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고장을 가다(안동 병산서원, 하회마을, 봉정사)
2022.06.06 01:34
선비의 고장을 가다
청주지방법원충주지원장 시절인 1996년 5월 19일에 안동 하회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운치가 넘치는 고풍스런 마을일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실망하여 그 이후 다시 찾지 않았고, 그로부터 꼬박 2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하회마을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2022. 5. 6.의 일이다.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선생의 14세손의 권유와 안내를 받은 게 계기가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의 위치]
병산서원(屛山書院)
하회마을을 가는 김에 인근에 있는 병산서원을 먼저 찾았다. 아침에 서둘러 떠났건만, 생각 밖으로 시간이 많이 걸려 낮 12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이날 내내 현지 안내를 해 주신 김종흥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분은 화회탈을 직접 제작하고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공연하는 문화재이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그의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모태는 고려시대의 사설교육기관인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겨왔고, ‘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철종 14년(1863)의 일이다. 1868년에 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리할 때도 철폐되지 않고 남은 47곳 중의 하나이다.
[병산서원의 입구]
[병산서원의 건물배치도]
병산서원의 건축물은 세계 목조건축사에 남을 걸출한 건물로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병산서원의 배치나 구성은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외삼문(복례문)·누각(만대루)·강당(입교당)·내삼문(사당 출입문)·사당(존덕사)이 차례로 자리하고, 강당 앞쪽으로는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고, 강당 뒤쪽에 전사청과 장판각을 두었다.
그리고 외곽에는 이 모두를 감싸는 낮은 돌담을 두르고, 사당 공간에는 다시 담을 둘러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다.
경사진 지형에 세워진 이 모든 건축물들이 전체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잘 이뤄 공간의 멋을 한껏 느낄 수 있다.
김종흥 선생이 안내하는 대로 동재 옆으로 난 쪽문(고직사에 거주하는 서원관리인이 서원 안으로 드나드는 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가 동재의 마루에 올라섰다. 동재는 맞은편의 서재와 더불어 유생들의 기숙사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김종흥 선생이 가져온 보따리를 풀자 뜻밖에도 조선시대의 정갈한 양반옷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선생이 평소 귀빈 안내 시에 사용하는 것인데, 이번에 나를 위해 일부러 가져온 것이다.
선생이 가르쳐 주는 대로 다 입고 나니 갑자기 서애 선생의 시절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다. 이 차림의 옷을 구비하는 데 갓을 포함하여 무려 2,600만 원이 든다고 하여 입이 벌어졌다.
옷을 입고 병산서원의 현판이 걸려 있는 입교당(立敎堂)으로 갔다. ‘입교(立敎)’, 곧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그 이름에 걸맞는 강당으로, 병산서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이다. 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에 온돌을 들인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한 입교당은 앞면은 탁 틔어 있고, 뒷면 벽의 문들이 열려 있어 마루에 걸터앉으면 시원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여기서 전면을 바라보면 만대루와 그 너머의 낙동강과 병산이 눈에 들어온다. 지형을 이용한 자연스런 공간배치에서 옛사람들의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입교당]
입교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정면으로 높은 계단이 객을 맞는다. 그 계단 위의 높은 지대에 사당인 존덕사(尊德祠))가 자리하고 있다. 사면을 문과 담장으로 둘러싼 별도의 공간이다. 계단을 올라 솟을대문(병산서원에서 유일하게 단청이 칠해져 있다)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데, 대문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그 앞의 오래된 배롱나무가 눈길을 끈다. 크기로 볼 때 한여름에 꽃이 만발하면 볼만할 것 같다.
[존덕사]
다시 입교당으로 돌아와 마당을 정면으로 가로질러 내려오면 만대루에서 발길이 멎는다.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을 통해 들어갈 경우에는 먼저 이 만대루 밑으로 난 계단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는데, 이날은 역순으로 진행한 셈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길게 이어진 만대루(晩對樓)는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翠屛宜晩對(취병의만대)”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白帝城樓(백제성루)
江度寒山閣(강도한산각) 강은 겨울 산 누각 옆으로 흐르고
城高絕塞樓(성고절새루) 높은 성이 절벽의 보루 위로 솟아 있다
翠屏宜晚對(취병의만대) 푸른 병풍 같은 산은 저녁 무렵이 더 볼만하고
白谷會深遊(백곡회심유) 하얀 계곡은 모여서 오래 놀기 좋다
急急能鳴雁(급급능명안) 기러기는 울면서 급하게 날아가고
輕輕不下鷗(경경불하구) 갈매기는 내려앉지 않고 하늘에 가벼이 떠 있다
彝陵春色起(이릉춘색기) 이릉에 바야흐로 봄빛이 시작되니
漸擬放扁舟(점의방편주) 작은 배나 한 척 슬슬 띄워볼거나
백제성은 촉나라 황제 유비(劉備)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기도 하고, 두보도 근처에서 1년여를 살면서 많은 시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위 시이다.
