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知의 세계(동유럽---예외5)

2010.02.16 12:30

범의거사 조회 수:20959

 

 

             미지(未知)의 세계  

  

   그랬다. 그 곳은 미지(未知)의 세계였다. 적어도 그 곳에서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동구, 1987년 8월부터 1988년 8월까지 법관 연수를 위하여 서독에서 13개월 동안 살았을 때만 해도 그 곳은 가보고 싶어도 못 가는, 갈 수 없는 금단의 세계였다. 당시 서베를린에 가서 시내관광을 하다가 동,서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장벽 앞에 멈춰 서서, 저 너머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만 머리 속에 가득 채운 채 돌아서야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로부터 18년의 세월이 흐른 2006년 6월, 통일독일의 부스트라우(Wustrau)라는 시골 마을에서 열린 독일법관아카데미 세미나에 참가하게 된 것을 계기로 그 未知의 땅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 곳도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구(舊) 동독

   (1) 베를린(Berlin)


   6월 18일 밤 10시에 베를린의 호텔(Mercure Hotel Berlin Mitte)에 도착하자 TV에서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월드컵 경기 후반전을 중계하고 있었다. 독일로 떠나기 전 내가 월드컵 기간 중에 독일에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마다 축구 응원하러 가냐고 묻는 통에 그게 아니라고 설명하기에 바빴고, 우리 집 말썽이는 아빠 생전에 그럴 기회가 다시는 없을 테니 어느 나라 경기든 간에 축구장을 찾아서 경기를 꼭 보고 오라고 하였지만, 적어도 월드겁 경기에 관한 한 한국에 있는 것이 중계를 보기에 훨씬 수월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보름 동안의 유럽 일정이 빡빡하였던 것이다.  

   6월 19일 아침에 호텔을 나서서 동베를린을 주마간산으로 한 바퀴 돌아보았다. 브란덴부르크문(Brandenburger Tor)을 기점으로 동쪽으로 펼쳐진 시가지의 모습은 언제 그곳이 장벽을 사이에 두고 오랜 동안 서쪽과 갈라져 있었더냐 싶게 서베를린과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훔볼트대학(헤겔, 아인슈타인, 마르크스, 그림형제 등이 이 대학 졸업자이다)과 각종 박물관이 몰려 있는 거리, 그리고 베를린 성당은 서베를린보다 더 멋지고 활력이 넘치는 듯하였고, 곳곳의 요지에 걸려 있는 삼성과 LG의 광고판이 이방인의 눈을 뿌듯하게 해주고 있었다.
   훔볼트 대학의 본관건물로 들어섰을 때 정면 벽에 새겨진 마르크스의 한 마디가 뇌리에 남는다.

“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en interpreiert, es komt aber darauf an, sie zu verändern.”(철학자들은 그 동안 세상을 단지 여러 가지로 분석하여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변화를 위하여 그가 남긴 저서, 자본론이 그 후 세상을 얼마나 뒤흔들어 놓았는가를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길거리에서 독일인들이 하는 식으로 즉석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호텔로 돌아와 짐을 꾸려 Zoo역(Zoologischer Garten)으로 갔다. 역은 사람들로 붐볐다. 창구에서 부스트라우로 가는 기차표를 사 가지고 돌아서는 순간, 아뿔싸, 서류가방이 없어졌다. 은행처럼 한 명씩 창구에 가서 표를 사는 곳이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가방을 옆에 두고 표를 산 것인데, 길어야 2분 정도 되는 시간에 어느 새 소매치기가 접근하여 가방을 가져 간 것이다.
   창구 직원의 안내로 역파출소에 가서 신고를 하였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신고를 접수하는 경찰의 느려 터진 업무처리에 분통이 터질 뿐이었다. 나중에 독일 검사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독일 경찰들의 그런 만만디에 시민들이 질려 있다고 한다.      
    
   (2) 부스트라우(Wustrau)

      (가) 법관연수원


   6월 19일 오후 늦게 우여곡절 끝에 부스트라우(베를린에서 북서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인구는 약 1,200 명)에 있는 독일 법관연수원(Deutsche Richterakademie)에 도착하여 신고를 하였다.  
   오후 6시에 구내식당에서 먼저 저녁을 먹으면서 연수책임자로부터 환영사 및 일정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7시 30분에 2층 세미나실로 올라갔다. 세미나 시작 전에 각 참가자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40여명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독일의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이었고, 외국인은 나와 헝가리에서 온 검사시보를 합쳐 두 명뿐이었다. 외국인의 참가가 가능한 것뿐만 아니라 법관연수원임에도 검사, 변호사의 참가도 가능한 것이 이채롭다.

