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억새풀 사이로
2011.10.07 11:10
국화주를 마시며 장수를 기원한다는 중양절(重陽節)이 이틀 전에 지나고,
다시 이틀 후면 국화꽃에 찬 이슬이 맺히는 한로(寒露)이다.
그리고 얼마 후면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 이다.
녹음방초승화시를 노래한 게 엊그제인데, 어느새 "한로상풍(寒露霜風)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黃菊丹楓)"을 찾게 되었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고, 스님들 독경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흔들리는 억새풀 사이로 가을이 곁에 와 있다.
그 옛날 어느 시인은
"낙양성에서 가을바람을 만나, 문득 집에다 편지를 쓰려 하니 온갖 생각이 넘쳐난다(洛陽城裏見秋風,欲作家書意萬重)" .<장적(張籍)의 시 추사(秋思) 중에서>
고 노래했다.
그 흉내를 내려고 글틀 앞에 앉았지만, 온갖 생각이 넘쳐나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 시인처럼 마음만 앞세우다 할 말은 다 못하기 십상이다(復恐匆匆說不盡).
아침 저녁으로 찬 기운에 옷깃을 여미지만,
한낮에 창문에 기대어 바라보는 하늘은 그야말로 청명 그 자체이다.
푸른 5월도 좋지만,
한국의 가을은 정말로 범부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런 반면,
먼 발치에 보이는 우면산과 관악산의 색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보며
세월의 흐름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계절은 순환하는데 세월은 왜 일방통행만 하는 걸까.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다.
아이폰 하나로 세상을 바꿔놓을 듯 위세를 떨치던 그였지만, 흐르는 세월과 병마 앞에서는 그 역시 하나의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나 보다.
그런가 하면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주가가 오른 것은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정글법칙에 따른 것일 게다.
영화 "도가니"의 열풍이 거세다.
사법부는 새 대법원장님이 취임하신 것을 계기로 "국민 속으로 들어가 소통하는 법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려는데, 영화 속의 법원은 욕 먹기에 딱 좋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다행히 언론에서 실제 재판은 그렇지 않았다고 보도를 하였지만,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의 눈에 비치는 법원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재판은 어떻게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이느냐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는 말이 생각난다.
확실히 만물은 유전(流轉)하나 보다.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은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옷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너도 잘 견디고 있는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도종환의 시 "다시 가을")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71 | ‘대법관 빌려쓰기’ | 범의거사 | 2012.07.26 | 10528 |
170 | 퇴임사(박일환, 김능환, 안대희, 전수안) [4] | 범의거사 | 2012.07.11 | 14706 |
169 | 강정마을 해군기지 | 범의거사 | 2012.07.06 | 11646 |
168 | 기우제 | 범의거사 | 2012.06.24 | 14629 |
167 | 나물 담고 설거지하고(퍼온 글) | 범의거사 | 2012.06.24 | 13458 |
166 | 이웃나라인가 먼 나라인가 [2] | 범의거사 | 2012.05.28 | 14124 |
165 | 땅끝의 봄 | 범의거사 | 2012.05.09 | 22024 |
164 | 달리 부를 이름이 없다 | 범의거사 | 2012.04.24 | 15094 |
163 | 춘분날 아침에 | 범의거사 | 2012.03.22 | 14770 |
162 | 2012년 신임법관 임용식사(대법원장) | 범의거사 | 2012.02.28 | 11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