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납자(雲水衲子)(그리스)
2023.07.18 22:59
운수납자(雲水衲子)
헝겊을 모아 조각조각 기워서 만든 옷(=납의. 衲衣)을 입은 채 구름처럼 물처럼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이 떠도는 수행자를 뜻하는 말이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우기(雨期)에는 일정한 곳에서 안거(安居)를 했지만, 비가 그치면 다시 길을 떠났다. 따라서 머무는 장소에 집착할 일이 없었다. 말 그대로 구름처럼 물처럼 떠도는 운수납자(雲水衲子)였던 것이다.
이처럼 운수납자는 본래 불가의 수행자들을 가리켰지만, 이제는 한 곳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길을 나서는 사람을 그들에 비유하여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수행자의 삶과는 거리가 먼 일상을 지내는 촌부지만, 배낭 하나 짊어지고 집을 나설 때면 문득 운수납자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게 타고난 역마살 탓인지, 철들지 않는 호기심 탓인지, 고희(古稀)가 멀지 않은 지금도 그 발걸음에 늘 가슴이 설렌다.
여행은 다리가 떨릴 때가 아니라 가슴이 떨릴 때 떠나라고 했던가. 오늘도 부푼 가슴을 안고 길을 나선다. 2023. 6. 9.의 일이다. 행선지는 유럽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그리스. 롯데관광의 그리스 일주 패키지 상품을 이용했다. 2020년 1월의 남인도와 스리랑카 여행 후 3년 만에 집사람과 함께 나섰다.
언제부터인가 패키지여행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 문제로 인해 동행인들의 소개 시간이 없어졌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촌부 부부 외에 개인사업가 부부 4쌍, 모녀 한 쌍, 자매 한 쌍, 이렇게 총 14명이 참여했다. 서울, 일산, 대전, 대구, 울산 등 경향 각지에서 모였다.
[그리스 여행 개념도][자료 : 롯데관광]
(인천->이스탄불->테살로니키->메테오라->델피->아테네->산토리니->크레타->아테네->이스탄불->인천)
테살로니키(Thessaloníki)
2023. 6. 9. 낮 12시 10분. 튀르키예의 이스탄불로 가는 터키항공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본래 예정된 출발 시각인 11시 35분보다 35분 지연되었다. 항공 여행에서 항상 경험하는 일인데, 예정된 시각에 맞춰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 본 기억이 없다. 35분 지연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이걸 과연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
11시간 걸려 7,924km를 날아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다시 그리스의 테살로니키 가는 비행기(역시 터키항공)로 갈아타고 508km를 날아 1시간 만에 테살로니키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저녁 8시 5분이다.
그리스는 여름(3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부터 10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까지)에는 썸머타임(summer time)을 실시하여 한국보다 6시간 늦다.
[인천-이스탄불-테살로니키 항공노선 개념도][구글지도]
테살로니키(Thessaloníki. 그리스어로 Θεσσαλονίκη)는 그리스에서 인구 기준으로 아테네에 이어 두 번째 큰 도시(현재 100만 명)이다. 테살로니카(Thessalonica)로도 불린다.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카산드로스 왕이 BC 316년 자기 부인 테살로니케(알렉산더 대왕의 이복여동생이다)의 이름을 따 건설한 도시이다. 여름은 건조하고 더운 날씨를 보여 최고기온이 보통 30°C를 넘어간다.
역사적으로 보면 테살로니키는 사도 바울이 씨앗을 뿌린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였고(바울이 이곳 교회에 보낸 편지 두 통이 신약성서의 데살로니카 전서와 후서이다),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동로마제국)에서는 동서교역의 중심지로 번성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그러다 1430년부터 5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1912~1913년 벌어진 발칸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부쿠레슈티조약으로 그리스령에 속한 후 오늘에 이른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테살로니키에는 초기 기독교 유적,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유적, 오스만 건축 양식들이 혼재하여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튀르키예의 국부로 추앙받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가 태어난 곳이 바로 테살로니키이다.
[테살로니키 공항]
저녁 8시 30분 아직 주위가 환한 공항 밖으로 나오자 섭씨 27도의 후끈한 열기가 멀리 극동에서 온 객을 맞는다. 공항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여행사 관광버스에 올랐는데, 1시간이 넘도록 떠날 생각을 안 한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경찰이 관광버스의 운행기록을 점검한단다. 아니 왜 하필이면 한국에서 막 도착한 관광객을 태우고 떠나려는 공항에서... 그것도 밤 늦은 시각에 1시간이 넘도록!
경찰이 무언가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어찌 알랴. 아무튼 환영인사치고는 참으로 고약하다.
우여곡절 끝에 밤 10시 25분에 겨우 그리스에서의 첫 숙소인 포르토 팰리스(Porto Palace) 호텔에 도착하였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테살로니키의 도심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변두리의 황량한 해변에 위치한 이 호텔은 명색이 5성급이라고 하는데, 한국으로 치면 거의 모텔 수준이다. 호텔의 겉모양만 그럴싸할 뿐 협소하기 짝이 없는 객실에는 거울도 없고, 옷장에 옷걸이도 없다. 비치된 물잔도 달랑 1개.
문득 2017년 1월 롯데관광의 이탈리아 일주 여행에 참가했다가 열악한 숙소와 음식 문제로 고생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 이제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인가.
다행히 이후의 숙소들은 굳이 나무랄 게 없었는바, 일반 패키지여행의 두 배 가까운 돈을 낸 여행의 첫날 밤을 보내는 숙소인 만큼 도심의 괜찮은 호텔을 잡을 만한데(설사 비용이 더 들더라도), 변두리의 이런 호텔을 숙소로 잡은 여행사의 처사가 영 납득이 안 된다.
[포르토 팰리스 호텔]
2023. 6. 10. 새벽 3시에 잠이 깼다. 서울 시각으로 아침 9시이니 잠이 깰 만도 하다. 대부분의 해외여행에서 겪는 시차 부적응의 한 단면이다. 침대에서 뒤척이다 5시 30분에 산책을 위해 호텔 밖으로 나왔다.
황량하기만 한 길거리 풍경이 낯설고 실망스럽기만 한데, 멀리 동방에서 온 나그네의 울적한 심사를 달래 주려는 것일까, 하늘에서 멋진 광경이 연출된다. 아마도 비행기들이 지나간 흔적들인 듯하다.
[비행기가 연출한 하늘 풍경]
아침 7시에 뷔페식으로 식사를 했다. 그리스,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의 식단을 흔히들 ‘지중해식 식단’이라고 하여 건강에 좋은 식단으로 꼽는다. 그 내용은 과일과 채소, 콩류와 잡곡류, 허브 등의 식물성 식품을 충분히 섭취하고, 생선과 해산물, 가금류, 유제품은 적당히 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촌부가 이날 아침부터 그리스를 떠날 때까지 식사하며 경험한 바로는 꼭 그런 것이 아닌 듯하다.
후술하는 크레타의 리조트 저녁 뷔페 등 한두 개의 예외를 빼면, 대개 채소는 드물고, 과일도 풍부하지 않으며, 생선과 해산물도 그리 많지 않다. 넉넉한 것은 각종 빵과 올리브이고, 무엇보다도 치즈가 늘 식탁을 크게 차지했다. 샐러드(=Greek Salad)에도 치즈가 뭉텅이로 들어있다(토마토, 오이, 양파, 피망을 올리브유로 버무리고 양젖으로 만든 페타치즈를 얹는다).
결국 지중해식 식단이라는 것이 서양 사람의 기준에서 볼 때 건강 식단이라는 것이지, 우리 입장에서 보면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다. 촌부의 생각으로는 야채와 과일이 오히려 부족하다.
오전 9시에 호텔을 나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여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바닷가에 위치한 화이트 타워(White Tower)이다. 해안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아파트 단지 옆 공원에 원형 외관의 독특한 형태를 띠고 서 있는 이 탑은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로, 높이가 33.9m이다.
본래 15세기에 베네치아인이 세운 도성의 일부였는데, 18~19세기 오스만 시대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그 당시 이곳에서 대량 학살이 벌어져 '피로 물든 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후 탑의 표면을 하얗게 칠하면서 화이트 타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옥상 전망대에 올라가면 도시와 항구의 모습이 잘 내려다보인다는데, 시간 관계상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화이트 타워]
화이트 타워 바로 인근에 알렉산더 대왕 동상이 있다.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전장으로 달려갈 듯한 모습의 기마상이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의 왕이었기에 그의 동상이 왜 북마케도니아가 아닌 이곳에 세워져 있지 하는 의문이 순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촌부의 무지의 소치였다.
고대 마케도니아왕국의 위치가 현 그리스 북동부의 마케도니아 지방과 그 위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별도의 국가인 북마케도니아를 합친 지역이고(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의 면적이 북마케도니아보다 넓다),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심도시가 바로 테살로니키이며, 전술한 것처럼 테살로니키라는 도시 이름 자체가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여동생 이름을 따온 것일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그는 본래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의 주치의였다)였던 점 등을 고려하면 테살로니키에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게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 사람들이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 같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
말을 탄 알렉산더 대왕에게 작별을 고하고 시내 중심가의 아리스토텔레스 광장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갈레리우스 개선문(Arch of Galerius)과 로톤다(Rotonda)가 차창 밖으로 보였다. 관광버스를 주차할 곳이 마땅하지 않아 주차간산(走車看山)으로만 보는 게 안타깝다.
갈레리우스 개선문은 로마의 갈레리우스가 페르시아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서기 303년에 건립된 문이고(갈레리우스는 305년에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로톤다는 당초 갈레리우스의 무덤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으나, 건축목적과는 달리 교회와 모스크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갈레리우스 개선문(Arch of Galerius)과 로톤다(Rotonda)]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을 바라보고 길 건너 맞은편 공원 앞에서 차에서 내렸다. 4-5층짜리 건물이 좌우로 늘어선 이 광장에는 각종 상점들이 길게 늘어섰는데,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인데도 아직 오전 10시도 안 된 이른 시각이어서인지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광장]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을 바라보는 길 건너 맞은편의 공원에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 1864-1936)의 동상이 있다. 동상의 색이 특이하게도 순백색인 것이 인상적이다.
