시험기간을 단축시켜 달라는 것이었지요) 의욕상실증에 걸려서인가요?
   耳順을 바라보는 때에 이르러서도 왕성한 事慾을 자랑하시는 분을 부러워하고 또 부끄러워합니다. 홍곡(鴻鵠)과 연작(燕雀)의 차이가 아닐는지요?

    언젠가 한 겨울에 힐끗 보고 지난 인연밖에 없던 오대산 月精寺에서 녹음이 우거진 한여름 밤을 보내게 되었음은 또한 무슨 인연일까요.
   실로 오랜만에 찾은 월정사는 제 희미한 기억 속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昨今에 전국 어느 산 속에서나 볼 수 있는 佛事만을 빼놓는다면 참으로 고즈넉하고 안온한 山寺이더군요.  

   대웅전격인 寂光殿의 지붕을 덮은 銅기와는 9년의 세월을 말해 주듯 제법 그럴 듯한 색을 내고 있었고, 그 앞의 8각9층 석탑이 홀로 모진 풍상을 헤쳐 온 지난날을 無言으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7세기 신라시대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는 절이 6.25 동란때 全燒되고 오직 저 석탑 하나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그나마도 2개 층은 돌을 갈아 끼웠다는군요) 승원스님의 말씀에는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전쟁과 문화재는 兩立이 불가능한 것일까요? 1,2차 세계대전을 치른 독일과 불란서에는 문화재만 많던데......  

   비로봉 바로 밑, 左靑龍 右白虎가 만나는 곳의 봉곳한 둔덕에 위치한 寂滅寶宮은 참으로 신비스런 곳이더군요. 01.jpg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신 곳이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좌우의 산세가 한 곳으로 모여들어 찾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숙연해지도록 하였지요. 처음 오는 곳인데도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짐은 前生에 무슨 인연이 있어서일까요?
   깊은 산인지라 이미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였는데도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 것도 작은 경이(驚異)였습니다. 그들은 또 무엇에 이끌려 이곳까지 허위허위 달려 왔을까요?  

   그런데 정작 부처님의 사리가 묻힌 정확한 곳은 누구도 모른답니다.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 곳에 계신 스님 말씀대로 알려졌으면 진작 도난당했을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짧은 소견으로는 알려진들 감히 누가 손을 댈까 싶었습니다. 손을 대는 순간 벼락이 칠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눈에 보이는 것은 곧 없는 것에 다름 아니고, 사리에 집착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아집일진대, 그 곳에 사리가 있고 없고가 무에 그리 중요할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사리에 손을 대는 사람조차도 흔쾌히 용서하고 품에 안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 아닐까요.  

   늦은 시각에도 보살님들이 정성으로 내 주시는 맛갈스런 음식으로 저녁 공양을 한 후, 월정사 입구의 어둠이 짙게 깔린 전나무 숲길을 걷노라니 내가 나무인지 나무가 나인지 모르겠더군요.
   '왜 서울에서 살아야 하나' 하는 통속적인,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자기 기만적 생각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정작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안 하는데, 서울을 떠날 생각이 조금도 없는 서울사람들이 꼭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몇 시쯤 되었을까, 빗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노인봉 등산을 위하여 硏山會員(사법연수원교수산악회원) 8명을 모시고 온 책임감이 깊은 잠을 못 들게 한 것이지요.
   정작 절마당에 나서니, 나그네의 잠을 깨운 것은 빗소리가 아니라 계곡물소리였더군요. 하기야 빗물이 모여 계곡물이 되었을 터이니 그 물이 그 물이지요.
   온 천지가 적막강산에 싸였는데, 혼자 잠 못 이루고 山寺의 마당을 서성임은 무슨 번뇌의 발로인가요?

   다시 자리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하다 새벽 4시 예불시각을 알리는 목탁소리에 결국 털고 일어났습니다.
   도량을 돌며 천수경을 낭송하시는 스님의 청아한 목소리는 저 멀리 산등성이를 넘어가는데, 불전에 꿇어앉은 죄 많은 俗人의 기도소리는 내내 목구멍 안을 맴돌더군요.  

   "오늘 비가 많이 온다는데 무사히 등산을 마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노인봉 등산의 시발점인 진고개 정상에 도착하였을 때는 새벽기도의 보람도 없이 장대비가 쏟아지고 짙은 雲霧에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습니다.
   아쉬운 발걸음을 小金剛 입구로 돌려야 했고, 결국 그곳에서부터 구룡폭포까지 소풍을 다녀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금강산을 가보지 않아 잘 모르겠으나, 작은 금강산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게 빗속에서도 경치가 참으로 빼어나더군요. 硏山會에 있는 동안에 진짜 금강산을 다녀올 수 있을는지요? 소(牛)도 가는 마당인데....  

   성불하소서.
   나무관세음보살.

          1998. 6. 17.                                          
             범의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