통나무를 깎아 걸친 나무계단을 밟고 만대루에 올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마룻바닥의 촉감이 정겹다. 이곳에 앉아 바라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맑디맑은 낙동강의 물줄기와 그 건너의 산이 나그네의 넋을 잃게 한다. 옛날 이곳에서 시를 읊으며 세월을 즐겼을 선비들의 흥취가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된다. 사통팔달의 터진 공간이라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기 그지없다.
[만대루]
만대루에서 내려와 낙동강 쪽으로 난 서원의 정면으로 나서면 솟을대문이 하나 있어 객을 전송한다.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이다. 복례(復禮)는 논어의 "자기를 낮추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이다(克己復禮爲仁)"라는 글귀에서 따온 말이다.
서원의 정문은 보통 삼문(三門)이 일반적인데, 이 복례문은 형식은 삼문 형태이나,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문의 좌우로 담장과 구분되는 벽체를 한 칸씩 두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복례문]
복례문을 통과했으니 응당 나를 낮추고 예로 돌아가야 하지만, 공자님이나 서애 선생 같은 훌륭한 분들이나 해당하는 이야기이지 한낱 촌부가 어찌 그 흉내를 낼 수 있으랴. 다시 오겠다는 기약도 없이 병산서원을 뒤로 하고 하회마을로 향했다.
하회마을의 초입에 있는 김종흥 선생의 각종 목각 제품 제작·전시·판매장을 둘러보고, 인근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하회마을로 들어섰다. 역시 김종흥 선생이 안내를 했다.
하회(河回)마을
1996년 봄에 처음 찾았을 때와는 달리 마을이 한결 정돈된 느낌이다. 우리나라에 지방자치가 도입된 후 전국의 자치단체들이 내 고장 정비에 나선 덕분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마을 곳곳에 널려 있던 각종 상점들이 정리되어 고즈넉하면서도 품위 있는 양반고을 본연의 모습을 찾은 것 같아 반갑다.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마을 122호)은 처음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 중심의 씨족마을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이들 두 집안은 떠나고 풍산류씨(豊山柳氏)가 중심이 되어 터를 닦아 600여 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씨족마을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도 기와집과 초가집의 옛 한옥에서 주민들이 그대로 생활하고 있어 한옥의 과거 현재 미래 모습을 모두 살필 수 있다. 그야말로 씨족마을이자 한옥마을인 셈이다.
‘하회(河回)’라는 이름은 강(河. 낙동강)이 마을 주위를 휘감아 돈다(回)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말 그대로 ‘물도리동’이다. 풍수지리상으로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연화부수형. 蓮花浮水形)으로 길지(吉地)로 꼽힌다.
현재 하회마을에는 100여 채의 전통 한옥이 있는데, 그 가운데 12채가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등록되어 있다. 또 서민들의 놀이였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어 우리의 전통 건축양식과 생활문화 모두를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다.
하회마을로 들어가 중심부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돌고 돌다 보니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물씬 묻어나는 노거수가 한양에서 온 나그네를 반긴다. 마을의 안녕을 책임지고 있는 삼신당 당산나무이다. 이 나무는 마을이 생겨났을 때부터 생사고락을 함께했다고 한다. 마을의 동제를 이곳에서 지내며 하회별신굿탈놀이도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삼신당 주변에는 새끼줄이 둘려져 있고 소원을 적은 흰 종이(소원지)가 빼곡하게 달려 있다. 마을사람들의 축원 말고도 방문객들의 그 많은 소원을 다 들어주려면 삼신당의 삼신할미도 꽤나 바쁠 듯하다.
[하회마을의 골목길과 방문객들의 소원지를 빼곡히 달고 있는 삼신당]
하회마을의 집들은 이 삼신당을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坐向)이 일정하지 않다. 통상적으로 한옥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 삼신당을 중심 기점으로 그 주위에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양진당과 충효당이 자리하고 있다.
양진당(養眞堂)은 1600년대 지어진 것으로 보물 제306호이다. 이 집은 풍산 류씨의 큰 종가로 행랑채, 사랑채, 안채가 연속되어 건축되어 있으며, 사당은 따로 독립되어 있다.