동상의 주인공인 베니젤로스는 1910년부터 1920년까지,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총 7회에 걸쳐 총리를 역임하면서 현대 그리스의 기틀을 세운 국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2001년에 새로 개장한 아테네 신 국제공항도 그의 이름을 따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공항이라고 명명되었다. 그의 동상은 출생지인 크레타섬에서도 볼 수 있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동상]
메테오라(Meteora)
오전 10시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을 마지막으로 테살로니키와 작별하고 다음 행선지인 메테오라로 향했다. 그리스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평야보다는 산이 훨씬 많은 나라인지라(전국토의 80%가 산이다), 차창에 어리는 풍경은 대부분 산의 모습이다. 평야는 가끔 양념처럼 나타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산에서 큰 나무는 거의 자라지 않는다. 민둥산에 가까운 산도 자주 보인다. 숲이 우거진 산은 그야말로 어쩌다 볼 수 있다. 그리스의 산은 90% 이상이 토질이 석회석이나 대리석으로 된 탓이다. 평야에서는 밀밭과 옥수수밭이 제일 많이 보인다.
[그리스 산의 전형적인 모습]
해안선을 따라 고속도로를 달리다 정상 부근에 흰 눈이 보이는 올림포스산맥(최고봉은 안 보인다)을 지나 꼬불꼬불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 핀도스산맥 속에 있는 메테오라에 도착했다(총 3시간 소요).
시계바늘이 어느새 오후 1시를 향하고 있는지라 우선 타베르나(Taverna)라는 상호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 식당의 식탁에 비치된 음식 받침판에는 가장자리에 각국어로 인사말이 씌어 있는데, “맛있게 드세요”라는 한글도 있어 눈길을 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건만, 절묘한 곳에 자리한 이 식당 뒤의 풍경이 하도 기이하여 음식보다는 그 풍경에 눈길이 쏠렸다.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기도 하고, 얼굴에 검은 복면을 쓴 것 같기도 한 바위들이 줄을 서 이어진다. 메테오라의 유명한 사암(砂岩. sandstone) 봉우리이다.
[타베르나 식당과 그 뒤의 사암(砂岩. sandstone) 봉우리]
메테오라(Meteora)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이다. 거의 접근하기 어려운 사암(砂岩. sandstone) 봉우리들이 이어져 ‘하늘의 기둥(columns of the sky)’이라고 불린다.
칼람바카(Kalambaka)라는 작은 도시에 400m 이상 우뚝 솟아 있는 이 봉우리들은 약 6천만 년 전에 강의 삼각주에서 원추형으로 솟아오른 후, 지진과 풍화작용으로 형체가 일정하지 않은 덩어리로 잘리고 마모되면서 개별적으로 가파른 암봉이 되었다.
이 암봉들에 11세기 초부터 수도사들이 오직 수도를 하기 위해 세상의 연을 끊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위기둥의 중간중간에 있는 자연 동굴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는데, 14세기 비잔틴 제국이 쇠약해지고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오자 종교 탄압을 피해 봉우리 위로 위로 올라가 수도원을 건립했다.
수도사들은 엄청난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은둔자의 모습을 보이며 수도원을 건립하였는바, 1348년에 613m 높이의 바위 정상에 지은 대 메테오라(Great Meteoron) 수도원(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높은 곳에 있다)을 시초로 15세기까지 총 24개의 수도원을 세웠고, 현재 그중 여섯 개가 남아 있다(그중 두 개는 수녀원).
[메테오라 개념도. 암봉들 밑의 도시는 칼람바카]
길이 없고 접근도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 지은 수도원에서 생활하기 위해 수도사들은 도르래를 이용하여 몇백 미터의 수직 절벽 아래로부터 사람과 물건을 운반하였다. 외부로 통하는 계단은 192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생겼다.
후술하는 델포이가 고대 그리스 종교유적의 중심지라면, 메테오라는 그리스 정교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가히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이 수도원들은 특정 장소를 수행, 명상, 기도처로 만든 건축적 변형 중 가장 독특한 사례로서, 중세 오스만 제국의 400년 점령기 하에서도 그리스 정교(Orthodox) 고유의 종교적 전통을 지켜왔다.
카톨릭과 달리 엄격한 금욕생활을 한 이곳 수도사들은 잠자는 시간 외에는 기도하고 책을 쓰는 일에 몰두하여 그리스어를 보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수도원의 16세기 프레스코화들은 기본적으로 금박이 다 들어가 있는데,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그려냈기 때문에 그 표현이 화려하지 않다. 이 프레스코화들은 비잔틴 제국 후기 회화의 발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수도원을 보러 산 위로 난 길을 따라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니콜라오스 아나파프사스(Agios Nikolaos Anapafsas<Holy Monastery of Saint Nicholas Anapafsas>), 대 메테오라(Megalo Meteoro<Great Meteoron Monastery>. 615m), 발람(Varlaam<Holy Monastery of Varlaam>. 595m), 루사노(Roussanou<Holy Monastery of Rousanou>), 트리아스(Agia Trias<Monastery of the Holy Trinity>. 570m), 스테파노스(Agios Stefanos<Holy Monastery of St. Stephen>. 575m) 등 여섯 개의 수도원을 차례로 볼 수 있다.
특히 전망이 좋은 곳에서는 버스에서 내려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길옆에 공터가 조성되어 있다. 90도 절벽 봉우리 위의 수도원들이 나그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데, 그 수도원들을 둘러싼 주위의 풍광 또한 일품이다.
[메테오라 전경. 붉은 지붕들이 수도원이다]
[니콜라오스 아나파프사스 수도원]
[대 메테오라 수도원]
[발람 수도원]
[루사노 수도원]
[트리아스 수도원. 영화 ‘007 Your Eyes Only’를 촬영한 곳]
[스테파노스 수도원]
오후 3시 30분에 스테파노 수도원 앞의 절벽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수도원 내부로 들어갔다. 입장료는 3유로이다.
이 수도원은 32명의 수녀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생활하는 수녀원이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남자는 반바지는 안 되고 여자는 반드시 치마를 입어야 한다. 안 입고 온 여자에게는 입구에서 치마를 빌려준다.
[스테파노스 수도원의 입구와 내부 건물]
내부의 건물들과 정원은 하나같이 잘 정돈된 아름다운 모습이다. 본래 15세기에 건립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1961년 재건되었다고 한다. 건물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수도원에서 먼발치 아래로 아득히 보이는 테살리아 평야와 페네이오스 강, 그리고 칼람바카 시가지의 모습에서 수도원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실감한다.
[스테파노스 수도원에서 내려다본 테살리아 평야, 페네이오스 강, 칼람바카 시가지]
이들 수도원에서 믿는 정교(正敎. Orthodox)는 동로마제국의 국교로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발전한 기독교의 한 교파이다.
정교회(正敎會)라는 명칭을 직역하면 '올바른 교회'이다. 1054년에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로부터 분리되었는데, 종교개혁 등으로 서방교회가 많은 변화를 겪자 이들에 비해 자신들은 변하지 않은 정통성을 지키고 있다는 뜻으로 정교회(Orthodox Church)라고 한 것이다.
정교회는 제례 의식을 중시하고 상징적ㆍ신비적 경향이 강하다. 대부분 깔끔하게 면도하는 가톨릭의 성직자·수도자와는 달리 정교회의 성직자·수도자는 수염을 풍성하게 기른다. 이곳 수도원 안의 예배당에 들어가 보면 예수님의 조각상은 없고, 그 대신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것도 정교회의 특징이다.
동유럽, 발칸반도, 러시아에서 성한 정교회는 가톨릭과 달리 중앙 통제가 아니라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 지역별로 분산되어 있다. 이렇게 나라별로 분산되어 독립적 위치를 지니게 된 것은 동로마제국 시대에서 유래한다.
슬라브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동로마 정부가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의 슬라브족 교구들에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해 주었고, 그 후 구심점이던 동로마제국이 멸망하자 정교회의 각 교구들은 각자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된 것이다.
스테파노스 수도원에서 내려와 숙소인 디바니(Divani) 호텔에 도착하니 오후 5시 40분이다. 전면에 널찍한 야외 수영장이 있는 이 호텔은 전날 묵었던 호텔에 비하여 훨씬 좋다. 호텔 뒤쪽으로는 바로 메테오라의 수직 암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방금 다녀온 스테파노 수도원도 바위 절벽 위로 보인다.
[디바니 호텔]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주위를 산책해볼까 했더니 비가 쏟아진다. 앞으로 일정이 많이 남아 있고, 아직 시차 적응도 제대로 안 되어 피곤할 테니 좀 쉬라는 게 하늘의 뜻인 모양이다.
이 호텔은 특이하게도 접수대의 젊은 여직원이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이제는 해외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안녕하세요!” 수준의 말이 아니다. 모든 의사소통을 가능한 한 한국말로 하려고 애쓴다. 언제 한국말을 배웠냐고 물으니까, 방탄소년단(BTS) 노래를 듣고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처럼 방탄소년단의 영향으로 한국말을 배운 사람들을 이번 여행 중에 자주 만났다는 것이다. 후술하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만난 미국 청년들, 산토리니의 식당에서 만난 종업원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다. K-Pop을 필두로 한 한국문화(K-Culture)가 세계 여러 곳에 퍼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런 문화강국의 이미지가 계속 전파되면 얼마나 좋을까. 허구한 날 비생산적인 정쟁이나 일삼는 위정자들이 그 관심의 일부만이라도 이런 데 돌린다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제발 그러길 바란다.
2023. 6. 11. 새벽 3시에 잠이 깼다. 아무리 시차 탓이라지만 ‘이건 아닌데’ 하고 다시 눈을 붙였다가 6시에 일어나 칼람바카 시내를 산책했다. 30분만 걸어도 전 시내를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도시였지만, 관광도시답게 호텔이 40여 개 있다. 그래서일까, 관광객들이 길로 나서기 전의 거리는 한산함 그 자체였다.
[칼람바카의 시가지 모습]
델피(Delphi)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8시 30분 델피를 향해 출발했다. 날씨가 비는 안 오지만 흐렸다 갰다 한다.
