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에게 무슨 죄가 있나

2025.05.24 20:30

우민거사 조회 수:434

 

   조선 후기의 문인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4월이라 맹하(孟夏) 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4월은 음력 4월이니, 양력으로는 5월이다. 그리고 맹하(孟夏)는 초여름을 뜻한다.

 

    그 입하(立夏)가 진즉에 지나고(5일) 사흘 전에는 소만(小滿)도 지나갔다(21일). 한마디로 여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21일 소만 날의 서울 낮 최고기온이 무려 30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이쯤 되면 초여름이 아니라 한여름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래서일까, 신륵사 부근 여주대교 옆에 새로 개통된(5월 1일) 남한강 출렁다리(길이 515m, 폭 2.5m, 평균 높이 25m. 한강에 설치된 최초의 출렁다리이다)와 그 다리의 상류 지역 남한강의 강 가운데 있는 강천섬 캠핑장은 벌써 더위를 즐기려는(또는 쫓으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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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남한강 출렁다리]

 

    소만(小滿)은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滿)는 의미다. 소만의 계절을 맞아 우거의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바야흐로 모내기를 마친 논들이 촌부를 반긴다. 논 가득 줄을 맞춰 서 있는 모들 또한 계절이 여름임을 말해 준다. 

    그 모들이 쑥쑥 생장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연두색에서 진한 초록색으로, 다시 황금빛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우거에서 지내는 촌부에게 주어진 즐거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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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걸음을 금당천으로 옮기면 근래 들어 거의 매주 1~2일은 내린 비로 개울에 물이 넘쳐난다. 포은(圃隱) 선생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우후남계창(雨後南溪漲)’이라고나 할까. 그 물가에서 유유하게 노니는 백로들은 언제 보아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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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거가 있는 동네(여주시 북내면 신접리)의 숲은 백로·왜가리 서식지로 천연기념물(제209호)로 지정되어 있다. 통상 3월에 숲을 하얗게 덮을 정도로 날아와 봄, 여름을 지내고 가을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면 떠난다.

   촌부가 어릴 적에는 여름에 그 백로들이 먹이로 잡아 온 뱀들이 우거의 안마당까지 기어들어 와 어린 가슴을 놀라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자연 파괴로 뱀 자체를 구경하기 힘든 작금에는 그런 일은 하나의 추억거리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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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금당천을 거니는 촌부에게는 그 백로들이 그냥 반가운 손님일 따름인데, 백로를 두고 정반대의 시각에서 읊은 옛시조를 떠올리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제1수)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에 기껏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제2수)

    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쏘냐

    겉 희고 속 검은 것은 너뿐인가 하노라

 

   두 시조 모두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왕조 교체기에 지어진 것인데, 백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앞의 시조(제1수)는 정몽주(1338-1392)의 어머니가 정몽주더러 이방원 무리(까마귀)와 어울리지 말고 백로처럼 고고하게 살라는 것이고, 뒤의 시조(제2수)는 그와 반대로 조선 건국에 참여한 이직(李稷. 1362-1431)이 자신(까마귀)을 비난하는 고려 유신들(백로)의 위선을 꼬집은 것이다. 

 

    그 바람에 백로가 본의 아니게 언제는 고고한 선비가 되었다가 언제는 위선자로 전락했다. 백로는 그저 백로일 따름인데 애꿎게 동네북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말을 못 하니 억울함을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는 백로만 불쌍하다. 아무런 죄도 없는데...

 

    목하 대통령 선거가 열흘 남았다. 여론조사에서 1,2위를 다투는 두 후보(이재명, 김문수) 모두 자기 진영의 세를 불리기에 바쁘다. 그 와중에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며 말을 갈아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정치판 용어로 “철새”라는 비난과 옹호가 교차한다. 누가 까마귀이고 누가 백로인지 헷갈린다. 

 

   평소 정치를 하면서 지녀왔던 이념에 진정으로 부합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몸담을 진영을 찾아 옮겨간다면야 누가 뭐라고 하랴만, 단지 권력의 향배에 따른 이해득실을 계산하여 줄서기를 한다면 그야말로 겉 희고 속 검은 정상배(政商輩)에 지나지 않을는지.

 

   이런 사람들에게는 아래 두보(杜甫·712∼770)의 시[제목 : 공낭(空囊. 빈 주머니)]를 들려주고 싶다. 

 

    翠柏苦猶食(취백고유식) 

    晨霞高可餐(신하고가찬) 

    世人共鹵奔(세인공로분) 

    吾道屬艱難(오도속간난)  

                   

    맛이 쓴 푸른 측백나무 열매를 밥으로 먹고 

    붉게 높이 뜬 아침노을을 물로 마시고 산다

    세상 사람 모두가 제멋대로 잘 살아가지만  

    나는야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련다.

    

   ‘측백나무 열매’와 ‘아침노을’은 본래 전설상의 신선들이 먹었다는 선식(仙食)이다. 시인은 하도 가난하여 음식이랄 것도 없는 그 측백나무 열매와 아침노을로 허기를 채운다. 남들은 되는대로 시류를 쫓아 잘 살아가지만, 시인은 단연코 그 길을 거부한다. 비록 삶이 가난하고 힘들지언정 부박한 세속의 흐름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의 지조를 지키려고 애쓰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촌부가 그런 시인과 더불어 차나 한잔 마시며 시름덜기를 하려고 한다면 주제넘은 짓이런가.

    ‘맛있는 차 한잔으로 현저히 줄어들지 않을 정도로 크거나 심각한 근원적인 문제는 없다(Thre is no source of trouble so great or grave that cannot be much diminished by a nice cup of tea. --- Bernard-Paul Heroux)’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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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달(月)_달빛이 시냇물에 휘영청.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