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 먹세 그녀
2021.04.25 09:50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곡우(穀雨)가 지나갔다.
며칠 전의 일이다(4.20.).
하도 세월이 빠르게 가다 보니 ‘어어~’ 하는 사이에 지나간 것이다.
때가 때인지라 금당천변은 개울뿐만 아니라 모내기 준비를 끝낸 논에도 물이 가득하다.
말 그대로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이다.
녹초청강상(綠草晴江上)에 굴레 벗은 말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마냥 정겹고 평화롭기만 하다.
그야말로 만춘(晩春)이다.
물가에 내려앉은 백로를 하릴없이 바라보다 문득 시계를 1년 전으로 돌려본다.
지난해 곡우에는 봉림대군의 시조를 흉내 내 “춘풍이 몇 날이랴 웃을 대로 웃어라”하고 흥얼거리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4.15. 총선 결과를 보고 위 시조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때 전체 의석의 2/3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한 집권당이 ‘아집과 독선에 빠져 폭주’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로부터 1년이 지나는 동안
불행히도 그 걱정이 현실화되어 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아야 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을 몰아내기 위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거듭되는 헛발질,
부동산에 관한 각종 세금폭탄, 소위 ‘임대차3법’으로 인한 전세 시장의 혼란,
캄보디아나 아제르바이잔보다도 못한 코로나19 백신 접종률(OECD 37국 중 35위. 세계 100위권),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청와대 정책실장(김상조)의 위선적인 내로남불....
국정의 난맥상이 계속 이어지는 와중에
오거돈 부산시장,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이 세상에 알려지고,
부산시장의 사퇴와 서울시장의 자살로 인하여 4.7.에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국민은
1년 전의 그 국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집권 여당에 철저하게 등을 돌렸다.
민심은 그렇게 냉정하고 무서운데,
1년 전의 압승과 1년 후의 참패를 맛본 정부·여당이나,
그 반대로 1년 전의 참패와 1년 후의 압승을 거둔 야당의 모습은,
그 어느 쪽을 막론하고 두 선거 직후의 ‘립서비스’를 빼면 변한 게 없다.
강성 지지층에 여전히 발목이 잡혀 한치도 앞으로 못 나가는 여당이나,
당권 놀음에 영일이 없는 야당이나,
그저 하나같이 어린 백성은 안중에도 없고, 오히려 힘들게 할 뿐이다.
늘 민초의 삶을 걱정하는 게 본래 정치의 요체인데,
우리는 반대로 촌부(村夫) 같은 무지렁이조차도 정치를 걱정하며 살아야 하니,
이거야 원....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여니
보름을 며칠 앞둔 달빛이 수양벚나무 사이로 환하다.
그 달에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시조를 빗대어 본다.
내 마음 베어내어 저 달을 맹글고져
구만리 장천에 번듯이 걸려 있어
너섬 한 구석에 비치어나 보리라
(정철 시조의 삼행 첫머리는 “고운 님 계신 곳에‘이다. '너섬'은 여의도의 순우리말)
위정(爲政)을 제발 좀 똑바로 하라고 위정자(僞政者)들에게 소리치고 싶은 게 어찌
이순(耳順)을 진즉에 넘긴 일개 촌노(村老)의 마음뿐이랴.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는 위정자(爲政者)들의 모습을 보고픈 게 정녕 허망한 욕심일까.
욕심이 허망함을 깨달았을 때 옛 시인은 시름을 술로 달랬다는데,
술을 못 마시는 촌부는 어이할 거나.
그냥 그 시인의 마음이나 따라가 본다.
술을 취게 먹고 두렷이 앉았으니
억만 시름이 가노라 하직한다.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시름 전송 하리라.
조선 인조 때 문신 정태화(鄭太和, 1602-1673)가 지은 시조이다.
우의정, 좌의정은 물론 영의정까지 다 지낸 시인의 시름은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그나저나 또 다른 시인의 말대로
‘한 잔 먹고, 또 한 잔 먹고, 꽃 꺾어 산놓고 무진무진 먹으면’
시름을 하직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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