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을 뚫고 악을 쓰며 오르니

 

   2023. 7. 22. 포천에 걸쳐 있는 운악산(雲岳山. 935m)을 찾았다. 운악산은 송악산, 화악산, 감악산, 관악산과 더불어 경기 오악(五岳)의 하나로 꼽히는 산으로, 오악 중 가장 수려하다.

   봄에는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고 여름에 비가 오면 폭포가 시원한 풍경을 연출한다. 가을에는 단풍이 화려하고, 겨울에는 기암에 소복히 쌓인 눈이 험준한 산세와 어울려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송악산(松岳山. 488m)은 개성에 있어 통일이 되기 전에는 오를 수 없고, 관악산(冠岳山. 632m)은 서울에 있어 수시로 찾기 때문에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고, 단풍이 아름다운 파주의 감악산(紺岳山. 675m)은 2020. 10. 17.에 올랐다.

   남한에서 10번째로 높은 화악산(華岳山. 1,468m)은 가평에 있는데 2013. 6. 22.의 염천지절(炎天之節)에 오르느라 고생한 기억이 새롭다.  

 

    운악산은 가평 쪽(산을 기준으로 동쪽)에서 현등사를 거쳐 오르거나 포천 쪽(산을 기준으로 서쪽)에서 운악산 자연휴양림을 거쳐 오르는데, 전자(前者)가 비교적 쉽고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등산코스이다. 운악8경도 이 코스를 따라 올라야 감상할 수 있다.

    촌부도 초임 법관 시절이던 80년대 초반에 이 코스로 오른 적이 있다. 어느새 40여 년 전의 일이다. 

 

   폭우 아니면 폭염이 온 세상을 뒤덮는 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7. 22. 아침 5시 30분에 방배동을 출발했다. 사실 이날로 산행 날짜를 잡아 놓고 비가 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폭염경보가 발령될 정도로 다행히 날씨가 맑았다.

   폭우든 폭염이든 시기상으로 산행을 하기에는 적절한 때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굳이 산행에 나선 것은 8.12. 출발하는 킬리만자로 트레킹을 대비하여 훈련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트레킹을 함께 할 오강원님과 박재송님이 산행에 동행했고, 등산코스도 험한 포천 쪽을 선택했다. 

 

운악산1.jpg[등산안내도]

 

    가는 길에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운악산 광장 주차장에 도착하니 아침 7시 30분이다. 아직 다른 차는 안 보이는 이른 시각인데도 얼굴에 부딪히는 공기가 벌써 후끈하다.

    등산안내도에 그려져 있는 3개의 코스 중 제2코스를 택했다. 다른 코스는 소요시간이 2시간인데, 제2코스는 2시간 30분으로 되어 있다. 거리가 비슷한데(2.6km) 시간이 더 걸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큼 험하다는 것이다. 대신 하산은 제1코스로 하기로 했다. 누구든 포천 쪽에서 산행을 시작한다면 이러한 선택을 할 것을 권한다. 이유는 후술한다.

 

    아침 7시 40분에 산행을 시작하여 10여 분 운악산자연휴양림 입구를 지나면서 그때까지 평탄했던 등산로가 오르막의 험한 산길로 바뀐다. 그 험한 산길을 따라 20여 분 올라가자 길옆에 연등들이 쭉 달려 있어 뭔가 했더니 운악사에서 걸어 놓은 것이다. 

 

     운악사(雲岳寺)는 등산로의 왼쪽 아래로 절벽 밑 깊숙한 계곡에 요새처럼 자리잡고 있다. 왕건에게 쫓긴 궁예가 이곳에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법당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하게 남루해 보이는 건물들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웬만하면 절에 내려가 부처님께 무사 산행을 빌겠건만 영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 그냥 산행을 재촉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이 소아병적 사고를 어찌할 거나.

    더구나 절의 칠성각 뒤편에 아름답기도 유명한 소꼬리폭포(등산안내도에도 나온다)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운악산3.jpg[운악사]

 

   운악사를 왼쪽 아래로 두고 오르는 길은 운악산 등산로가 어떠한 곳인지를 본격적으로 보여준다. 바위 위에 쇠말뚝을 박고 연결한 밧줄을 잡고 오르거나, 급경사에 아득히 이어지는 계단을 계속 올라야 한다.

    벌써 땀이 비 오듯 한다. 고작 15-20분 오르면 쉬면서 숨을 돌려야 한다. 애꿎은 삼다수만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러다 보니 1km 전진하는데 1시간 20분이 걸린다.   

 

운악산7.jpg

운악산6.jpg[등산로]

 

    그러길 1시간 40여 분 지나 전망이 매우 좋은 곳에 도달했다. 사부자(四父子)바위이다. 부자지간인 줄은 모르겠으나, 아무튼 커다란 바위가 하나 위에 있고, 그 밑에 작은 바위가 3개 있다. 이곳은 전망이 탁 틔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 바람도 불어 쉬어가기에 적격이다. 

