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풍(西風)아 불어다오

2022.08.15 00:07

우민거사 조회 수:303

        

    칠석(七夕. 8.4.), 입추(立秋. 8.7.), 백중(百中. 8.12.)이 다 지나고, 내일(8.15.)이면 말복(末伏)이다. 한마디로 여름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런 마당에 요즈음은 지독한 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리는가 하면,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물난리가 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 8일에는 서울에서 1907년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115년 만에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 동작구 신대방동엔 8일 오후 8시 5분부터 오후 9시 5분까지 불과 1시간 동안에 무려 141.5㎜의 비가 내렸다. 8일 하루의 강수량도 381.5mm에 달했다.

     강남구와 서초구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폭우로 건물과 도로가 침수되고 교통이 마비되는 일이 벌어졌다. 기상이변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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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목하 전 세계가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40도가 넘는 폭염과 가뭄으로 물 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독일은 젖줄인 라인강의 물이 가뭄으로 줄어들어 수상 운송이 중단될 위험에 처할 정도이다. 

      반면에, 중국과 일본은 기록적인 폭우로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하고, 사막 한가운데 있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는 1시간 만에 250mm 물 폭탄이 쏟아졌다.

       미국에서 가장 덥고 건조한 데스밸리에서도 3시간 만에 1년 치 강우량의 75%인 37.1mm 폭우가 쏟아져 곳곳이 물에 잠기는 일이 벌어졌다(이 지역에선 1000년 만에 일어날까 말까 한 폭우이다). 

      그 밖에 호주, 파키스탄, 미얀마 등지에서도 좁은 지역에 단시간 내 폭우가 쏟아져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인간이 온 세상과 우주를 정복한 것처럼 큰소리를 치지만, 기상이변 같은 자연재해 앞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하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자 한계 아닐까.

     큰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위정자들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운다고 외치는데, 그게 공염불로 그치는 모습을 하도 보아서, 이젠 서둘러 발표되는 대책을 들어도 시큰둥하다. 

     30면 만에, 50년 만에, 100년 만에,... 식으로 예측 불허의 폭우, 폭염, 가뭄이 찾아오면 차라리 하늘을 원망하고 체념하는 게 더 속이 편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자연재해에서 벗어나겠지’하는 바램이 예측을 벗어나는 기후재앙 앞에서 번번이 회망고문으로 끝나는 것을 어쩌랴.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후 며칠 잠잠해져 푸른 하늘이 잠시 보이더니, 다시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린다. 사위(四圍)가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금당천변 우거(寓居)에서 듣는 빗소리는 운치가 넘쳐난다. 그 비가 설사 나중에 폭우와 침수로 이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당장은 논외(論外)이다. 

 

      그 옛날 고운(孤雲) 선생은 가을밤에 빗소리를 들으며 세상사를 걱정했지만, 한낱 촌부는 그저 밤새 또 비바람이 불면 집 앞의 연못에 심은 연꽃이 무사할까를 걱정할 따름이다. 하지만 노파심(老婆心)이다. 며칠 전 폭우에도 멀쩡하게 꽃을 피웠는데, 새삼 무에 걱정이랴. 

      오히려 물이 불어 찰랑찰랑 넘치는 것에 장단 맞춰 연꽃들이 춤을 추지 않을까. 진즉에 어느 옛 시인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一雨中宵漲綠池(일우중소창록지)

荷花荷葉正參差(하화하엽정참치)

鴛鴦定向花間宿(원앙정향화간숙)

分付西風且莫吹(분부서풍차막취)

 

밤새도록 비가 내려 푸른 못에 물 불으니

꽃과 연잎들이 여기저기 들쭉날쭉하네

원앙새가 꽃 사이로 잠을 자러 들어가니

가을바람 다독여서 불지 말라 해야겠다       

 

      조선 중기에 영의정까지 지낸 문신 신흠(申欽. 1566-1628)이 지은 시이다.

 

      밤새 비가 그치지 않고 내리더니 연못물이 불어나 찰랑찰랑 금방이라도 넘칠 것만 같다. 출렁이는 물결 따라 연꽃과 연잎들이 춤을 추듯 너울댄다. 빗방울을 안고 반짝이는 연잎과 연꽃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간밤에 괜한 걱정을 했구나.

     어라, 어디선가 원앙 한 쌍이 날아와 서로 깃을 다듬어주며 연꽃들 사이에서 사랑의 밀회를 나누네그려.  아이고, 가을이 와서 바람 불어 연잎이 시들면 저 원앙이 보금자리를 잃고 날아갈 테니, 가을바람한테 제발 불지 말라고 부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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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시인은 가을바람(西風)이 불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폭염과 폭우에 지친 촌부는 가을바람이 어서 불라고 부탁하고 싶다. 우거(寓居) 앞의 연못에는 원앙이 없으니 더욱 그러하다.  

 

   밤이 깊어간다. 어느새 삼경(三更)이다.

 

   빗소리가 그쳤길래 댓돌로 나서니 풀벌레 소리가 반긴다. 내일 아침에 다시 피려고 연꽃마저 오므리고 자는데, 저 풀벌레는 어찌하여 밤을 지새는 걸까. 더불어 잠을 못 이루고 마당을 서성이는 촌부는 또 무어람.    

 

Mariage D'amour -add P.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