메테오라에서 델피로 가는 길은 그리스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핀도스 산맥(최고봉은 2,637m)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속도로는 일요일인데도 어쩌다 마주치는 차가 반가울 정도로 한산하다. 파란 하늘 아래 뻥 뚫린 도로를 달리니 가슴도 뻥 뚫린 듯 시원하다.
[뻥 뚫린 고속도로]
높은 산을 넘고 깊은 협곡을 가로질러 가는 산골길은 차창 밖으로 이를 바라보노라면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가 울고 갈 꼬불꼬불 산골길을 능숙한 솜씨로 버스를 모는 운전사의 운전 솜씨가 곡예에 가깝다. 전 국토의 80%가 산인 나라의 운전사답다고 할까. 그 깊은 산속에서 이따금 나타나는 산골마을들이 하나같이 아름다운데, 마을이 나타나면 그 주위에는 으레 올리브나무들이 숲을 이룬다.
[산골마을과 올리브나무 숲]
델피에 도착하기 전에 테르모필레(Thermopylae) 계곡을 지났다. 이곳은 지금은 강의 퇴적작용으로 해안선이 멀리 밀려났지만, BC 480년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해 일으킨 페르시아 전쟁 당시에는 험준한 산(카리모도로스山)과 바다(말리아코스灣) 사이가 100m도 안 되는 협곡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로서는 적은 숫자의 군대로 페르시아의 대군을 상대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 측의 스파르타군이 페르시아군을 상대하였는데, 병력의 숫자상 도저히 안 되는 싸움이었지만 페르시아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느라 사흘간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전멸하였다.
스파르타군의 지휘자인 레오니다스(Leonidas) 왕이 이곳에 오기 전에 델피에서 신탁을 받았는데, 왕이 죽거나 도시가 함락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신탁처럼 레오니다스 왕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테르모필레. 고속도로가 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해안선 위치이다]
패배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후퇴하지 않고 싸우다 죽은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스파르타인이 보여 준 숭고한 희생정신은 수많은 영웅 이야기의 모범이 되었고, 그 이름은 전설로 남아 후세까지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이 전투를 그린 영화가 ‘300’이다(스파르타군 300명이 페르시아군 100만 명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페르시아군은 계속 진군하여 아테네를 점령하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결국 페르시아로 회군한다.
[영화 300의 포스터][자료사진]
정오 무렵 델피에 도착하여 우선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산중턱에 있는 심포지움(Symposium)이라는 이름의 경관이 아름답고 실내가 널찍한 쾌적한 식당에서 그리스 고유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꼬치구이인 수블라키와 레몬밥이 특이했는데, 나름 먹을 만했다.
[심포지움 식당]
[수블라키와 레몬밥]
델피((Delphi)는 신탁(神託)으로 유명한 아폴론의 신전이 있던 고대도시이다. 델피는 현대식 발음이고, 고대 그리스어 발음에 가까운 것은 ‘델포이’이다.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180km 떨어진 파르나소스산(Parnassos. 해발 2,457m)의 중턱 해발 750m 지점에 있다. 이곳은 종교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잘 보존된 탁월한 주위 풍광이 더해져 교통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스어로 델포이는 ‘신탁을 받는 곳’이란 뜻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 신이 세상의 중심을 찾기 위해 동쪽과 서쪽으로 독수리를 한 마리씩 날렸는데, 그 두 독수리가 만난 곳이 바로 델포이다. 제우스는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라 하여 원추형 돌인 옴파로스(Omphalos. 세상의 배꼽)를 땅속에 묻었다.
델포이는 옛날부터 신성시되어 온 곳으로 당초에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신전이 있었다. 그런데 아폴론(Apollon)이 가이아의 신전을 지키던 왕뱀 피톤(Python)을 활로 쏘아 죽이고 새로이 신전의 주인이 된다. 아폴론은 피톤의 부인인 피티아(Pythia)를 신전의 사제로 삼아 그녀를 통해 사람들에게 신탁을 내리는데, 이 신탁이 널리 알려지면서 델포이는 그리스 전체를 아우르는 성지가 되었고, 피티아는 신탁을 받아 전하는 여사제를 일컫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은 다른 지역의 아폴론 신전과 달리 이처럼 여사제가 있었던 유일한 곳이다. 당시 여성의 지위는 '신전에는 여성과 가축은 출입 금지'라고 씌어 있을 정도로 낮았는데, 이 신전에 특이하게도 여사제가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젊은 여성을 사제로 두었으나, 여사제를 강간하는 사건이 벌어진 후에는 50세 이상의 여성으로 바뀌었다.
신탁을 구하러 온 사람의 질문을 받으면 피티아는 유황 냄새를 맡아 몽롱한 상태에서 세 발 받침대 위에 앉아 신의 계시를 전했고, 그 말을 남자 사제가 시로 전달했다. 계시의 내용이 시적인 표현으로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아 그 뜻을 잘못 알아듣거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도 많았다.
[피티아가 남자 사제에게 신탁을 전하는 모습]
신탁 중에서 널리 알려진 일화 중 하나가 오이디푸스(Oedipus)에 관한 것이다. 자신이 주워 온 자식임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답답한 마음에 델포이에 신탁을 받으러 갔다가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충격적인 계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그 후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 후 AD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고 이교도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포이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오후 1시 30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유적지로 올라가기 전에 입구의 델피 고고학 박물관(Delphi Archaeological Museum)을 먼저 찾았다.
이 박물관은 1881년부터 프랑스에 의해 발굴된 델포이의 고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1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BC 8세기부터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BC 570년에 만들어진 낙소스의 스핑크스(Sphinx of Naxos), BC 580년에 만들어진 쌍둥이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Kleobis & Biton), BC 474년에 만들어진 전차 모는 사람(Charioteer), BC 130년에 만들어진 안티노우스(Antinous) 등이 있다. 세상의 중심을 표시했던 옴파로스(Omphalos)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
[낙소스의 스핑크스. 낙소스 섬에서 만들어 델포이에 바친 것으로 높이가 2.3m나 되는 대형 조각이다. 스핑크스의 얼굴은 여자처럼 곱고, 가슴과 날개는 새, 몸체는 사자의 모습이다]
[쌍둥이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의 상.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효성이 지극한 형제이다]
[전차를 모는 청동 마부 상. 실물 크기의 이 조각은 델포이의 가장 대표적인 기념물 중 하나이다. 시칠리아의 군주가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려고 만들었다고 한다. 영광의 순간인데도 헬레니즘 이전 클래식 문화의 특징인 ‘무표정, 무감정’이다]
[안티노우스. AD 1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출신 미소년. 너무 예쁘게 생겨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끼고 살았는데, 가뭄을 걱정해 스스로 제물이 되어 나일강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옴파로스]
비가 내리는 가운데 고고학 박물관에서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200m 구간의 성스러운 길(The Sacred Way)으로 따라 오르막을 올라가자 아폴론 신전 유적지가 나왔다.
이 길은 지금은 그저 메마른 길이지만, 당시에는 길 양쪽에 조각상, 기념비, 보물 등이 3,000여 개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이는 델포이의 신탁이 알려지면서 개인, 가족, 도시국가가 신께 감사하는 마음을 봉헌한 것이다. 당시 귀한 보물들은 보물창고를 지어 보관할 정도로 많은 순례자와 신탁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테네인의 보물창고]
이 길의 계단 위에 세 마리의 뱀들이 휘어 감고 올라간 청동 기둥(높이 8m)이 하나 있다. BC 479년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군의 방패를 녹여 만든 전승기념물이다. 본래 세 개의 뱀 머리가 황금으로 된 가마솥(직경 3m)을 떠받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아폴론 신전으로부터 이스탄불로 옮겨진 후 가마솥은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약탈당하였고, 지금은 짧은 '뱀 모양 기둥'만이 남아 있다. 현재 아폴론 신전 유적지에 있는 청동기둥은 그 복제품이다.
[페르시아전쟁 승리 기념 청동기둥]
전술하였듯이 아폴론 신전은 아폴론을 모시던 신전으로 피티아를 통해 신탁을 전하던 곳이다. BC 6세기 무렵 처음으로 세워졌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BC 4세기의 것이다. 신전은 길이 60m, 폭 23m로 38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전실(前室), 내실, 후실(後室)을 둘러싸고 있다. 현재는 그 가운데 6개만 복원된 상태이다. 전실의 지하에는 현재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옴파로스가 있었고, 내실에는 아폴론 상이 놓여 있었다.
신전 위로 올라가면 야외극장이 나온다. 2층 35열로 된 이 극장은 5천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아폴론 신전]
[야외극장]
한때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아폴론 신전은 돌기둥 몇 개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5천 명을 수용하던 야외극장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원천석(元天錫)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로 “흥망이 유수(流水)하니 델포이도 하초(夏草)로다”가 따로 없다. 그러고 보면, 기나긴 세월의 흐름 속에 실로 찰나에 불과한 순간을 살면서 와각지쟁(蝸角之爭)으로 날을 지새는 중생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아폴론 신전 터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신탁을 받아보려 했지만, 멀리 극동에서 온 나그네는 신탁을 받을 자격이 없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릴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아라호바(Arachova)
오후 3시 40분, 델포이를 떠난 버스가 높은 파르나소스산의 낮은 능선을 향해 지그재그 차도 따라 힘겹게 오른다. 그렇게 20분 걸려 능선을 넘어 내려가니 경사진 산기슭에 아름다운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해발 941m에 위치한 아라호바 마을이다. 2,300명이 주민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은 “그리스의 스위스”로 불린다. 그 이유는 마을 위에 그리스에서 제일 큰 스키장이 있어, 겨울철이면 많은 스키어들이 찾아 오기 때문이다.
이곳 주민들이 자연상태에서 방목하여 키우는 산양과 소에서 짠 젖으로 만든 우유와 요구르트가 유명하다는데, 유제품과는 거리가 먼 촌부에게는 달나라 이야기이다.
[아라호바 전경]
계속 내리는 비가 그칠 줄 모르는 가운데 버스에서 내려 마을 중앙에 있는 시계탑으로 갔다. 촌부는 보지 않았으나 KBS에서 2016년 2월~4월에 방영하였던 인기 드라마 ‘태양의 후예’ 주인공들의 이곳에서의 키스 장면 덕분에 한국인들의 발길이 잦아졌다는 곳이다.