 

운악산9.jpg[사부자 바위에서]

 

   인증샷도 남기고 10여 분 남짓 충분히 쉰 다음 다시 정상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등산안내도에 나와 있는 두꺼비 바위는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윽고 한 봉우리 정상에 도달했다. 마침내 다 올라온 줄 알고 내심 ‘다 왔네. 운악산도 별거 아니네’ 했는데, 아이고 맙소사, 저 앞 전방에 우뚝 서 있는 저 높은 봉우리는 또 뭐람!  안부(鞍部)에 세워져 있는 이정표가 야속하게 말해 주고 있다. 저 봉우리가 바로 제일 높은 서봉이고,  그 정상까지는 다시 400m를 더 올라가야 한다고.

    맥이 탁 풀린다. 

    운악산12.jpg

운악산13.jpg[서봉과 이정표]

 

     이제껏 오르막만 있었지 내리막은 없었다. 그런데 정상에 도달하려면 짧은 거리일망정 이곳에서는 일단 내려갔다 다시 올라야 한다. 어쩌랴, 여기서 정상 등정을 포기하고 돌아갈 일도 아니니 죽으나 사나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이다. 최대의 난코스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올라왔던 그 험한 길은 명함도 못 내민다. 본래  '높이 솟구친 암봉들이 구름을 뚫을 듯하다' 하여 운악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그보다는 ‘구름(雲)을 뚫고 악을 쓰며 오르는 산’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수직에 가까운 바위 절벽에 설치되어 있는 U자형 발 받침대(‘호치키스 받침대’라고도 한다)를 교차로 디디면서 매달리다시피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한다. 저 받침대가 무너지거나 저 밧줄이 끊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그렇게 15분간 사투를 벌이고 절벽 위로 올라서면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지는 장관이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만경대(萬景臺)이다(가평 쪽에서 올라갈 때도 또다른 만경대가 있다).

   숨이 가쁘고 다리가 후들거려 우선 앉아 쉬어야 했지만, 곧 땀 흘려 오른 보람을 절로 느끼게 한다. 험한 산을 올라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쾌감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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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악산14.jpg[만경대]

 

   일찌기 서산대사가 가야산을 거닐며 읊은 시 한 수(遊伽耶< 유가야>. 가야산에서 노닐다)를 흉내내 볼거나.   

   

      遊雲岳(유운악)

 

   岧嶢絶崖登(초요절애등)

   啼鳥隔林聞(제조격림문)

   西峯在何處(서봉재하처)

   雲岳半是雲(운악반시운)

 

    운악산에서 노닐다

 

   높고 높은 절벽 위로 오르니

   숲 저편에서 새 소리 들리누나

   서봉은 대체 어디에 있나뇨

   운악산은 구름이 절반일세

 

 

     이 최대의 난코스를 지났다고 해서 룰루랄라의 등산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다시 끝 모를 계단이 산객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그래도 더 이상 위험지역은 없다.

    오히려 주위의 산세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정상에서는 정작 주위를 조망할 수 없어 잘 보이는 곳에 만들어 놓은 듯하다)를 지나 100m만 가면 바로 정상에 다다른다. 

 

운악산15.jpg[전망대]

 

    오전 10시 30분에 정상에 도착했다. 출발해서 2시간 50분 걸린 셈이다. 포천시에서 세운 운악산 정상의 표지석에는 ‘운악산(서봉) 935.5m’라고 되어 있다.

    운악산은 포천시와 가평군에 걸쳐 있다. 포천시 운악산의 정상이 서봉(西峯)으로 해발고도가 935.5m이다. 이곳에서 700m 떨어진 곳에 동봉(東峯)이 있고 그곳은 가평군이고 해발고도가 937.5m이다.

 

    엄밀히 논리적으로 따지면 동봉이 정상인 셈인데, 두 봉우리 모두 정상으로 친다. 하늘에 해가 둘 있는 셈이다. 어디까지나 관할 지방자치단체가 다른 탓이다. 이런 예는 2020. 11. 21. 올랐던 오서산에서도 본 적이 있다. 홍성군 오서산 정상(791m)과 보령시 오서산 정상(790.7m)이 1km 떨어져 있다. 

 

     어느 한 봉우리만 올랐다 하산할 수도 있지만, 두 봉우리가 그다지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니 (10분 거리)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둘 다 가보았다. 가평군 측에서 두 개의 정상 논란을 의식한 것일까, 동봉(東峯)의 표지석에는 ‘운악산비로봉(雲岳山毗盧峯)’으로 씌어 있다.  

 

운악산16.jpg[서봉 정상]

   운악산17.jpg[동봉 정상]

 

    서봉, 동봉 모두 표지석 주위가 숲이어서 주변 경관을 구경할 수 없다. 힘들여 정상까지 오른 산객 입장에서는 김이 빠지는 일이다. 볼 게 없으니 오래 있을 이유가 없어 증명사진만 찍고 하산을 시작했다(오전 10시 45분).

