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으면 희다 하고 희면 검다 하네
2021.10.03 23:50
오늘은 개천절(開天節), 즉 하늘이 열린 날이다.
4,354년 전 단군 할아버지가 이 땅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날이다. 그것을 기념하기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마침 일요일이라 내일까지 대체공휴일로 쉰다.
이처럼 대체공휴일까지 둘 만큼 중요한 국경일인데, 정작 정부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소식은 안 들린다. 대통령은 고사하고 국무총리가 주재한 것조차 없는 모양이다. 그 흔한 기념식이 실종된 것이다.
이쯤 되면 도대체 왜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했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단군동상을 우상으로 치부하고 그 목을 자르기까지는 하는 일부 광신적인 극렬 기독교도들을 의식한 것일까. 아니면 누가 지시라도 했나.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아침에 일어나니 영상 14도였다. 한기를 느끼며 금당천으로 나섰다. 간밤에 갑자기 퍼부었던 소나기는 물러갔지만, 온 천지가 안개로 자욱하다. 말 그대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이면 자주 나타나는 자연현상이다.
그 이유까지 굳이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냥 그 오리무중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따름이다. 한창 무르익은 가을풍경이 참으로 정겹다.
간밤에 내린 비 때문인가, 아니면 한로(寒露. 10월 8일)를 닷새 앞둔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가, 풀잎에 맺힌 물방울이 영롱하다. 그 작은 물방울 속에 들어 있는 온 세상(一微滴中含十方. 일미적중함시방)이 촌부의 눈에는 왜 안 보이는 걸까.
전에 금강 스님께서 일갈하신 적이 있다.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마음조차 혼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어쩔거나.
우리나라 특산식물인 개쑥부쟁이(들국화의 한 종류. 여주 남한강변에 특히 많다)도 “날 좀 보소” 하면서 촌부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어찌 아니 반가우랴.
[개쑥부쟁이]
금당천을 한 바퀴 돌아 울안으로 들어서니 가을 장미가 촌부를 반긴다. 장미는 봄부터 피기 시작하는데, 집사람이 계절별로 피는 시기가 다른 장미를 꽃밭에 골고루 심었기 때문에 가을에도 장미를 감상할 수 있다. 오히려 가을 장미가 더 예쁘고 청초하다. 한편으로는 촌부가 그렇게 느껴서 그런가, 요염하기도 하다. 찬 이슬을 머금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개천절의 이른 아침, 안개 속의 금당천 풍경이나 울안의 이슬 머금은 장미가 촌로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데, 개중에는 불청객도 있다. 다름 아니라 나무들이 거미줄로 칭칭 감겨 있는 모습이다. 거미는 여름 내내 여기 저기 거미줄을 치지만, 특히 이즈음에 극성스럽다. 월동준비라도 하려는 걸까. 혼자만의 생각이다.
그 얽히고설킨 거미줄이 마치 작금의 우리나라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내년 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가뜩이나 각종 의혹들이 난무하는 판국에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성남시 대장동의 개발을 둘러싼 비리 의혹이 연일 신문 방송을 장식한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을 할 수도, 아니 상상할 수도 없는 특혜(비율적으로 말해, 350만 원을 투자하면 40억 원을 벌었다고 한다)를 받았다고 하는 개발업자의 배후가 누구인지, 화천대유와 천화동인의 실소유자가 누구인지,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야당은 ‘이재명 게이트’라고 주장하고, 여당은 오히려 ‘국민의 힘(야당) 게이트’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야당은 특검을 하자고 주장하는데, 여당은 기를 쓰고 특검을 반대한다. 마침 정기국회 회기 중이라 관계자들을 국정감사의 증인으로 부를 수 있는데, 이 또한 여당이 절대 반대한다. 이쯤 되면 과연 진실 규명의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특검 대신 합동수사본부의 설치가 논의되는 모양이다. 진행 상황을 더 지켜봐야겠지만,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가 얼마나 국민의 신뢰를 받을지 모르겠다.
검으면 희다 하고 희면 검다 하네
검거나 희거나 옳다 할 이 전혀 없다
차라리 귀 막고 눈 감아 듣도 보도 말리라.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가객인 노가재 김수장(金壽長. 1690-?)이 지은 시조이다.
당시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이 극에 달해 객관적인 진실은 사라지고, 자기 편의 주장만이 진리라고 우기는 세상을 살아가려니 너무나 힘들었나 보다. 견디다 못한 시인은 차라리 듣지고 보지도 않고 초야에 묻혀 살겠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더니, 21세기의 한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 하는 걸까.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대장동 사건의 진실이 결국 언젠가는 밝혀지리라. 다만, 그러기까지 치러야 하는 사회적 손실이 너무 크다.
환욕(宦慾)에 취한 분네 앞길을 생각하소
옷 벗은 어린아이 양지꼍만 여겼다가
서산에 해 넘어가거든 어찌하자 하는다
역시 같은 시인이 지은 시조이다. 벼슬에 눈이 멀어 사리 분별을 못 하는(안 하는) 사람들더러 시인은 준엄하게 꾸짖는다. 발가벗은 어린아이는 햇볕이 잘 드는 양지만 있는 줄 알지만,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 추위에 떨게 된다는 것을.
벼슬도 마찬가지다. 대권 도전에 들떠 ‘검은 것을 희다 하고 흰 것을 검다’ 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섬찟한 경고가 또 있을까.
신축년 오리무중의 개천절에
금당천변 우거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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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오랜만에 개천절 노래들었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