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기(王氣)가 뿜어져 나오니(발왕산)
2022.07.22 17:08
문득 생각나는 벗, 구암에게
구암대사,
대사가 내 곁을 영원히 떠난 지도 벌써 8개월이 넘었네그려.
그대는 이제 정체불명 괴질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생의 길로 들어섰지만, 백동과 담허를 만나거나 산을 찾을 때면 문득 그대 생각이 난다네. 그대에게 보냈던 편지글 형태의 산행기를 더 이상 보낼 수 없는 아쉬움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비록 그대가 더 이상 내 글을 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혹시 천상에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념에 젖어 간단한 글을 다시 써보네.
구암,
지난 2003년 6월 15일, 한여름에 덕유산 무주리조트에 가서 스키슬로프를 거술러 덕유산 정상에 올라간 적이 있었네. 스키슬로프의 성질상 그늘이 없는 길을 땡볕에 걸어 오르려니 꽤나 힘들었었지.
그로부터 꼭 19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6월 17일, 이번에는 용평스키장이 있는 발왕산(發王山)에서 다시 한번 그런 만용을 부려보았다네.
그런데, 용평으로 가는 길에 원주 치악산 기슭에 있는 국형사(國亨寺)를 먼저 찾았네.
강원도 전통 사찰 제7호인 국형사는 신라 경순왕 때에 무착 대사가 창건했고, 절 이름이 본래 고문암(古文庵)이었다고 하네. 그 후 조선 태조 때 동쪽의 산신(東岳神)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동악단(東岳壇)을 쌓았고, 그런 연유로 나라의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로 사찰 이름이 국형사(國亨寺)로 바뀌었다더군.
규모가 아담한 암자인 국형사는 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가 절경이지. 푸른 소나무가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네. 그런가 하면 이 절에서는 원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데, 날씨가 맑으면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까지 보인다고 하네. 원주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이런 풍광이 아름다운 절이 있다는 게 놀랍더군.
[국형사]
촌부가 용평 가는 길에 굳이 이 절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 인광스님이 주지로 계시기 때문일세. 스님은 오래전 오대산 상원사 총무스님으로 계실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분일세. 그 스님이 2년 전에 이 절의 주지로 부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몇 번을 가본다고 벼르기만 하다 이번에 실행에 옮긴 것일세.
스님은 예나 지금이나 잔잔한 목소리로 불법(佛法)을 비롯하여 대자유(大自由)를 누리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풀어나가셨네. 그런데 이 스님은 그런 이야기들보다는 주석(駐錫)하시는 곳마다 그곳을 거의 미술관처럼 꾸며놓는 게 인상적이네. 불교미술에 조예가 깊어 불교와 관련된 그림과 조각들이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
특히 티벳 어린이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그림 속 눈동자 안에 문수보살을 그려 넣은 것은 경이롭기까지 했네. 참으로 놀라운 상상력이 아닐 수 없네.
[눈동자에 문수보살을 그린 그림]
용평 리조트에 도착하여 옷을 갈아입고 다소 늦은 시각인 오후 4시에 산행을 시작했네. 아직은 해가 중천에 있어 기온이 높아 무더웠지만, 등산로가 워낙 잘 정비되어 있어 큰 어려움은 없었네. 더구나 전형적인 육산(肉山)으로 등산로가 대부분 흙길인지라 발바닥에 전해지는 부드러운 촉감이 좋더군.
등산코스는 아래 지도에서 보이는 실버등산로(구름길)를 이용했네. 정상까지는 4.6km일세. 반면에 골드등산로(엄홍길)는 4.8km라네. 등상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구름길’이라는 알림판이 운치가 있더군.
[등산로와 구름길 입구]
산을 오르노라니 울창한 숲길 옆으로 피어있는 각종 야생화가 길손의 옷소매를 부여잡는가 하면, 기묘한 형태의 고목들이 잠시 앉아서 쉬었다 가기를 권하지 않겠나. 이처럼 자연은 나그네를 반기는데, 오가는 산객은 보이질 않더군.
대략 3시간 정도 오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실버등산로인 구름길과 골드등산로인 엄홍길이 합쳐지는 곳일세. 엄홍길은 산악인 엄홍길씨가 엄홍‘길’이라는 이름을 직접 붙였다고 하네.