계절적으로 비수기인 데다 비까지 내리다 보니 거리는 한적했다. 한동안 이 골목 저 골목을 정해진 방향 없이 유유자적 걸어 다녔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그야말로 이국적인 풍경을 눈에 담으며 미음완보(微吟緩步)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낭만이 별거더냐.
[아라호바의 이모저모]
아테네(Athene)
아라호바에서 짧은 시간을 보내고 빗속 남행길을 재촉하길 2시간 아테네에 입성했다. 그리스의 수도이자 가장 번화한 곳으로, 가히 도시 전체가 세계적인 고고학 유적지라 할 만한 세계문화유산의 도시이다.
오후 7시 저녁식사를 위해 찾은 곳은 한식집인 귀빈식당이다. 불고기, 오징어볶음, 김치찌개, 생선구이, 전, 상추쌈 등이 올려진 풍성한 식탁이 한양나그네의 식욕을 자극한다. 그리스 온 지 겨우 얼마 되었다고 이들 음식에 군침이 도는 건지 원. 촌부는 어쩔 수 없는 토종 한국인이다.
우리 일행이 들어섰을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곧이어 밀어닥치는 한국 단체여행객들로 식당이 만원이 된다. 그래서일까, 배불리 먹긴 했지만, 음식들을 미리 준비해 놓는 바람에 식어서 맛이 반감된 게 아쉽다.
[귀빈식당]
저녁식사 후 디바니 팰리스 아크로폴리스(Divani Palace Acropolis)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 호텔은 메테오라에서 묵었던 디바니(Divani) 호텔과 같은 체인이다. 무엇보다도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 앞에 있는지라 파르테논 신전으로의 접근성이 뛰어나 좋다(도보로 10분 거리이다). 더군다나 밤에 6층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면 파르테논 신전이 환하게 보여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그래서 옥상에 설치된 바(Bar)에서는 술과 음료를 마시면서 야경을 즐길 수 있다.
[디바니 팰리스 아크로폴리스 호텔과 호텔의 옥상에서 본 파르테논 신전의 야경]
짐을 풀고 바로 아크로폴리스로 걸어 올라갔다. 아크로폴리스라는 말은 그리스어 아크론("높은"이라는 뜻)과 폴리스("도시"라는 뜻)를 합성한 것이다. 그리스에 다른 많은 아크로폴리스들이 존재하지만,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중요성으로 인해 아크로폴리스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지칭한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말 그대로 높은 언덕 위의 도시이다(해발 150m). 아크로폴리스의 위치가 아테네의 중심에 있는 데다, 그곳의 제일 높은 곳에 파르테논 신전이 세워져 있으니 아테네의 웬만한 곳에서는 이 신전이 다 보인다. 역으로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아테네의 동서남북이 다 보인다.
[아크로폴리스의 위치]
저녁 9시의 늦은 시각이라 아크로폴리스의 성채 내부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혔지만, 아래쪽의 주위가 숲이 우거진 공원이라 산책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아테네 시민뿐만 아니라 촌부 같은 외래 관광객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뒤섞여 있다. 고대 아테네의 자유로웠던 공기를 2,500년 뒤의 후세 사람들이 그대로 즐기는 듯하다.
산책길에서 돌아와 한여름의 더위도 식힐 겸 호텔 옥상의 바(Bar)로 올라갔다. 우리 일행 중 네 분이 이미 올라와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이곳에서 야경을 즐기는 데 쓸 경비로 여행사 측에서 1인당 20유로를 나눠 주었다. 분명 여행경비로 선불한 돈에서 돌려받은 것에 불과한데도, 왠지 공돈을 받은 느낌이라 기분이 좋다. 게다가 이날 옥상에서 마신 술과 음료의 값을 일행 중 한 분이 다 내주셔서 금상첨화가 되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에 감동하는 마음이 간사하기 짝이 없다.
2023. 6. 12.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전날 저녁에 갔었던 아크로폴리스 주위 공원을 다시 둘러보았다. 이른 시각인데도 시원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띌 뿐 공원이 한산했다.
호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고 8시 20분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새벽 산책 때와는 달리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다. 아크로폴리스 성채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에 선 줄은 이미 장사진(長蛇陣)이다. 30여 분을 기다려 겨우 안쪽 구역으로 들어갔더니 여기는 한술 더 뜬다. 중국 서안(西安)의 진시황 병마용갱과 러시아 상트페쩨르부르그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못지 않은 인파다.
[아크로폴리스 전경]
아크로폴리스 개념도][자료사진]
[아크로폴리스 입구의 밖과 안]
아크로폴리스의 입구를 지나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오른쪽 아래로 BC 161년에 지어진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정치가로 대부호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가 죽은 아내를 추모해서 지어 기증한 것이다)이 보인다. 고대 그리스의 전형적인 모습인 원형의 야외 음악당으로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고, 현재도 크고 의미 있는 연주회들이 열린다고 한다.
그리스의 유적들은 으레 지금부터 2천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그 옛날에 문명이 얼마나 발달하였기에 이런 건축물들을 지었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난다. 그만큼 부럽기도 하고, 그런 조상을 둔 현재의 그리스의 위상으로 생각이 미치면 씁쓸하기도 하다. 이는 5천 년의 역사를 지닌 이집트에서도 느꼈던 감정이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
아크로폴리스의 성채 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은 서쪽의 프로필라이아(Propylaia. “문앞”이라는 뜻)라는 기념문이다. 높이 9m의 이 문을 지나야 비로소 아크로폴리스 중앙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 나온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전이 있는 성역의 입구 관문도 신전처럼 장엄하게 장식했다. 이 관문은 AD 1656년 화약 폭발 사고로 크게 훼손되었지만 다른 유적에 비해 그나마 온전하게 남은 편이다. 관문 오른쪽(남쪽)으로는 니케 신전이 있다.
[프로필라이아. 아크로폴리스의 서쪽 관문]
[니케 신전. 승리의 여신 니케(Nike)를 모신 신전이다.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는 니케의 영어식 표현이다]
프로필라이아를 통과하자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1호인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 겨우 오전 9시를 막 지났는데도 신전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빈다. 그나마 구름에 가렸던 태양이 입구 반대편 동쪽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구름이 걷히자 신전 위에서 이글거리고, 동방 나그네의 등에서는 땀이 줄줄 흐른다,
파르테논 신전을 중심으로 그 북쪽에는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 신전이 있고, 남쪽 언덕 아래로는 디오니소스(Dionysos) 극장의 유적이 있다.
[파르테논 신전. 북서쪽에서 본 모습]
[파르테논 신전. 북동쪽에서 본 모습]
파르테논 신전이 건설된 자리에는 원래 아테나(Athena) 여신에게 바친 옛 신전이 있었는데, 그 신전이 페르시아 전쟁 중인 BC 479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후 BC 448년부터 432년까지 16년에 걸쳐 파르테논 신전을 새로 건축하여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다시 바쳤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아테네를 맹주로 하여 동맹(=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고, 페르시아의 재침을 대비하여 기금을 모았는데, 그 후 아테네의 힘이 차츰 강해지고 페르시아의 위협 수위가 낮아지면서, 동맹의 기금은 아테네를 재건하고 미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당시 아테네의 통치자였던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아크로폴리스에 파르테논 신전뿐만 아니라 프로필라이아, 에레크테이온 신전, 니케 신전 등을 건축하였는데, 이에 필요한 돈을 바로 이 동맹기금으로 충당하였다. 페리클레스는 분명 동맹국의 돈을 횡령한 셈이지만, 그 대신 멋진 예술품을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겼다.
아크로폴리스가 완성된 이듬해인 BC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서 그리스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27년간 벌인 전쟁)이 발발하고, 페리클레스는 이때 전사한 아테네의 병사들을 위해 추도 연설을 하였다. 당시의 시대정신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이 추도 연설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전략) 우리의 정체(政體)가 민주주의라 불리는 것은 소수자가 아닌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통치되기 때문이다. 시민들 사이의 사적인 분쟁을 해결할 때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중략)... 사생활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참을성이 많지만, 공무에서는 법을 지킨다...(중략)... 공익을 위하여 자신의 귀중한 목숨을 최상의 아름다운 제물로 이 도시국가에 스스로 바친 그들을 기억하라! 여러분은 이들을 본받아 행복은 자유에 있고, 자유는 용기에 있음을 명심하고, 전쟁의 위험 앞에 망설이지 말라!”
도리아식으로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은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로서, 신전의 장식 조각 또한 그리스 예술의 정수로 평가된다. 얼핏 보기에는 직선과 평면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곡선과 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둥들은 안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고, 모양새가 모두 배흘림기둥이고, 그 기둥들을 받치는 토대(플랫폼)도 가운데가 양쪽 끝보다 볼록하다. 파르테논 신전의 바닥의 크기는 70m x 31m이고, 기둥은 지름 2m, 높이 10m이다. 이들 기둥은 외부에 46개, 내부에 23개 있다.
파르테논 신전은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 지배층의 변동에 따라 기독교 교회, 회교 사원(모스크), 무기고 등으로 사용되면서 많은 손상을 입었다. 1687. 9. 26. 신전 안에 쌓아놓은 오스만 제국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폭발하면서 신전과 그 조각물이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다. 1975년부터 그리스 정부 차원의 복원공사가 시행되고 있으나,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세우고, 부수고(또는 부숴지고), 다시 세우는 게 동서고금의 역사 아닐는지.
파르테논 신전의 남쪽 언덕 아래로는 디오니소스(Dionysus) 극장의 유적이 보인다. BC 6세기에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바친 원형극장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이 공연되었던 곳이다. 당시에 17,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에서 매년 디오니소스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지만, 객의 눈에는 황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디오니소스 극장]
아크로폴리스의 동쪽에 파르테논 신전을 잘 조망할 수 있는 다소 높은 지대가 있어 그곳으로 올라갔다(이곳도 분명 유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폐허 상태이다). 그런데 웬 백인 청년들이 우리말로 인사를 한다. 미국의 유타주에서 온 사람들로, BTS를 비롯한 K-pop에 반해 한국말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중 한 명은 아예 서울에 와서 1년을 보냈다고 한다.