    포천 쪽에서 올라왔으니 가평 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어떨까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차를 운악광장에 주차해 둔 까닭에 원점회귀하기로 했다.  

 

    다시 서봉으로 돌아온 후 이후의 하산길은 올라올 때는 달리 제1코스를 택하였다. 거리가 이정표마다 다른데, 대략 2.7km 정도 된다.

    1코스와 2코스가 갈라지는 삼거리의 이정표 옆에 있는 경고판이 시선을 끈다. 2코스는 매우 가파르니 주의하라고 한다. 맞다, 비록 그리로 올라오긴 했지만, 그리로 내려갈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러기엔 너무 위험하다.

    그나저나 이런 경고판을 출발지에도 세워놓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올라올 때 2코스를 선택하기에 앞서 한 번 더 생각해 보았을 텐데. 하긴 그래도 1코스로 올랐다 1코스로 내려가는 것은  명색이 산을 찾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니  역시 2코스로 올랐다가 1코스로 내려가는 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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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거리를 지나 2코스의 하산길에 접어들면 곧 급경사의 계단이 나오고(심지어 나선형으로 된 곳도 있다), 이 계단을 통과하면 평탄한 길이 이어지다가 작은 봉우리와 맞닥뜨린다. 표지석도 없어 언뜻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정도의 작은 봉우리로, 이름조차도 애기봉이다.

    그런데 이 봉우리에 있는 바위의 생김새가 묘하다. 가평 쪽 등산로에서 보인다는 남근석(男根石)을 옮겨 놓았을 리는 없는데... ‘애기봉’이라는 봉우리 이름과 관련지어 볼 때, ‘이 봉우리에 올라 아기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곳’이 아닐까 하고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   

 

운악산21.jpg[나선형 계단]

 

운악산19.jpg[애기봉]

 

    애기봉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경사가 급한 하산길이다. 2코스만은 못 해도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이 하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져 볼 만한 경치도 없다. 하지만 예로부터 썩어도 준치라고 하지 않던가. 30여 분 내려가면 멋진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나오고, 이어서 궁예가 머물렀다는 ‘대궐터’가 한양 나그네를 맞이한다.

 

     범부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궁예의 이미지는 폭군 그 자체이고, 그래서 왕좌에서 쫓겨난 인물인데, 대궐터 표지판에 씌어 있는 안내문은 궁예에 대하여 상당히 동정적이다. 반면 왕건은 부하로서 감히 궁예를 배신한 나쁜 인물이라는 듯한 인상을 받게 한다.

     아무래도 궁예가 태봉국을 창업한 철원이 가깝다는 지역정서가 스며 있는 느낌을 받았다면 지나친 억측이려나.             

 운악산20.jpg

운악산22.jpg

 

   대궐터를 지나 20분 내려가니 계곡에 시원하게 물이 흐른다. 무더위에 높은 산을 등산할 때 누리는 즐거움이자 특권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계곡에서의 탁족(濯足)이다.

    땀을 흘린 후 얼음장 같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노라면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다. 이쯤 되면 더위는 저만치 가 있다. 기온이 높을수록 계곡물은 더 차다. 더 차게 느껴진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촌부의 경험으로는 계곡물에 발을 1분 이상 담그고 있기 힘들다.

     아무튼 탁족을 하면 마치 피로가 풀리고 이후에는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운악산23.jpg

 

   발걸음도 가볍게 하산을 재촉하는데, 지근거리에 샘터가 있다는 이정표가 객을 유혹한다. 참새가 방앗간 앞을 어찌 그냥 지나랴.

   잽싸게 가보니 땅에 박혀 있는 파이프에서 물이 제법 나온다. 약수임이 분명한데, 왠지 모르게 찜찜하여 마시지는 않고 손만 적셔 보니 확실히 차다.

   이 샘터를 오가는 길목에 있는 바위 절벽에는 바위타기의 흔적들이 역력하다. 인터넷에 검색하여 보니 인근에 있는 신선대 암벽과 더불어 암벽타기의 명소인 용담 암벽이다. 그런데 워낙 더운 날씨 탓인가. 암벽타기를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안 보인다. 

 

운악산24.jpg[무지치폭포]

 

     이곳에서 다시 20여 분 내려가면 무지치(=무지개)폭포와 전망대가 나온다. 그러나 정작 물이 흐른 흔적이 있는 절벽만이 숲 사이로 보일 뿐이다. 아마도 비가 억수로 쏟아져야만 폭포 구실을 할 것 같다. 

 

    이제부터는 아무런 특징도 볼거리도 없는 하산길이다. 지친 다리를 이끌고 다시 운악광장에 도착하니 산행 후 7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일동의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는 일이다. 그리고 식사 후 귀경. 그렇게 하루해가 지나가고 있다.  (끝)

클리프 행어-14-Various Artists.mp3 (Cliff Hanger 주제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