[구름길과 엄홍길이 갈리는 삼거리]
구름길의 백미는 머리 위로 지나가는 곤돌라일세. 등산로의 일부가 곤돌라가 오르내리는 코스 바로 밑에 있기 때문에 그 지나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네.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밑을 내려다보며 “아니 저 인간은 이 더위에 뭔 정성으로 이 높은 산을 걸어 올라가고 있는 거야. 정신 나간 사람 아냐?”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네. 발왕산은 해발 1,458m로 남한에서 12번째로 높은 산일세. 그러니 그런 소리를 할 만도 하지 않을까.
[발왕산의 곤돌라]
곤돌라를 타면 땀 흘릴 필요 없이 편하게 오를 수 있는데,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인가 하는 생각을 촌부인들 왜 안 해 보았겠나.
그러나 촌부의 생각은 다르네. 곤돌라를 탈 거면 겨울에 와서 스키를 타거나 설경을 구경할 것이지 한여름에 올 일은 아니지 않은가. 산이 좋아 산을 찾는 사람이 곤돌라를 타고 휭하니 올라가서야 말이 되겠나.
내내 평탄하던 등산로가 구름길과 엄홍길이 만나는 삼거리부터는 깔딱고개로 변하네. 마지막 고비로 경사가 가팔라지는 것이지. 명색이 남한에서 12번째로 높은 산 아닌가.
그래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 구간을 통과하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스키 슬로프가 나타나고, 이 슬로프를 따라 50여 미터 올라가면 곤돌라 탑승장이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는 드래콘 피크에 다다른다네.
[드래곤 피크]
여기서 발왕산 정상까지는 500m를 더 가야 한다네. 평지에 가까운 길로 왕복에 대략 20분 걸리는 거리이지. 멀지도 않고 주목이 우거진 길이어서 욕심 같아서는 단숨에 내닫고 싶지만, 이미 시계바늘이 오후 7시 30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하행 곤돌라 운행 마감 시각이 다가오는지라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네. 어느새 해가 서산(西山) 위를 맴돌고 있으니 어쩌겠나.
그 대신 전망대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석양의 멋진 경관을 여유있게 감상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네. 어느 옛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發峰處處連芳草(발봉처처연방초)
山路無人日自斜(산로무인일자사)
발왕산 곳곳에 향기로운 풀이 이어지는데
그대로였네.
[드래곤 피크의 전망대에서]
하산은 곤돌라를 타고 했네. 날도 저물어가고,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 봐야 무릎만 아프고 별다른 감흥이 없기 때문이지. 곤돌라는 촌부가 마지막 탑승객이었네.
곤돌라에서 바로 전에 걸어 올라온 등산로를 내려다보노라니 미소가 절로 나더군. 이 더위에 저길 걸어 올라왔단 말이지.... 내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네. 산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자족감이라고 하면 거창한 표현이려나.
발왕산(發王山)은 본래 팔왕(八王)의 묘자리가 있어 팔왕산으로 불렸는데, 언제부터인가(일제강점기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불확실하다네) 그것이 발왕산으로 바뀌었다고 하네. 아무튼 왕기(王氣)가 뿜어져 나오는 산이어서인지, 무더운 여름에 올랐음에도 탈진하기보다는 오히려 기운이 더 솟는 느낌이 들었다네. 착각일까.
이보시게 구암,
천상에도 그대가 좋아하는 참이슬이 있는가?
죽마고우 백동, 담허와 더불어 산행을 마치고 도토리묵을 안주삼아 참이슬을 즐기던 그대 모습이 새삼 떠오르네그려.
참이슬이 천상에는 아직 보급이 안 되었다면 촌부가 택배로 보내줄까?
그대가 보고싶으이.
Shape Of Love-2-Yuhki Kuramoto.mp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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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시겠어여.
그리고 먼길 떠나서도 외롭지 않으실거고여.
이렇게 엄홍길이든 구름길이든 함께 동행하는
우민거사 같은 친구를 두셔서요.
아침이슬 맺히는 구름길에서
먼길 떠난 친구를 불러 함께 아침이슬을 해장주 삼는
우민거사님
그대가 바로 신선이 아니겠는지요.
이번 글 유난히 정겹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