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변했나 내가 변했나(치악산 2)
2021.03.03 15:57
내가 변했나 강산이 변했나
2021. 1. 30.
치악산을 다시 올랐다.
1979년 여름에 초등(初登)하고,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1998년 여름에 다시 오른 후,
그로부터 또 다시 23년이 지난 이번에 그 산을 찾은 것이다.
결국 대략 20년 주기로 치악산을 오른 셈이다.
앞의 두 번이 여름 등반이었던 것에 비해, 이번에는 한겨울에 한 설산(雪山) 등반이었다.
이번 산행 즈음에는 대설이 지난 후 날씨가 한동안 포근해 산행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산행 전날(2021. 1. 29. 금요일)에 아침 기온이 영하 12도 아래로 곤두박질치더니, 그 추위가 주말로 이어진 데다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가 예보되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산행을 포기할 일은 아니었다. 산행 도반인 히말라야산악회의 박영극님, 오강원님, 박재송님이 모두 등산 베테랑분들이기 때문이다.
[등산 개념도]
산행코스는 안흥의 부곡리 기점에서 오르는 길을 택하였다. 상원사 코스나 구룡사 코스처럼 잘 알려진 코스가 아니라 등산객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부곡리의 탐방지원센터 앞 공터는 등산객들이 타고 온 차들로 꽉 찼다(모두 20여 대 정도 주차할 수 있다).
[부곡탐방지원센터]
[부곡탐방로 입구]
오전 10시 30분에 산행을 시작하여 정상인 비로봉에 올랐다가 그 올랐던 길을 되돌아 내려왔는데 6시간 걸렸다(왕복 9.2Km).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에 해발 1,288m나 되는 높은 산을, 그것도 겨우내 내린 눈이 수북이 쌓인 것도 모자라 산행 당일에도 눈보라가 친 마당에 6시간 만에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산행길이 힘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터넷에 검색하여 보면, 부곡리 기점 산행이 비로봉을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그 말대로였던 셈이다.
1979년에 구룡사 쪽에서 올랐을 때나, 1998년에 상원사 쪽에서 올랐던 때 모두 길을 잃고 헤맸던 기억이 새로운데, 이번에는 처음 가는 코스임에도 설경을 제대로 감상하며 큰 힘 들이지 않고 산행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산행이 마냥 쉬웠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치를 떨며 악을 쓰고’ 오를 일은 없었다.
아무튼, 등산객이 많지 않아 등산로가 호젓한 데다, 상고대와 설화(雪花)가 제대로 핀 설경이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여 금상첨화였다. 게다가 하늘을 뒤덮은 구름으로 잔뜩 흐린 날씨가 역으로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북풍한설(北風寒雪)이 이따금 귓전을 때리고 지나갔지만, 한겨울의 설산 등반에 그 정도마저 없다면 오히려 싱거웠으리라.
이럴 때 운치를 더해 주는 시 한 수가 없어서 되겠는가. 조선 중기의 문신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시 “新雪(신설)”을 펼쳐본다.
天上新成玉樹宮(천상신성옥수궁)
雲斤月斧役群工(운근월부역군공)
紛紛落雪隨風下(분분낙설수풍하)
粧點人寰一色同(장점인환일색동)
하늘나라에 옥수궁을 새로 짓느라
장인들이 구름 도끼와 달 도끼를 들고 애쓰노라니
부서진 옥가루가 눈이 되어 바람 타고 어지러이 떨어져
인간 세상을 한 가지 색으로 온통 같게 단장했네
하늘나라의 목수들이 옥황상제가 거처하는 궁궐(=옥수궁)을 새로 짓느라 도끼로 나무를 깎다 보니 그 때마다 옥가루가 날린다. 그리고 그것이 바람을 타고 분분히 내려와 인간 세상에 떨어져 쌓이니 온 천지가 흰색으로 물이 들었다.
길도, 바위도, 나무도... 눈에 띄는 것은 모두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그런데 그 눈이 옥수궁 짓느라 휘날린 옥가루였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실로 시인의 상상력에는 끝이 없다.
그나저나 옥황상제 덕분에 촌부는 설국(雪國) 구경을 제대로 했다. 감사할 일이다.
비록 잘 알려진 코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국립공원답게 경사가 급한 곳은 빠짐없이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오르내림에 지장이 없고, 중턱의 헬기장으로 보이는 공터는 쉬어가기에 딱 좋다.
