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민(恒民),원민(怨民),호민(豪民)
2021.08.08 11:55
어제가 입추(立秋)였다.
말 그대로 가을의 길목으로 접어든다는 이야기다.
비록 아직은 한낮의 기온이 35도를 오르내리는 찜통더위가 여전하긴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대하는 공기에서는 시원함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올 여름 유난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더위도 때가 되면 물러나게 마련이다.
그게 자연의 섭리다.
그렇게 입추 무렵부터는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기 때문에,
도리 없이 이때부터 가을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김장용 무와 배추를 심어야 한다.
촌부(村夫)도 어제 울안에 무를 심을 밭이랑을 만드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입추는 곡식이 본격적으로 여무는 시기인지라,
예로부터 입추에 하늘이 청명하면 만곡(萬穀)이 풍년이라고 했다.
맑은 하늘과 작열하는 태양 아래 금당천변의 녹색 일변도였던 들판도
서서히 황금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벼가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 쌀이 남아돌아 수매한 정부미를 보관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지경이지만,
옛날에는 익어가는 벼를 보면서 걱정의 한숨을 내쉬는 농민들이 많았다.
추수를 한들, 수탈에 가까운 가혹한 세정(稅政)으로 인해
농민 입으로 들어갈 쌀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흉년이 들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풍년이 되어도 배고픔에 시달렸던 백성들의 원성에 귀 막았던 위정자들을 역사책에서 대할 때면,
도대체 ‘정치라는 게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들에게 백성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당시에도 뜻있는 식자(識者)들은 백성의 무서움을 계속 경고하였지만,
돌이켜보면 위정자(僞政者)들에게는 그것이 마이동풍(馬耳東風)일 뿐이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하릴없이 책장을 넘기다가,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장가로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한 신흠(申欽. 1566-1628)의 문집인 상촌집(象村集) 민심편(民心篇)에 나오는 아래 글귀에서 손이 멎는다.
(중략)
옛날에는 나라를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고(制國有典),
백성을 다스림에 원칙이 있었다(制民有經).
그리고 백성의 부역이나 세금에는 일정한 숫자가 있었다.
그런데 국가의 법도가 무너지고 백성을 다스리는 원칙이 무너지면서,
백성의 조세와 부역이 정도를 벗어나게 되었다.
경상비용이 떨어지면 때가 아닌데도 걷는다.
(중략)
백성은 (온갖 수탈에 시달려도) 오히려 각별히 분수를 지키고 있으니
그 마음이 착하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도 (위정자는)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백성만 탓한다(不自省而咎其民).
이와 같은 자는
백성을 병들게 할 뿐 아니라,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不唯病吾民 亦將以危吾國矣).
무릇 사람의 정리는 이익을 보면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고,
손해를 보면 피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익과 손해의 갈림길에서 백성은 따르거나 등을 돌리게 된다.
오늘날의 백성은 이로운가, 해로운가? 마땅히 따르겠는가, 등을 돌리겠는가?
관중이 말했다.
“자신을 탓하는 자는 백성이 탓하지 못하고,
능히 자신을 탓하지 못하는 자는 백성이 탓한다
(善罪身者 民不得罪也, 不能罪身者 民乃罪之).”
목하 부동산 시장이 난리다.
주지하듯이,
현 정권 들어 20회 넘게 내놓은 부동산 대책은,
제대로 된 공급대책은 없이 세금 폭탄과 대출 규제를 통해
수요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책이 나올 때마다 집값은 더욱 상승했고,
임대차3법은 전·월세 가격만 올려놓았다.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집값과 전·월세 가격으로 부동산 시장이 계속 요동치자,
지난 7월 28일에 경제부총리가 경찰청장까지 배석시켜 놓고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그 요지는,
국민들의 불법거래가 부동산 시장을 왜곡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과도한 기대심리를 스스로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며,
정부는 불법적인 시장교란행위를 연중 엄히 단속하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대출을 더욱 조이겠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깝다.
'이익을 보면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고,
손해를 보면 피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국민들을 어찌 탓하랴. .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백성만 탓하는 자는
백성을 병들게 할 뿐 아니라,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여기서 눈을 허균(許筠 1569-1618)의 호민론(豪民論)으로 돌려본다.
허균은 말한다.
“천하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백성이다(天下之所可畏者 唯民而已).”
허균은 백성을,
순순히 법을 따르며 부림을 당하는 항민(恒民),
모든 재산을 갖다 바치면서 탄식하고 원망하는 원민(怨民),
은밀하게 딴마음을 품고 천지 사이에서 기회를 노리는 호민(豪民)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는 일갈한다.
무릇 하늘이 목민관을 세운 것은 백성을 잘 보살피기 위함이다
(夫天之立司牧 爲養民也).
그런데 제멋대로 눈을 부라리며 횡포를 부리면,
먼저 호민이 틈새를 엿보며 기미를 살피다 팔뚝을 걷어붙이고 소리를 지르고,
그러면 원민이 그들을 따라 한 목소리로 외쳐대고,
이어서 항민도 그 뒤를 잇는다.
그러면서 허균은 그 실례로,
진나라를 멸망케 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한나라를 쇠망케 한 황건적,
당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왕선지(王仙之)와 황소(黃巢)를 보라고 한다.
소름끼치는 이야기다.
물론 21세기의 지금 세상에
진승의 난, 황건적의 난, 황소의 난과 같은 민란이 일어날 리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난들의 근저에 놓였던 민심을 외면할 일은 결코 아니다.
다시 신흠의 위 글로 돌아가 이어지는 다음 글을 보자.
신흠은 말한다.
(중략)
정치에서 우선할 일은 백성의 마음을 순하게 하는 것이다
(政之所先 在順民心).
근심과 노고를 고쳐 편안하고 즐겁게 해 주고,
두려워 피하는 것을 고쳐서 보존하고 안정되게 해 주고,
막히고 잘못된 것을 고쳐서 열리고 풀리게 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만 하면,
민심의 선함은 더 선해질 터이고, 민심의 두터움은 더 두터워질 것이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내년 3월 9일에 치러질 대통령선거가 이제 7개월 남았다.
많은 선남선녀가 ‘나야말로 이 나라를 이끌어갈 적임자’라며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현재로서는 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알 수도 없다.
이 순간 금당천의 한낱 무지랭이 노부(老夫)가 갖는 한 가지 소박한 소망은,
‘백성을 두려워하고, 그 마음을 순하게 하는 정치’를 할 사람이 당선되길
바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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