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비홍수(綠肥紅瘦)
2020.05.10 22:53
매년 봄이면 한반도로 날아드는 황사, 중국발 미세먼지로 고통을 겪었는데, 올봄에는 신기할 정도로 하늘이 청명하기 그지없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중국의 공장들이 멈춘 덕에 미세먼지가 현저하게 줄어든 까닭이다. 그런데 미세먼지가 아닌 황사까지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워 안 생기는 건가? 모를 일이다.
하늘이 맑은 것은 좋으나, 한동안 비 구경하기가 어렵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봄 가뭄이 찾아오나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도 금요일 저녁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반가운 비가 아닐 수 없다. 모내기가 한창인 농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 비가 토요일 내내 흩날리고 바람까지 불었다. 바람이 이렇게 불면 꽃들이 다 떨어질 텐데, 어쩌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개구리 울음소리만 들리는 우거(寓居)의 밤이 삼경(三更)을 넘어 깊어 가는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꽃이 질까 새삼 걱정하며 잠 못 이루는 것은 또 무어람.
하릴없이 시집을 들척이다 한 곳에서 손길이 멎었다.
昨夜雨疏風驟(작야우소풍취)
濃睡不消殘酒(농수불소잔주)
試問捲簾人(시문권렴인)
卻道踯躅依舊(각도척촉의구)
知否,知否(지부, 지부)
應是綠肥紅瘦(응시녹비홍수)
간밤에 비 뿌리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지
깊이 자고 났건만 술기운이 아직도 남아있네그려.
발 걷는 아이에게 물었더니
철쭉은 그래도 여전하다고 하는구나
이런, 이런, 뭘 모르네
녹음은 짙을지라도 붉은 꽃은 시드는 것을.
[여몽령(如夢令)의 원문에는 ‘철쭉(踯躅)’이 아니라 ‘해당화(海棠)’로 되어 있다]
이청조(李淸照. 1084-1151?)가 지은 ‘여몽령(如夢令)’이라는 작품이다. 엄밀히 말하면 시(詩)가 아니라 사(詞)이다. 당나라 때의 시가 운율을 엄격히 따진 데 비하여 송나라 때의 사(詞)는 자유분방하다. 마치 노랫말 같다.
이청조는 옛날 중국의 宋나라 사람으로 중국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손꼽힌다. 여성에 대한 유교적 속박을 거부하고 남자와 동등한 여자의 삶을 추구했다. 그에 걸맞게 호도 이안거사(易安居士)이다.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읊은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100편을 지었다. 이청조 또한 그에 못지않은 술꾼으로 ‘음주 시인’이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시인의 옆에는 늘 술이 따라다닌 것이 아닌지.
천고제일재녀(千古第一才女)로 일컬어진 그녀는 음악, 회화 그리고 금석학에도 일가견을 가진 팔방미인이었다.
위 시를 좀 더 감상해 볼거나.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바뀔 즈음의 비바람이 부는 밤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비가 내리는 밤이니 시인은 술맛이 더 난다.
얼마나 마셨을까,
술김에 푹 자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술기운이 아직도 남아있다.
불현듯 걱정이 앞선다. 간밤에 비바람이 몰아쳤는데, 철쭉이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을까?
궁금하여 발 걷는 아이에게 물었더니 대답이 심드렁하다. '그대론데요.'
에이, 네가 뭘 모르는구나.
초록 잎은 무성해도 꽃은 보나마나 다 지고 말았을 거야.
바야흐로 짙어져 가는 녹음에 반비례하여 붉은 꽃들은 시들어 떨어지는 시절 아니냐.
‘綠肥紅瘦(녹비홍수)’라는 말이 이 시에서 유래했다. ‘초록색은 짙어지고 붉은색은 줄어든다’는 뜻으로,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면서 녹음이 짙어지는 대신 그에 반비례하여 꽃들은 시드는 것을 나타낸다. 떠나는 봄을 절묘하게 요약한 시인의 이 한마디는 봄의 끝자락을 형용하는 성어가 되었다.
판소리 단가 ‘사철가’에 나오는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와 일맥상통한다.
촌부도 시인을 흉내내 아침 일찍 창문을 여니, 간밤에 몰아친 비바람에 지다 남은 철쭉들이 물을 잔뜩 머금은 채 애처롭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호, 우거져 가는 녹음 속에 아직도 몇몇은 보란 듯이 남아있구나. 그래, 며칠 못 가겠지만 그때까지 만이라도 가는 봄을 잡아두렴.
벌써 닷새 전(5일)이 입하(立夏) 아니었더냐.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그 위로 겹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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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으니까 더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