[미국의 젊은 청년들과 함께]
양궁, 골프, 축구 등 스포츠에서 시작하여 음악과 영화 등 예술로 세상에 한국문화를 널리 전파하는 사람들 덕분에 촌부 같은 일개 관광객이 이렇게 어깨를 으쓱할 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대접을 받는 것은 결코 우리나라가 정치를 잘해서도 아니고, 재판을 잘해서도 아니다. 한국산 자동차, 휴대폰, TV, 에어컨이 세계를 휩쓸고, 그에 더하여 문화,예술이 뒷받침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미국 US뉴스와 와튼스쿨의 ‘글로벌 문화적 영향력 순위’에 따르면 한국문화의 파급력은 2022년 기준 세계 7위라고 한다(동아일보 2023. 7. 11.자 A2면).
그런데 스포츠 선수들은 병역 혜택을 받아 경력의 중단 없이 활동을 할 수 있는데,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BTS 같은 가수들은 그러질 못해 활동을 중단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절정기의 BTS는 왜 무대에 서지 못하는 것일까.
파르테논 신전을 이 방향 저 방향에서 둘러본 후 돌아 나오는 길에, 파르테논 신전의 북쪽 옆에 있는 작은 규모의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 신전으로 갔다. BC 406년에 완성된 이오니아 양식의 이 작은 신전은 아테나와 포세이돈, 그리고 아테네의 신화적인 영웅 에레크테우스(Erechtheus) 왕에게 바쳐진 것이다. 신전은 원래 ‘하나의 신에 하나의 신전’이 원칙인데(예컨대, 제우스 신전, 포세이돈 신전, 아폴론 신전 등), 이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특이하게도 여러 신을 함께 모신다.
아테네의 수호신을 정하는 경합에 아테나에게 밀려난 포세이돈을 신전에 함께 모신 이유는 또 무엇일까. 지중해 무역을 통해 식량을 조달했던 아테네 사람들은 행여라도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서 항해에 지장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에레크테이온 신전 중에서 아테나 여신이나 포세이돈에게 바쳐진 부분은 현재 이오니아식 기둥들만 몇 개 남아 있을 뿐이어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다. 반면에 이 신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에레크테우스 왕에게 바쳐진 부분이다. 2미터 크기의 6명의 여인이 기둥이 되어 머리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의 ‘카리아티드(caryatid = 여인상<女人像>으로 된 돌기둥)’라는 기둥 때문이다. 진품 다섯 개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고, 나머지 한 개는 영국박물관에 있다.
[에레크테이온 신전과 카리아티드]
그런데 이 여인들은 왜 이렇듯이 머리로 무겁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전술한 페르시아 전쟁 당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였다. 같은 도시국가로서의 의리를 택하는 국가가 있었던 반면, 패망할 것 같은 아테네와 운명을 같이할 수는 없다며 페르시아 편에 붙는 나라도 있었다. 약소국이었던 ‘카리아이’라는 도시국가는 후자에 속했다.
예상과 달리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후자의 도시국가들을 배신자로 낙인찍어 징벌하였다. 그 과정에서 카리아이는 철저히 약탈당했다.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여자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에 에레크테이온 신전을 건설하면서 건물의 지붕을 카리아이 여인들이 떠받치는 형상으로 만들었다. 카리아이의 여인들이 영원히 고통당하는 모습을 통해, 배신자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 기둥의 이름이 ‘카리아티드(카리아이의 처녀라는 뜻)’가 된 것이다. 고금의 역사를 통해 애꿎은 여인들이 희생되는 예가 비일비재한 전쟁의 한 단면이다.
이런 슬픈 배경을 안고 있는 카리아티드는 막상 만들어놓고 보니 너무 아름다워, 그 뒤로 건물을 지을 때 여인의 모습을 한 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크로폴리스는 밀리는 인파에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나오기도 어렵다. 어렵사리 밖으로 나오니 오전 10시다. 아크로폴리스의 언덕을 북서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언덕이 하나 다시 나타난다. 인류 최초의 재판이 열렸던 아레이오스 파고스(Areios Pagos) 언덕이다.
그리스 신화 속 전쟁의 신인 아레스는 자신의 딸인 알키페를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가 강간하자 그를 죽여 버린다. 이에 포세이돈이 아레스를 신들의 법정에 고소하였는데, 아레스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 뒤 이 재판이 열린 언덕을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의 ‘아레이오스 파고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종교와 살인에 관한 범죄를 심판하기 위한 법정을 이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열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의 대법원을 아레이오스 파고스라고 부른다. 이곳은 또한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한 곳이기도 하다.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숲이 나온다. 아직은 이른 오전인데도 그리스의 작열하는 태양에 연신 땀을 닦느라 바쁜데, 숲속으로 들어가니 시원하다. 그렇다고 일부러 그늘을 찾아서 간 것은 아니고, 소크라테스가 갇혀 있었다는 감옥(Prison of Socrates)이 이곳에 있어 보러 간 것이다.
감옥은 필로파포스 기념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데, 바위에 굴을 파서 만들었다. 구조는 세 칸으로, 창살이 있고 자물쇠로 잠겨 있다. 오른편 끝 방 안쪽에는 골방이 또 있다. 그런데 정말로 소크라테스가 이곳에 갇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며, 내부에 물을 흐르게 했던 흔적이 있어 고대 목욕탕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음산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 공포영화를 찍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크라테스의 감옥]
소크라테스의 감옥을 마지막으로 아테네에 있는 고대 그리스 유적 관광을 마쳤다. 아테네의 곳곳에 널려 있는 게 고대 유적이라 다 둘러보려면 한도 끝도 없다. 사실 그중 일당백의 대표라 할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가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명색이 한 나라의 수도인데, 몇천 년 전 유적만 볼 일이 아니다. 과거가 있으면 현재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아테네 중심가에 있는 신타그마(Syntagma) 광장 주위의 볼거리를 찾아갔다.
[신타그마 광장 주위]
먼저 1896년 4월 제1회 올림픽 개막식이 열렸던 올림픽경기장(=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 Panathenaic Stadium)으로 갔다. 흰 대리석으로 지은 세계 유일의 경기장이다.
이 경기장은 본래 고대 BC 4세기 무렵부터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제1회 올림픽을 위해 1895년 주경기장을 완공하여, 이듬해 5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올림픽이 열렸다. 그 후 2004년 8월 아테네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림(제28회 올림픽)에 따라 리모델링을 하였다. 경기장 모습은 전체적으로 U자 형태이며, 지붕이 없다. 수용 인원은 최대 5만 명이다. 2004년 올림픽 때 바로 이 경기장에서 한국선수들은 양궁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를 획득했다.
[파나티나이콘 스타디움]
파나티나이콘 스타디움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길 건너 서쪽에 있는 국립정원으로 갔다. 그냥 대로변에 작은 입구가 있어 별 기대를 안 하고 들어갔는데, 아테네 시민들의 휴식처라는 표현에 어울리게 매우 정갈하게 가꿔져 있고, 규모가 상당하여 정원이라기보다는 공원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하늘까지 쭉 뻗은 야자수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국립정원]
다리도 쉴 겸 정원을 천천히 둘러보면 좋겠는데, 정원 바로 북쪽에 있는 무명용사비의 근위병 교대식을 보기 위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무명용사비는 본래 왕궁이었는데 지금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의 앞에 있다.
무명용사비는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비석이 아니라 국회의사당 정면 담벼락이다. 우리나라를 찾는 국빈이 현충원에서 헌화하듯 그리스를 방문하는 국빈은 이곳에서 헌화한다.
이곳에는 오스만 제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죽은 전사자와 그 후의 전쟁에서 죽은 무명용사를 기리기 위한 비문이 적혀 있다.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는 투키디데스의 명언이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다. 그 글 아래에 그리스가 참전했던 전쟁들이 시대순으로 적혀 있는데, 그중에 한국전쟁도 포함되어 있다. 비문에 보이는 “KOPEA”(KOREA의 그리스 문자)가 그것이다.
[무명용사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그리스는 총 연인원 10,581명을 파병하였고, 그중 186명이 사망하고 610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국이 그리스와 수교한 게 1961년이니, 한국전쟁 당시 그리스의 젊은이들이 아무런 인연도 없는 나라에 와서 자유와 민주를 위해 희생된 것이다.
한국전쟁 때 우리나라는 러시아의 전신인 구(舊)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침공을 받았고, 지금은 우크라이나가 그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우크라이나를 왜 지원하냐고 혈압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여기 와서 이 무명용사비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려나. 그중에는 입만 벙긋하면 민주주의를 외치는 명색이 전직 최고위 공무원이었던 사람까지 있다. 실로 아연실색할 일이다.
무명용사비 앞에는 그리스 전통의상을 입은 두 명의 에브조네스(=의장병. Evzones)가 무표정한 얼굴로 부동자세로 서 있다. 에브조네스는 1868년 왕실 근위대로 창설됐다가 지금은 의장대 역할만 하고 있다. 186㎝가 넘는 키에 외모가 준수하고 힘이 있고 건강해야 에브조네스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에서 에브조네스로 선택되는 건 큰 영광이라고 한다.
에브조네스는 매시간마다 교대를 하는데, 손을 높이 뻗어 어깨 위까지 들어 올리고 이에 맞춰 발을 앞으로 뻗는다. 그리고 한참 지나 바닥을 힘차게 구른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줄 정도로 느려터진 몸짓이지만, 그들의 교대 의식은 내내 엄숙하고 진지하다.
[에바조네스의 교대식]
무명용사비에서 길을 건너 신타그마(Syntagma) 광장을 지나 서울의 인사동에 해당하는 상가 거리로 갔다. 거리가 깨끗하고 인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린 두 손자인 세원이와 정원이 옷을 사고 내 모자도 하나 구입했다.
신타그마 광장을 중심으로 무명용사비, 국립정원, 근대올림픽 경기장, 중심 상가 거리가 모두 가까운 곳에 있고, 서쪽으로 아크로폴리스가 있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있으면 걸어 다니면서 찬찬히 즐길 만하다.