산행을 시작하여 3시간 걸려 비로봉 정상에 도착하였는데, 몹시 찬 바람을 동반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잔뜩 흐려 명물인 돌탑마저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산 아래쪽 경치가 전혀 안 보였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정상의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했다. 아무리 춥고 악천후라도 산을 오를 사람은 다 오르는 것이다. 그들의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비로봉 정상]
다른 길이 없다든가 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올라온 길로 되돌아 내려간다는 것은 산꾼에게는 금기사항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비로봉에서 하산하면서 ‘황골삼거리’를 거쳐 ‘곧은재’를 지나 하산하는 코스를 택할까 잠시 고민하였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 멋진 경치를 많이 감상할 수 있는 대신 바로 되돌아 내려갈 때보다 1시간 정도 더 걸린다는 것이다.
눈보라가 치는 잔뜩 흐린 날씨에 그리 하는 것은 다소 무모한 짓 같아 단념하고 올라온 길로 되돌아 내려가기로 했다. '곧은재’ 길은 후일을 기약했지만, 과연 실현될 날이 올지 모르겠다. 60대의 후반으로 들어선 나이를 생각하면 말 그대로 일모도원(日暮途遠)이다.
흐르는 세월을 어쩌랴. 오호통재(嗚呼痛哉)일 따름이다.
하산하는 도중에 오후 3시 무렵부터 하늘이 맑게 개고 해가 쨍하고 빛났다.
“이런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곧은재 쪽으로 하산하는 건데...”
뒤늦게 아쉬워하지만 도리가 없다. 하늘의 조화를 어찌 미리 알랴. 대자연 앞의 인간은 한낱 미물일 따름이다.
하산 후 안흥에서 그 유명한 안흥찐빵을 샀다. 1998년에 처음 접했던 추억의 빵이다. 그러나 이 빵의 원조인 심순녀 할머니 집에서 샀건만, 옛날의 그 맛이 아니다. 빵이 변한 건가, 내가 변한 건가. 아니면 강산이 변한 건가. (끝)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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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거사
2021.03.0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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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거사
2024.04.03 14:43
2024. 3. 30. 치악산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봄 등반이다.
춘분도 지나고 봄의 한가운데이건만,
나날이 예측 불가의 형태를 보이는 날씨 탓에 치악산은 아직 봄이 오는 길목에 있었다.
산에서 볼 수 있는 꽃은 생강나무꽃이 유일했다.
다른 나무들은 이제 겨우 꽃봉오리가 생기려고 몸짓하고 있었다.
반면에 춘분날에도 최고 26.2cm의 눈이 내린 강원도의 산답게, 계곡에는 눈 녹은 물들이 소리 내서 흐르고 있었다.
곳에 따라서는 여름 계곡으로 착각할 정도로 물이 넘쳤다.
등산코스는 3년 전 설산 등반 때와 마찬가지로 안흥의 부곡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택했다.
이번에는 정상인 비로봉에 올라 능선을 따라 ‘곧은재’까지 간 후 그곳에서 출발지로 바로 하산하는 원점회귀형 방식을 취하려고 했는데,
비로봉에서 곧은재까지의 구간이 산불방지를 위한 입산통제구역으로 정해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지난번처럼 비로봉에 올랐다가 그 올라간 길을 도로 내려왔다.
비로봉에서 사다리병창을 거쳐 구룡사 쪽으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그야말로 ‘치를 떨고 악을 써야 하는’ 험한 길인지라 애당초 염두에 두지 않았다.
부곡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는 등산로는 치악산 등산코스 중에서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하는데,
안흥의 출발 기점까지의 접근성이 떨어져 산객이 많지 않다.
이날은 올라갈 때는 그나마 사람들이 있었으나,
하산 시에는 인적이 거의 끊겨 산을 통째로 전세 낸 듯했다.
그만큼 산행이 어렵지 않은 데다 호젓해서 금상첨화이다.
전날 황사가 전국을 뒤덮는 바람에 기상청 일기예보에서 외출을 삼가라는 경고를 계속하는 통에 산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걱정을 했는데,
막상 산행 중에는 맑은 하늘을 내내 볼 수 있었다.
다소 차기는 해도 삭풍은 아닌 봄바람이 부는 비로봉 정상은 역시 황사 예보 때문인지 여느 때와는 달리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덕분에 여유를 가지고 주위의 풍광을 시원하게 다 볼 수 있었고, 모처럼 산 정상에 오른 기분을 만끽했다. 덤으로 점심 식사를 산 정상에서 하는 드문 경험도 했다.
이제는 해가 길어 서두를 일이 아니라 미음완보(微吟緩步)로 걷다 보니 총 산행시간이 7시간 30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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