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亦快哉行(불역쾌재행) 제1수
2019.12.11 17:43
跨月蒸淋積穢氛(과월증림적예분)
四肢無力度朝曛(사지무력도조훈)
新秋碧落澄寥廓(신추벽락징요곽)
端軒都無一點雲(단헌도무일점운)
한 달 넘게 찌는 장마에 퀴퀴한 기운 쌓여
팔다리 나른하게 아침저녁 보냈는데
초가을 푸른 하늘 툭 터져 해맑으니
끝까지 바라보아도 구름 한 점 없구나.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 1762-1836)의 不亦快哉行(불역쾌재행) 총 20수 중 제1수이다.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비평가 성탄(聖嘆) 김인서(金仁瑞. ?-1661)가 '不亦快哉'(불역쾌재)라는 제목 아래 33가지 유쾌한 일들을 짤막한 산문으로 지었다. 예컨대,
"병 속에 가득한 물 콸콸 쏟아놓듯, 등 뒤에서 자제들이 책을 줄줄 외워댄다면, 이 또한 유쾌하지 아니한가".
"겨울밤에 술을 마시고 있는데도 추위가 점점 더 심해져, 이상하다 싶어 창문을 열자 손바닥 만한 함박눈이 쏟아져 서너 치나 쌓여 있으니, 이 또한 유쾌하지 아니한가"
같은 것이다.
김성탄의 이 '불역쾌재(不亦快哉)'가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히자, 다산 정약용도 이를 본따 자신이 생각하는 유쾌한 일들을 스무 수의 시로 읊었는데, 위 시는 그중 첫번째이다. 스무 수의 시마다 마지막은 '不亦快哉(불역쾌재. 이 또한 유쾌하지 아니한가)'로 끝난다.
강진에서의 기나긴 유배생활 중에도 이런 즐거움을 표현한 다산의 경지가 놀라울 따름이다.
*2019년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