[신타그마 광장과 중심 상가 거리의 모습]
어느새 정오가 지났다. 이제는 아테네와 작별하고 산토리니로 이동하기 위해 아테네 공항으로 가야 한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중간지점 되는 곳에 있는 양고기구이 전문점으로 갔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함이다. 주된 요리인 양고기가 나오기도 전에 감자튀김, 호박튀김, 가지튀김 등 전채만으로 배가 불렀다. 양고기구이는 2019년 8월의 천산산맥 트레킹 이후 처음으로 먹었는데, 양고기 특유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요구르트에 꿀을 부은 후식도 인기였으나, 유제품을 멀리하는 촌부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양고기구이 전문식당과 양고기]
아테네 공항의 일 처리는 만만디다. 그리스인들의 바쁠 게 없는 낙천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여기는 그리스이다. 안달하거나 재촉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오후 5시 15분 출발 예정이던 산토리니행 에기나 항공 비행기가 6시 5분에야 이륙했다. 비행시간이래야 고작 25분 걸리는데 말이다.
산토리니(Santorini)
2023. 6. 12. 오후 6시 30분. 산토리니 공항에 도착했다. 산토리니는 이번 그리스 여행 중 유일하게 2박을 하는 곳이다. 공항을 벗어나 꼬불꼬불 언덕길을 따라 저녁식사 장소인 피라(Fira) 마을의 피르고스(Pyrgos) 식당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경치가 벌써 나그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샐러드와 닭튀김, 돼지살코기 구이가 놓인 식탁보다는 바깥의 노을 지는 전경에 더 눈길이 간다. 아니, 저 신비한 하늘 모습은 동방의 나그네를 환영하기 위해 일부러 연출하는 것일까.
[피르고스 식당과 식당에서 본 석양의 산토리니 전경]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피라 마을의 스플렌더 리조트(Splendour Resort)에 도착하여 짐을 푸니 어느새 밤 9시다. 산토리니에는 고층건물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리조트도 1~2층으로 된 건물이 여러 채이다. 그중 촌부가 묵은 방은 복층 구조이다. 세계적인 휴양지의 리조트답게 내외부가 다 깔끔하다.
1층은 거실 겸 침실이고, 2층은 침실이다. 집사람이 2층을 쓰겠다고 올라갔는데, 이게 큰 화근이 될 줄이야. 본래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감기와 눈병이 심하여 계속 약을 먹으며 다녔는데, 이날도 한밤중 새벽 2시경에 약을 먹으려고 2층에서 내려오다 계단에서 굴러 턱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할까,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다행히 턱 외에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다. 그 시간에 병원에 갈 수도 없고, 응급처치로 지혈을 했지만 걱정 속에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에 인솔자와 현지 가이드가 보고 놀라서 병원에 갈 것을 권했지만, 집사람이 거부하여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인 채로 그냥 다음날까지의 관광을 소화하였다.
[스플렌더 리조트]
2023. 6. 13. 뒤숭숭한 가운데 늘 하던 대로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산토리니를 전후좌우로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산토리니는 그리스의 남단 에게해에 있는 섬이다. 이 섬의 정식 명칭은 티라(Θήρα)이다. 또다른 명칭인 산토리니(Σαντορίνη)는 로마제국 시절 베네치아인들이 이 섬을 '산타 이리니(Santa Irini)'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전 세계적으로는 '산토리니'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흰색과 푸른색으로 지은 콘크리트 건물이 연출하는 인공미와 푸른 바다를 초승달 모양으로 감싸며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해안절벽의 자연미가 절묘하게 어울려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산토리니의 위치]
[산토리니의 개념도]
산토리니는 본래 지금보다 큰 원형의 섬이었지만, BC 17세기에 화산이 폭발하여 가운데가 날아가고 대신 커다란 분화구(=칼데라)가 생겼는데, 분화구와 바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바닷물이 안으로 들어와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산토리니의 멋진 집들이 들어서 있는 절벽은 바로 이 분화구의 절벽이고(높이 300m), 초승달 모양의 본섬으로 둘러싸인 분화구 가운데의 무인도인 신화산(=네아카메니. Nea Kameni=New Volcano)과 구화산(=팔레아카메니. Palea Kameni=Old Volcano)이 있는 바다가 바로 분화구에 바닷물이 들어온 곳이다(깊이 400m).
이 화산폭발과 그에 따른 지진은 남쪽의 크레타섬까지 영향을 미쳐 크노소스 궁전이 붕괴하는 등 미노스 문명에 타격을 주었다. 지금도 가운데의 네아카메니 섬에서는 제한적으로 화산 활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언제 또다시 폭발할지 모른다. 후술하는 것처럼 네아카메니의 앞 바다에는 지금도 더운물이 솟고 있다.
현재 지구상에는 만일 폭발한다면 전 지구적 재앙이 될 수 있는 초화산(超火山. supervolcano) 지역이 세 곳 있는데,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북부의 토바 호수, 그리고 바로 산토리니가 그곳이다. 아름다움을 뽐내며 전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곳에 화산폭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산토리니는 건조기후에 속한다. 연평균 강수량이 371mm에 불과하고, 연평균 기온은 19℃이다. 1~2월에는 춥고 비도 자주 와서 여행하기에 부적절하다. 여행의 적기는 5~9월이다. 다만 그중 7~8월은 체감기온이 35도를 넘는 날이 많으므로 고려할 일이다.
[피라 마을에서 꼭대기에서 서쪽을 내려다본 모습. 산토리니 본섬과 신화산(=네아카메니) 사이에 대형 크루즈선이 정박해 있다]
리조트의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대기 중이던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이아(Oia) 마을로 이동하였다. 운전사가 거의 예술에 가까운 솜씨로 운전한다.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아침 10시가 다 되었는데, 구름 한 점 없는 날씨가 벌써 덥다,
이아 마을은 산토리니의 최북단(最北端)에 자리한 마을로 산토리니 제2의 마을이다. 최북단인 동시에 최서단(最西端)이기도 하여 석양을 보러 사람들이 몰린다. 바닥도 다른 마을들과는 달리 고급스런 대리석 소재로 매끄럽게 깔아 부촌 같은 인상을 준다.
파란 지붕(그리스 정교회의 예배당이다)과 하얀 벽으로 상징되는 건물이 절벽의 급경사면에 늘어서 있는 산토리니 풍광 사진은 바로 이 이아 마을을 찍은 것이다. 수많은 관광객이 다녀감에도 건물들의 새하얀 벽이 유지되는 것은 벽이 더럽혀진 채로 방치하면 꽤 비싼 벌금이 부과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시간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아무 곳이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작품 사진이 나올 정도로 하나 같이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더위도 잊고 다녔다.
[이아 마을의 이모저모]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뽑은 세계 10대 서점의 하나인 아틀란티스 서점]
이아 마을에서 피라(Fira) 마을로 되돌아왔다. 피라 마을은 산토리니의 중심지이다. 중심지답게 앞 바다에 크루즈선 4척이 정박해 있고, 거기서 쏟아져 나온 관광객 인파로 거리가 매우 붐빈다. 사진을 찍기에 특히 좋은 곳은 줄을 서야 한다.
대형마트도 몇 개 있고, 서쪽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케이블카도 있다. 산토리니의 각지로 가는 버스가 이곳을 기점으로 출발한다. 당연히 각종 상점, 식당, 술집 등이 밤늦게까지 활발하게 영업한다.
절벽의 급경사면에 지어진 흰색 집들이 늘어선 풍경은 이아 마을과 비슷한데, 크루즈선이 떠 있는 앞바다는 하늘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색이 파랗다.
[피라 마을의 거리 모습]
[크루즈 선이 떠 있는 피라 마을 앞바다. 왼쪽 섬은 무인도인 신화산(=네아카메니)]
라스칼라(La Scala)라는 상호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샐러드, 빵, 문어구이, 생선구이, 닭구이, 체리 등으로 구성된 식단은 먹을 만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곳의 여자 종업원이다. 친절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맛있어요?” “많이 먹어요” “감사합니다” 등 우리말을 제법 구사했다. 참으로 가는 곳마다 한국말이 들리는 게 신기하다. 이것이 바로 국력이리라.
[라스칼라 식당의 문어구이]
점심식사 후 자유시간에 절벽에 난 길을 따라 이 골목 저 골목을 무작위로 돌아다니다 바로파(Barofa)라는 카페에 갔다. 이 역시 절벽 위에 있는 카페인지라 전망이 매우 좋은 반면, 맨 가장자리에 앉으면 절벽의 아찔함에 다소 섬찟하다. 해를 가리는 둥근 파라솔이 특이한 이 카페는 아쉽게도 메뉴에 녹차나 홍차가 없어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바로파 카페]
오후 4시, 숙소인 리조트로 돌아와 수영복을 챙겨서 다시 나섰다. 요트를 타고 산토리니섬을 돌며 썬셋(Sunset) 크루즈를 하기 위함이다. 감기에 턱 부상까지 겹친 집사람은 참여 안 하고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이 크루즈는 이번 여행에서 유일한 선택상품이다(비용 180유로).
크루즈는 피라 마을에서 남쪽 바닷가의 블리차다(Vlychada)라는 선착장으로 내려간 후, 그곳에서 요트를 타고 섬의 남쪽을 돌아 서쪽의 분화구 가운데 있는 네아카메니 섬 주위까지 갔다 오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일몰을 감상하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출발 자체를 오후 5시가 넘어서 하며, 요트 안에서 간이 뷔페식으로 저녁식사를 한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썬셋 크루즈에 나선 요트들이 많은데, 우리 일행이 탄 요트는 우리가 단독으로 빌린 것이라 알지 못하는 다른 여행객들을 신경 쓸 일이 없다.
[썬셋 크루즈에 나선 요트들]
요트를 타고 섬을 돌면 남쪽 해안가에서 붉은색 절벽의 레드 비치(Red Beach)와 흰색 절벽의 화이트 비치(White Beach), 남쪽 끝 산 위의 아크로티리 등대(Akrotiri Lighthouse)를 차례로 볼 수 있고, 이어서 북쪽으로 분화구 안으로 들어가면 구화산과 신화산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멀리 이아 마을이 보이는데, 마치 깎아지른 절벽 위의 산에 흰 눈이 쌓인 듯한 모습이다.
[레드 비치]
[화이트 비치]
[아크로티리 등대]
[분화구에서 본 이아 마을]
크루즈 과정에서 두 번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겼다.