행랑채에 우뚝 솟은 솟을대문을 지나면 바로 마당으로 들어서고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사랑채가 객을 맞는다. 입암(立巖)은 겸암 류운룡 선생과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부친인 류중영 선생의 아호(雅號)이다. 당호(堂號)인 ‘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손인 류영공의 아호에서 유래한다. 이 집이 입암고택 또는 양진당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사랑채는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이고, 안채는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으로서 두 시대의 양식이 공존하고 있다.
[입암고택]
양진당의 바로 옆에 충효당(忠孝堂)이 있다. 충효당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종택이다. ‘서애종택(西厓宗宅)’이라고도 불리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선생 생존 시의 집은 아니다. 지금의 충효당은 그의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長孫)인 류원지(柳元之)를 도와서 지었고, 그 후에 다시 확장된 것으로, 조선시대 중엽의 전형적인 사대부 집이다. 현재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등 52칸이 남아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永慕閣)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 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고,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2세의 방문 기념식수가 있다.
[충효당의 이모저모. 전서체로 쓴 충효당 현판이 이채롭다]
양진당에서 충효당으로 이동했다. 기다리고 있던 종손(柳昌海 님)의 안내를 받아 안채로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안채의 뜰에서 연세가 94세인 종부(宗婦)께서 풀을 뽑고 계신다. 경주 최부자집 따님인 이 어르신은 20세에 시집와 이 집에서 74년을 살았다고 하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어르신이 경기도 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김동연, 김은혜 두 후보자의 여론 조사 결과 지지율 차이가 1%밖에 안 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대가집의 종부는 하늘이 낸다’는 말이 허언(虛言)이 결코 아니다. 양반 가문에 오랜 세월을 두고 전해져 내려오는 올곧은 가풍을 21세기라고 해서 무시할 일이 아님을 새삼 느꼈다.
[충효당 안채의 장독대와 종부의 모습]
종손의 안내로 충효당의 안채를 구석구석 둘러본 후 다시 김종흥 선생을 따라 만송정(萬松亭. 천연기념물 제473호) 숲으로 갔다. 이곳은 하회마을의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밭에 있는 소나무숲이다.
이 숲은 서애 선생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 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보완하기 위하여 소나무를 심어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 소나무가 무려 1만 그루나 되어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그러나 현재 실제로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라고 있다. 아무튼 이 숲은, 여름 홍수 때는 수해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세찬 북서풍을 막아주며,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 혹은 문화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만송정 숲]
생각 같아서는 소나무숲이 선사하는 시원한 그늘 아래를 거닐며 호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갈 길이 바쁜 걸 어쩌랴. 하릴없이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하회별신(河回別神)굿탈놀이를 보러 전수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종흥 선생이 이 굿탈놀이의 파계승으로 출연한다.
국가무형문화재인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본래 약 500년 전부터 음력 정초마다 주민들의 무병과 안녕을 위하여 마을의 서낭신에게 지낸 제사였다. 10년마다 대제(大祭)를 지내고, 마을에 액이 있거나 특별한 신탁(神託)이 있을 때는 임시제를 올렸다. 이때 서낭신을 기쁘게 하고자 마을 사람들이 탈을 쓰고 가면극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의 하회별신(河回別神)굿탈놀이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회탈춤', '하회가면극'이라고도 한다.
하회별신굿탈놀이에 사용되는 탈의 탄생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중엽인 12세기 무렵, 당시 하회마을엔 허씨들이 모여 살았다. 그때 마을에 재앙이 들었는데 허도령이라는 사람의 꿈에 신이 나타나 “탈을 12개 만들어서 그것을 쓰고 굿을 하면 재앙이 물러갈 것이라”고 계시를 하며, “탈이 다 만들어질 때까지 누구도 들여다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까지 일러주었다.
꿈에서 깬 허도령은 목욕 재개하고 문밖에 금줄을 치고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하며 탈 제작에 몰두하였다. 그런 어느 날 허도령이 12개의 탈 중 마지막인 이매탈(‘이매’는 선비의 하인을 뜻한다)을 만들고 있었는데, 허도령을 몹시 사모하던 처녀가 허도령이 보고 싶어 그만 금줄을 넘어 탈을 만드는 방의 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았다. “누구도 들여다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신의 금기가 깨어지는 순간, 허도령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면서 죽고 말았다. 그래서 이매탈은 허도령이 RM 턱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턱이 없는 채 전해오고 있다.
