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목구어(緣木求魚)

2020.04.05 14:59

우민거사 조회 수:279


오늘(2020. 4. 4.)이 청명(淸明)이고, 내일이 한식(寒食)이다.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봄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매화, 벚꽃, 산수유....
앞을 보고 뒤를 보아도,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보아도,
땅을 보고 하늘을 보아도,
온통 백화제방(百花齊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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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춤을 추다 보니 온갖 꽃이 한꺼번에 피어 저마다 자태를 뽐낸다.
“날 보러 와요~”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다.
거기에다 행여 봄날이 아니랄까 봐 바람까지 옷깃을 날리게 한다.
적어도 시절만큼은 말 그대로 호시절이다.


이른 아침 창문을 두드리는 새 소리에 눈을 떠 마당에 내려서니

벚꽃이 바람에 날려 적잖이 떨어져 있다.
빗자루를 들고 쓸려다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간밤에 불던 바람에 만정(滿庭) 벚꽃 다 지거다
노옹(老翁)은 비를 들고 쓸으려 하는구나
낙환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 하리오.
 
촌노(村老)가 조선 숙종 때의 문인 정민교(鄭敏僑. 1697-1731)가 지은 시조를 표절했다고 해서 누가 시비 걸 일이 있으랴. 


마당 쓰는 것을 단념하고 금당천(金堂川)가로 나섰다.
아직은 냉기가 남아 있지만 아침 공기가 상쾌하기 그지없다.

인적 없는 한적한 시골의 이른 아침 개울가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돌아다닐 일은 없을 터이니,

번거롭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


청명지제(淸明之際)의 갯가에서 홀로 거니는 촌부를 그래도 반기는 게 있다.

눈 녹은 개울에 소리 내어 흐르는 물소리,

연초록색을 띤 버들,

그리고 물 위를 나는 백로가 바로 그것이다.

비록 간밤에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눈에 띄게 물이 불은 금당천의 아침풍경이 촌부가 포기한 아침잠을 넉넉하게 보상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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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포은(圃隱) 선생의 싯귀가 들려오는 듯하다.


春雨細不滴(춘우세부적)
夜中微有聲(야중미유성)
雪盡南溪漲(설진남계창)
草芽多少生(초아다소생)


     봄비가 가늘어 내리는 듯 마는 듯하더니
     밤중에 작은 소리가 들려오누나
     눈 녹은 남쪽 개울에 물이 불으니
     새싹이 여기저기 돋아났구나
               -- 정몽주(鄭夢周)의 시 “春興(춘흥)”---


자연을 벗 삼아 유장하게 지내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런 면에서 현대인들, 특히 대처에 사는 사람들이 늘 시간에 쫓겨 종종거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안타깝다.

시간은 ‘나는 것이 아니라 내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으면 좋으련만...


그나저나 갯가의 저 버들 사이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혹시 홍랑(洪娘)의 영혼이 아닐까.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바야흐로 1574년 봄이다.

   함경도 경성(鏡城)에서 북평사(北評事)로 있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은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먼 변방의 외직으로 떠돌다 한양의 내직으로 영전하는 최경창이야 영광일지 몰라도, 그가 경성에 머문 두 해 동안 그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었던 관기 홍랑에게는 슬픈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홍랑은 이별이 못내 아쉬워 영흥(永興)까지 따라가 배웅한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관령(咸關嶺. 함흥 밖 70리에 있다)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는데, 마침 봄비가 내려 수심(愁心)을 더욱 자극한다. 홍랑은 그 애절한 감정을 시조 한 수에 담아 버들가지와 함께 최경창에게 보낸다.


   그 시조가 바로, 촌부의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고,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가 우리 시조 사상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했다는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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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류춘풍(細柳春風)이다. 

   신록이 찾아온 버드나무에 봄바람이 부니 늘어진 가지들이 이리저리  춤을 춘다. 그  모습이 마치 연두색 주렴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 같다. 그 버드나무의 가지가 멀리 낭군을 떠나보내며 꺾어준 사랑의 징표가 된 연유는 무엇일까.

   봄에 잎이 빨리 나는 버들가지의 신록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4월 초순의 고작 한 주간뿐이다. 그버들의 신록처럼 청춘도 덧없이 짧으니, 속히 돌아오라는 간곡한 뜻이 담긴 것이다.
 
  한양으로 돌아간 최경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전해 듣자, 홍랑은 2천리나 되는 머나먼  길을 이레 동안 밤낮으로 달려 한양에 도착한다. 그리고  지극정성으로 최병창을 간호하여 그의 병을 낫게 한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그 때가 마침 명종비 인순왕후(1532–1575)의 국상 중이었는지라, 이런 일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자 최경창은 삭탈관직당하고 홍랑은 경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번에는 최경창이 홍랑을 배웅할 차례이다. 그는 홍랑의 위 시조를 한역(漢譯)한 시를 그녀에게 건넨다.
 
折楊柳寄千里人(절양류기천리인)
爲我試向庭前種(위아시향정전종)
須知一夜新生葉(수지일야신생엽)
憔悴愁眉是接身(초췌수미시첩신)


그리고 자신의 애끓는 석별의 정을 담은 시를 한 수 읊는다.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말없이 마주 보며 그윽한 난(蘭)을 건네나니
   이제 하늘 끝 저 멀리로 떠나고 나면 언제나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말게
   지금도 비구름에 첩첩 청산이 어두울 테니


   훗날 최경창이 죽어 파주 땅에 묻히자, 홍랑은 다시 달려와 그의 묘 옆에 초막을 짓고 9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창의 유고(遺稿)를 거두어 경성으로 피난하는데,  최경창의 시를 모은 "孤竹 詩集"이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순전히 그 덕분이다.

   홍랑은 세상을 떠난 후 최경창의 묘 발치(시묘살이 하던 초막이 있던 곳 아닐까)에 묻힌다. 후생에서나마 그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그녀의 무덤 앞에 있는 고죽시비(孤竹詩碑) 뒷면에는 위에서 본 “묏버들...” 시조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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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창의 묘(상), 홍랑의 묘(하)와 최경창 시비. 자료 사진]


홍랑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금당천변은 대부분의 구간이 물가의 나무와 풀들이 어우러져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에 참으로 좋은데,

한 구간 국회의원 선거 현수막이 난무하는 곳이 있어,

이곳을 지나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진다.


의료진의 눈물 나는 헌신적인 노력과

밤낮을 가리지 않는 택배기사들의 노고,

그리고 심성 고운 국민들의 질서의식 덕분에

세계적인 코로나의 광풍 속에서도 나라가 굳건히 지탱되고 있건만,

그 공이 마치 자기들 덕인 양 분칠하는 위정자들을 보면서,

투표소에 들어가는 유권자들이 과연 옥석을 가려낼 수 있으려나 걱정이 앞선다.


70%의 국민에게 1인당 100만 원의 긴급재난지원금을 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그간의 실정(失政)이 과연 가려질 수 있을까.

100만 원도 좋으나, 제발 이제라도 ‘문 열어놓고 모기 잡는 일’만은 그만두면 좋겠다.

그것이 정녕 물정 모르는 촌자(村者)의 어리석은 생각이런가.       


‘정권 밀어주기’든 ‘정권 심판’이든,

이번 4.15 총선에서는 ‘정권’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는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여 본다.

이 또한 연목구어(緣木求魚)이고 일장춘몽(一場春夢)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