첫 번째는 레드 비치 가기 직전의 바다에서였다. 당초에 여행사에서 수영복을 준비해오라고 했는데, 막상 준비해온 사람이 촌부 포함 두 명에 불과해 달랑 두 명만 바다에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트에 구명자켓이 없다. 구명자켓을 찾는 촌부를 요트 직원이 오히려 그런 것을 왜 찾느냐는 듯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도리 없이 맨몸으로 바다에 들어갔는데, 워낙 파도가 없는 잔잔한 바다라 차라리 수영하기가 쉬웠다.
[첫 번째 수영]
두 번째는 한 시간 후 남쪽 끝을 돌아 분화구 안으로 들어가 구화산(팔레아카메니. Palea Kameni)의 해변 부근에서 했는데, 이곳에서는 수영복 가져온 다른 한 분마저 안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촌부 혼자 수영을 즐겼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바닷물 색이 초록색이고, 수영하여 앞으로 나가는 동안 찬물 지역과 더운물 지역이 교차했다. 바다 바닥에서 온천수가 나오는 것이다.
[두 번째 수영]
저녁 8시 20분부터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석양이 8시 35분이 되자 마침내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그 모습도 장관이지만, 그보다는 그 모습을 보려고 늘어선 수많은 요트들이 연출하는 장면이 더 멋지다. 어디선가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가 들려오는 듯하다.
석양(夕陽)이 빗겨시니 그만하고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삼정승이 부러우랴 만사(萬事)를 생각하라
마름 잎에 바람이 나니 봉창이 서늘쿠나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여름 바람 일정할쏘냐 가는 대로 배 맡겨라
[요트에서 본 산토리니의 일몰]
2023. 6. 14. 산토리니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새벽 2시 30분에 잠에서 깼다가 다시 눈을 붙인 후 5시 30분에 일어나 리조트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지형이 익숙해진 피라 마을의 고지대로 올라가니 동쪽에서 해가 막 떠오른다. 지난밤 서쪽에서 멋진 일몰을 연출했던 바로 그 해다.
해도 같은 해이고, 보는 나그네도 같은 나그네인데, 그 해를 바라보는 느낌은 지난밤과 지금이 전혀 다름은 무슨 연유일까. 그 옛날 선사(禪師)들은 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放下)라, 분별지심을 다 내려놓은 몽중일여(夢中一如)를 갈파했건만, 일개 촌부에게는 여전히 머나먼 이야기일 뿐이다.
아침 햇빛을 받아 빛나는 예배당 지붕과 풍차 모양의 호텔이 눈길을 끈다. 이곳에는 흰색 건물이 주를 이루지만 이런 풍차 모양의 호텔이 이따금 눈에 띈다. 아예 풍차의 날개까지 달아놓은 곳도 있다. 물론 건축허가를 받고 지었겠지만, 주위 풍광과는 왠지 부조화한 느낌이다. 이런 느낌 또한 분별지심의 발로이리라. 중병이 골수에 뻗쳤다고 할까.
[산토리니의 일출]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예배당]
[풍차 호텔. 입구에 ‘Wind Mill Villa’라고 씌어 있다]
아침 8시에 식사를 하고 짐을 꾸려 9시 30분에 리조트를 나섰다. 이날의 첫 번째 행선지는 남쪽의 페리사(Perissa) 해수욕장. 모래가 백사장(白沙場)이 아니라 흑사장(黑沙場)인 게 특이하다. 그런가 하면 바다는 완전 쪽빛이다. 후술하는 카마리 해변에 비해 조용한 편이다.
아침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인데 벌써 비키니 차림으로 모래 위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미녀들이 보인다. 한편 이곳의 마을에는 특이한 모습의 예배당이 있어 눈길을 끈다. 종탑으로 여겨지는데, 입구 위에 4층짜리 석탑을 쌓은 모습이다. 불탑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동방나그네 혼자만의 의문이다.
[페리사의 흑사장과 종탑]
페리사에서 버스를 타고 베네트사노스(Venetsanos)라는 포도주 공장(Winery)으로 이동했다(오전 10시 40분). 피라 마을의 남쪽의 절벽 위에 있는 이 포도주 공장은 1947년에 창립된 것으로, 산토리니 최초의 산업화된 포도주 공장이다(자세한 소개는 이 공장의 홈페이지 https://venetsanoswinery.com/ 참조).
이곳에서 2019년산 적포도주(과일 맛), 2022년산 백포도주(새콤한 맛), 건포도로 5년 걸려 만든 빈산토(Vinsanto) 적포도주(위스키향의 단맛. 백포도주 품종으로 만들었는데 적색이다. 한 병에 80유로) 등을 시음했다.
그런데 비주류(非酒流)인 촌부에게는 이런 포도주보다는 공장의 모습과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멋진 풍광이 더 끌린다. 이 공장의 홈페이지에서 “분화구와 화산섬 위로 숨이 막힐 듯 믿을 수 없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자찬한 대로 풍광이 아름답다. 그래서 결혼식장으로도 애용된다. 절벽 밑으로 굽이굽이 내려가면 인근의 섬들을 오가는 여객선이 있는 터미널(아티니오스 항구)이 있다.
[베네트사노스 포도주 공장과 그곳에서 본 산토리니 전경]
해가 중천에 자리한 정오 무렵, 산토리니의 마지막 관광지인 카마리(Kamari) 해변에 도착했다. 산토리니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이곳은 해변에 검은색 자갈이 깔려 있는 블랙 비치(Black Beach)이다. 산토리니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해수욕장이라 바닷가와 배후의 제법 큰 시가지 모두 인파가 넘쳐난다. 바닷가의 파라솔이 옛날 시골 원두막 지붕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카마리 해변]
아슬아슬한 비키니를 입은 여인들이 활보하는 시가지를 거닐다 재미있는 광고판을 하나 발견했다. 칵테일바의 광고판인데, 우리나라라면 19금에 딱 걸릴 선정적인 광고판이다. 도대체 8.5유로에 무엇을 준다는 것인지 헷갈린다.
[헷갈리는 광고판]
오후 1시 피라 마을로 돌아와 산토리니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한 후, 전술한 베네트사노스 포도주 공장이 위치한 절벽에 만든 굽이굽이 내리막길을 따라 여객선 부두로 갔다. 여러 번 겪었지만 이 내리막길에서도 새삼 그리스 운전사들의 운전 솜씨에 감탄했다.
[서쪽 해안 여객선 부두로 내려가는 길]
산토리니 주위를 오가는 여객선들이 떠나는 부두(=아티니오스<Athinios> 항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이다. 대형 크루즈선이 정박하는 부두는 북쪽에 따로 있다. 이곳에서 대형 카페리를 타고 크레타섬으로 이동한다. 3시 15분에 출발 예정이던 배가 4시 20분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대형 쾌속선인 이 배는 내부가 쾌적했다. 아테네에서 산토리니로 갈 때 여행사측에서 여행가방이 크면 나중에 이 배를 타고내릴 때 힘드니 꼭 필요한 짐만 넣은 작은 가방을 가져가라고 했었는데, 막상 타 보니 그럴 일이 아니다(짐을 줄이느라 괜히 애꿎은 고생을 했다). 큰 가방도 얼마든지 힘들이지 않고 들고 내릴 수 있다.
[크레타섬 가는 카페리의 외부와 내부]
배가 워낙 커서일까 크레타섬까지 2시간 동안 바다를 가르며 고속으로 달리는데도 거의 흔들리지 않고 사뿐히 간다. 따라서 멀미할 일도 없다.
크레타(Crete)
2023. 6. 14. 오후 6시 30분. 크레타섬의 최대도시이자 중심지인 헤라클리온(Heraklion= Iraklio. 이라클리오)에 도착했다. 남북으로 뻗은 산토리니와는 달리 크레타섬은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면적은 제주도의 4배 정도 되고, 거주 인구는 62만 명에 달한다. 독일인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독일인이 많이 산다.
[크레타섬 지도]
배에서 내려 헤라클리온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웃오브더블루 리조트(Out Of The Blue Resort)로 갔다. 이날 1박한 숙소로 규모가 크고 시설도 훌륭하다. 숲이 우거진 나지막한 언덕에 있으면서 바닷가에 바로 붙어 있어 경관도 좋다. 8시에 호텔 뷔페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갖가지 음식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 특히 그동안 내내 아쉬웠던 채소와 과일도 풍부했다. 또한 식당의 한 면은 바닷가여서 운치가 있다.
식사 후 바닷가를 따라 30여 분 산책을 하고 돌아와 자려는데, 바깥이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홀에 모인 투숙객들 앞에서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다. 놀고 즐기는 관광지에서 하는 공연을 누가 뭐라고 하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아웃오브더블루 리조트 위치, 전경과 뷔페식당]
[산책로에서 본 야경]
2023. 6. 15. 아침 6시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동쪽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다. 그리스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일출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예사롭지 않다.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동방 나그네의 나이를 생각하면 언제 이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으랴. 그래서일까, 유난히 붉게 보인다. 마치 석양처럼. 20분을 바라보며 나름 의미있는 사진 한 장을 남겼다.
[크레타의 일출]
풍성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9시에 크노소스(Knosos)의 궁전 유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굳이 1박을 하며 크레타섬을 찾은 것은 바로 이 크노소스 궁전을 보기 위함이다.
헤라클리온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크노소스는 고대 미노스(Minos) 문명의 중심지로, 그리스의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청동기 유적지이다. 또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지도를 보면 크레타섬은 아테네와 이스탄불, 카이로의 중심점에 있다. 따라서 이 세 도시를 왕래하는 배는 크레타섬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어, 이집트의 문화가 그리스로 유입되려면 먼저 크레타섬을 거쳐야 한다.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명이 그리스 본토의 문명보다 앞선 것은 바로 이런 지정학적 이유가 있었다.
크노소스의 궁전은 B.C. 2000년경 처음 건설되었다가 B.C. 1750년경 지진으로 무너진 후 이전보다 더 호화롭게 재건되었으나, B.C. 1400년경 대지진과 미케네 인의 침략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3300년이나 지난 1900년, 영국 고고학자 아더 에반스(Athur Evans)가 수많은 유물과 함께 발굴하였다. 에반스는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보다도 더 오랜, 한층 세련된 문화를 거기서 발견하였고, 이를 '미노스 문명'이라 이름지었다.