1979년 이두용 감독이 비슷한 내용으로 영화 “물도리동”을 만들었다.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장면들]
[파계승으로 출연한 김종흥 선생과 함께]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보고 부용대로 이동했다. 하회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감상하려면 부용대에 올라야 한다. 이곳에서는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낙동강과 그 안에 자리한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부용대에 가기 위해 예전에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으나, 요즘에는 풍천면 소재지에서 광덕교의 다리를 건너면 차로 이동할 수 있어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다.
부용대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자칫 추락할 위험이 있지만, 절경을 구경하는데 어찌 겁을 내랴. 정상에 서면 실로 멋진 풍광에 넋을 잃는다. 하늘조차 맑고 푸르러 한양 나그네의 눈을 더할 바 없이 즐겁게 한다. 하회마을의 형국이 연화부수형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 듯하다. 이런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해 준 김종흥 선생께 새삼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시 한 수가 어찌 없을쏘냐.
하회마을 가는 길에 탈놀이 선생 만나
선생더러 물은 말이 부용대가 어떻더니
요사이 연하여 날 맑으니 때맞았다 하더라
[만송정에서 본 부용대와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하회마을]
부용대 정상까지 간 김에 인근에 있는 겸암정사(謙巖精舍. 중요민속문화재 제89호)를 찾았다. 다음 행선지인 봉정사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지만,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삶이라 애써 그리로 발길을 향했다.
겸암정사는 겸암(謙巖) 류운룡 선생이 명종 22년(1567년)에 세우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곳이다. 부용대의 절벽에 하회마을을 향해 자리하고 있다. 하회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 중 하나이다.
집 앞의 큰 나무들에 가려 하회마을 쪽에서는 낙엽이 다 진 겨울이 아니면 잘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정사 쪽에서 보면 맞은편 백사장과 만송정의 솔숲, 하회마을의 여러 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히 절경이다. 그 절경에 취해 공부가 제대로 안 된 것은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촌부의 이 고질병은 언제나 나으려나.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겸암정사의 경내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다. 일자형의 사랑채 마루에 앉으니 바람이 솔솔 분다. 마루 바깥쪽의 나뭇잎 사이로 낙동강과 하회마을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미숫가루, 대추차, 식혜, 커피, 매실차를 판다. 더위를 식힐 겸 식혜를 한 대접 마시니 신선이 된 기분이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이 따로 있으랴.
[겸암정사와 사랑채]
풍경에 취해 있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4시를 지나고 있다. 이제는 도리없이 하회마을, 아니 김종흥 선생과 아쉬운 작별을 할 시간이다. 내내 직접 차를 운전하고 다니며 촌부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신 선생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부지런히 차를 몰았지만,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야 봉정사에 도착했다. 본절에서 오론쪽으로 100m 정도 더 오르면 영산암이 보인다. 봉정사의 회주이신 호성스님이 계신 곳이다.
약속시간보다 1시간 늦게 도착했는데도 반가이 맞아주신다. 스님이 내 주신 보이차 한잔에 몸에 열기가 피어오르며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오랜만에 뵙는데도 여전히 건강하신 모습이 보기 좋다.
[봉정사 전경과 영산암 오르는 길]
[영산암]
세상 사는 이야기로 담소를 나누고 스님의 안내로 절 구경을 나섰다. 건물의 기둥들이 특이하게도 온통 검은색이다. 연유를 물으니, 단청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그냥 놔두면 나무가 썩어 검게 칠했다고 하신다. 연유야 어떻든 객의 눈에는 검은색 기둥들이 더 고풍스럽고 정답게 다가온다.
본절의 극락전은 현존하는 최고(最古. 12-13세기 경의 건물)의 목조건물이다(국보 제215호).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이다. 정면은 주심포인데, 측면은 다포인 것이 이채롭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넓은 창이 있다.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중앙의 불단에는 단지 아미타불(높이 1m 정도)만 모셨고, 좌우 협시보살은 없다. 대신 불단 뒤에 있는 후불탱화가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하고 있다.
[극락전]
극락전 안으로 들어가자 왠지 모르게 엄숙 숙연해진다. 호성 스님이 기를 받아보라고 하신다. 눈을 감은 채 기둥에 손을 대니 신비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 정체가 무엇일까.
[호성스님과 함께]
바삐 지낸 하루해가 저물어가려 한다. 스님과 작별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이 고요한 청정지역에서 오래 머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속인은 도리없이 속세로 돌아가야 한다. 그게 섭리다.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 할 이 뉘 있겠는가. (끝)
Beloved_Michael Hoppe_Solace for You.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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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비싼 의복을 걸치셨네요.^^
잘 어울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