‘미노스’라는 명칭은 그리스 신화 속 크레타의 왕 미노스에서 유래한다. 미노스 왕은 건축가이자 발명가인 다이달로스(Daedalus)에게 미궁(迷宮)을 만들게 하여 반은 사람이고 반은 황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를 그곳에 가뒀다. 이 괴물은 미노스 왕의 왕비가 소와 정을 통해 낳은 것이다. 미노스 왕은 에게해를 건너 아테네를 정복하고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조공으로 받아다 미노타우로스에게 인신 제물로 바쳤는데,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제물로 가장하고 미궁에 실타래를 풀며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빠져나왔다는 게 신화의 내용이다.
에반스는 아무런 근거자료 없이 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거나 시멘트를 바르는 등 날림으로 복원을 하는 바람에 유럽 문명의 요람인 미노스 문명의 정수가 담겨 있는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하고 있다.
[크노소스 궁전 복원도][자료사진]
가로세로 길이가 160~170m에 육박해 고대의 궁전 중 가장 거대한 축에 속하는 크노소스 궁전은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은 언덕 위에 있다. 언덕의 경사에 따라 2층 내지 4층 건물로 된 궁전의 가운데에는 장방형의 커다란 뜰이 있고, 그 동쪽으로 왕의 거주구역이 있고, 서쪽으로 신전, 곡물 창고, 감옥 등이 있다.
무려 1,000개가 넘는 방들이 미로 같은 복도로 연결되어 그야말로 미궁(迷宮)이다. 그러나 통풍이나 채광을 충분히 고려하였고, 완벽한 하수도시설에 더하여 수세식 화장실까지 설치하는 등 위생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곡물 창고에는 술·기름·곡물류를 넣는 커다란 항아리가 길게 열을 지어 있어, 당시 지배층의 부(富)를 말해 준다.
오전 9시 40분 크노소스 궁전 유적지로 들어섰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만큼은 아니었으나, 이곳도 인파가 엄청나다. 주차장에 빼곡하게 늘어선 관광버스들이 연신 여행객들을 쏟아낸다.
아더 에반스의 흉상이 제일 먼저 객을 맞이한다. 이곳 궁전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공이 엄청나건만, 날림 복원의 죄가 그 공을 덮어버리니 어쩌랴. 촌부의 생각으로는, 유물이나 유적이라는 게 어차피 원형 그대로의 복원은 불가능하고, 복원이 새로운 창조가 되는 것인 만큼 아더 에반스를 단편적으로 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과 대원군이 복원한 경복궁이 같을 수 없는데, 다르게 복원했다고 대원군을 욕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더 에반스의 흉상]
궁전의 유적지를 남쪽 출입구에서부터 시작하여 내부로 들어갔다 나와 동쪽 출입구로 벗어나기까지 1시간 20분 동안 둘러보았다. 현재 옛날의 양식을 기초로 하여 부분적으로 복원되어 있긴 하나, 아직은 주춧돌 위에 무너지고 남은 벽들이 “아, 옛날이여~”를 외치는 듯하다. 오히려 그게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펴고 옛날의 부귀영화를 머릿속에서 그려 보게 한다. 폐허가 된 역사의 현장은 늘 보는 이로 하여금 비장한 마음을 들게 한다. 눈길을 끈 몇 군데를 사진에 담았다.
[남쪽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본 궁전 전경]
[궁전의 남쪽 입구]
[남쪽 입구의 뒤 벽면에 있는 벽화. 진품은 헤라클리온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이것은 복제품이다. 이곳의 다른 벽들도 벽화들로 가득한데 모두 복제품이고, 진품은 헤라클리온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동쪽 입구]
[왕의 접견실. 아름답게 장식된 옥좌(玉座)가 놓여 있다. 이 방은 석재(石材)뿐 아니라 목재도 사용해 지었다. 벽화에는 백합 비슷한 꽃이 피어 있고, 우아한 형상의 신화 속 동물이 누워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반은 사람이고 반은 황소인 괴물이 미노스 왕이 만든 미궁에 살았다. 그래서 황소가 크노소스에서 발견되는 도기와 프레스코화에 자주 나타난다]
[궁중 여인들을 그린 벽화.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값비싼 장신구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을 짐작케 한다]
[곡물 창고와 항아리. 항아리 안에 곡물, 기름, 올리브, 건어물 등을 넣어 보관했다]
[벽이나 기둥, 또는 주춧돌만 남은 궁전터]
오전 11시에 크노소스 궁전 유적지를 나서면서 고개를 드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이 작열한다. 마치 온 세상을 무더위로 덮어버릴 기세다. 벌써 영상 31도이다. 그러나 그 뜨거운 햇살도 밤이 되면 사그러들게 마련이다. 저 화려했던 미노스 문명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땅속으로 잠겼듯이 말이다.
옛시 한 수를 읊어본다.
백일(白日)도 낮이 지면 산하로 돌아가고
세상의 부귀공명이 다 이런가 하노라
크노소스 궁전을 나와 헤라클리온 시내 중심에 있는 박물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일행 중 울산에서 오신 이덕식 님의 제안으로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묘지를 들렀다. 그의 묘는 에게해가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나 홀로 묘’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크레타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를 가늠케 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유명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린다. 1883년 크레타 헤라클리온에서 태어난 그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어린 시절을 보내며 기독교인 박해 사건과 독립전쟁을 겪었다. 그의 삶은 자유와 자기 해방을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는 영혼의 자유로움을 찾으며 전 세계를 방랑하였다. 작품들도 자유를 갈망하는 인물로 채워졌다.
그의 묘비명에서도 '오직 자유'를 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묘비명에는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라고 씌어 있다.
흥미롭게도 그는 1919년에 전술한 베니젤로스 총리의 내각에서 공공복지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마지막 장면]
대략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Heraklion Archaeological Museum)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크노소스에서 발굴된 미노스 문명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전시물이 워낙 많아 주마간산으로 보는데도 1시간이 걸렸다.
5,500년에 걸친 15,000여 점의 전시물을 소장하고 있는 이 박물관에서는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수많은 그릇, 장신구, 무기, 조각, 회화 등을 볼 수 있는데, 주제별로 시대순으로 마련된 23개의 전시실을 차례로 따라가다 보면 크레타섬의 역사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종 도구들이 발전하고 예술품들이 정교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된 일부 유물들은 무려 BC 7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BC 7000년이란 숫자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하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유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소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유물들은 미노스 문명이 얼마나 찬란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BC 1800년에 사용된 프라이팬과 전골냄비가 현재와 그 모양과 기능이 똑같은 것을 보고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각종 그릇들]
[미노스 신화 속의 황소 두상. 재질은 청동이다]
[금은 장신구]
[프라이팬, 전골냄비 등 쇠그릇]
[관]
박물관을 나와서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바닷가에 위치한 식당에서 해물 파스타를 먹었다. 식당의 이름은 그리스어로만 씌어 있어 문외한에게는 해독 불능이다.
이 식당 근처에는 베네치아 보루가 있다. 크레타가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오스만 제국과의 싸움을 위해서 10여 개의 보루를 성곽으로 이어서 헤라클리온 전체를 완전히 감쌌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이다.
[점심식사를 한 식당과 근처의 베네치아 보루]
식사를 한 후 헤라클리온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헤라클리온은 크레타섬의 중심도시답게 시가지가 화려하다. 관광객을 비롯한 인파가 넘친다. 한 서양인이 “곤니찌와?”하고 일본말로 인사를 하기에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코가 깨지게 미안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김치를 너무 좋아해서 이번 여행에도 김치를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으니 세르비아에서 왔다고 한다.
그는 연신 잘못 알아봐서 미안하다면서 근처에 멋진 분수가 있으니 꼭 가보란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얼마 안 가자 정말 멋진 분수가 나타났다. 벌써 400년 전인 1629년에 만들어진 모로지니 분수(Morozini Fountain)이다. 분수 자체가 헤라클리온의 중심인 베니젤로 광장에 있는 데다, 주위에 그늘과 기념품 상점들이 많이 있어 사람들이 몰려 있다.
[헤라클리온의 중심가와 모로지니 분수]
자유관광을 끝내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공항의 대합실은 말 그대로 도떼기시장이다. 아테네행 오후 6시 에기나 항공 비행기가 7시 45분이 되어서야 공항을 이륙하는 바람에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탔는데, 아테네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0분이다.
아테네 공항에 도착하여 바닷가에 있는 식당 카스텔로리조(kastelorizo)에서 해산물로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스에서의 마지막 만찬인지라 그동안 몸이 안 좋은 집사람에게 각종 약과 이런저런 편의를 제공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일행에게 반주로 포도주를 샀다.
[카스텔로리조 식당]
식사 후 공항에서 멀지 않은 홀리데이 인(Holyday Inn) 호텔에 도착하니 어느새 밤 11시가 넘었다. 아테네, 아니 그리스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홀리데인 인 호텔]
귀국
2023. 6. 16. 늘 하던 대로 5시 30분에 일어나 호텔 주위를 산책하고 아침식사 후 7시 30분에 공항으로 출발했다. 10시 30분에 이륙하는 터키항공 비행기로 이스탄불로 간 후 그곳에서 다시 인천행 터키항공 비행기로 갈아타고(오후 5시 45분 출발) 그 다음날인 2023. 6. 17. 오전 9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함으로써 긴 여행의 종지부를 찍었다.
여담으로, 2018년 12월 개항한 이스탄불 신공항의 규모에 놀라고(규모면에서 현재 세계 1위), 그 공항의 터키항공 라운지의 규모에 또 놀랬다(뷔페식당, 샤워장은 물론이고, 회의실에 스크린골프장까지 있다). 2018년 10월에 갔을 때 커다란 신공항이 곧 열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규모가 이렇게 어마어마할 줄은 몰랐다.
글을 맺으면서 이번 여행에 동행하며 많은 도움을 주신 일행분들께 깊이 감사드리고,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준 롯데관광의 고희정 인솔자님을 비롯한 관계자분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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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ds의 고급진 해석을 하나 배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