   내 차례가 되어 나의 신상(이름, 근무처, 직책)에 관한 소개를 하고, 베를린에서 겪은 소매치기 이야기를 하였더니 모두들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세미나를 마치고 떠날 때까지 나만 보면 참으로 안 됐다는 위로의 말을 하는 통에 오히려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인사말 끝에 농담 삼아,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베를린에서 온 판사와 검사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였는데, 뜻밖에도 베를린에서 온 검사(이름이 Karsten Oetting이다)가 다음날 정색을 하고 내게 찾아와서는 사건 경위, 경찰 신고내용. 내 연락처 등을 확인하였다. 베를린에 있는 자기 동료검사에게 전화를 하여 가능하면 잃어버린 가방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 검사는 내가 세미나를 마치고 베를린으로 돌아갈 때도 동행하여 기차역에서 내려 공항 가는 택시를 타는 데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의 친절을 잊을 수 없다. 신나찌주의자들이 외국인에 대하여 적대감을 공공연하게 나타내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독일인들은 참으로 친절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독일에는 법관연수원이 트리어(Trier)와 부스트라우(Wustrau)의 두 곳에 있는데, 연중 세미나가 열리며(각 세미나마다 대략 1주일 정도) 1년치 일정을 미리 발표하여 전국의 법조인들이 자기 관심분야에 맞추어 신청을 하고 참가할 수 있다. 보통 매년 5,000 명 정도 참가한다고 한다.
   우리와는 달리 직급별 세미나는 없고, 모두 주제(두 곳 합쳐 매년 130-140 개 정도)별 세미나이다. 따라서 구법원판사나 지방법원 배석판사부터 각종 연방법원의 부장판사까지 참가자들이 다양하다. 법관연수원은 본래 트리어에만 있었는데(그래서 한국에서도 이인재, 이주흥, 오세빈 등 고등부장들이 이 곳에 다녀왔다), 통일 후인 1993년에 부스트라우에도 생겨 이번에 내가 처음으로 간 것이다.
  
   부스트라우의 법관연수원 건물은 오래된 고성을 개조한 것이다. 루핀호(Ruppiner See)라는 호수의 남단에 자리 잡고 있는데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세미나실, 도서실, 사무과, 휴게실, 구내식당이 있는 본관건물 1동과 참가자들이 묵는 영빈관 2동이 있다. 영빈관의 객실도 1류호텔처럼 깨끗하고 안락하다.
   영빈관에는 별도의 휴게실이 있고, 특이하게 사우나도 있다. 객실 청소는 매일 해주는데, 호텔을 생각하고 팁을 놓아두었지만 놓아둔 자리에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나 혼자 머쓱해했다.  
   아침이면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을 깬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아침 식사 전에 호수에 나가 수영을 하거나 카약, 오리배 등을 타고, 숲속에서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나도 난생 처음으로 카약을 타봤는데 의외로 쉬웠다. 잔잔한 호수에서 뱃놀이를 한다는 게 망외의 즐거움이었다. 수영복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법관연수원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긴 하지만 공짜가 아니고 실비를 받는다. 세미나가 끝나고 나올 때 사무과에서 내가 몇 밤을 자고, 아침, 점심, 저녁을 몇 번 먹었고, 전화는 몇 통 사용하였고...등등을 자세히 적은 계산서를 내미는 것을 복 역시 독일인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하룻밤 자는 데 20.5유로, 아침식사는 4.5유로, 점심은 8.5유로, 저녁은 7.5유로. 1유로는 대략 1,200원).  

   독일법관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은 판사생활을 하는 동안 법관연수에 여러 번 참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미나에서 배우는 것도 많지만 아마도 업무에서 해방되는 즐거움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듯하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동료판사들한테 추천하려고 하는데, 트리어와 부스트라우 중 어느 곳이 더 좋으냐고 물었더니, 하나같이 여름에는 단연 부스트라우가 좋다고 한다. 반면 겨울에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안 좋으니 트리어로 가라고 한다.    

    (나) 세미나

     이번 법관연수프로그램의 대주제는 "국제법정"(Internationale Gerichtshöfe)이다. 주로 국제적인 형사재판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세미나 첫날 : 도착 첫날인 6월 19일 저녁 7시 30분에 각 참가자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바로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원 세상에, 도착 첫날에, 그것도 저녁을 먹고 난 저녁 7시 30분에 세미나는 시작하는 것도 기절할 일인데, 그 세미나가 밤 10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정말 지독한 사람들이다. 주제는 정부관료의 국제형법상의 책임이었는데, 모두들 여행 끝이라 몸도 피곤한데다 아직 분위기도 낯선 상황에서, 자료도 나누어주지 않고 사전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강사가 구술로 강의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지루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물며 외국인인 나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숙소로 가려니까 한 판사가 본관 지하에 간이 바가 있는데, 그곳에서 술 한 잔 하면서 담소들을 나누니까 옷 갈아입고 오라고 한다. 숙소에서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그곳으로 갔더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 있고 시끌벅적하다. 맥주 한 병이면 밤새 떠들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 아닌가. 나도 알콜 없는 맥주를 한 병 들고 합석했다. 모두들 내가 소매치기 당한 사건에 관해 다시 유감을 표시하면서 가방을 되찾기를 바랬다.
   월드컵 기간이어서인지 축구이야기를 많이 했고, 한국이 프랑스와 비긴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2002년처럼 준결승에서 한국과 독일이 다시 한 번 붙을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립서비스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18년만에 독일인들과 오로지 독일어로만 대화를 하려니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나더러 도대체 언제 독일어를 배웠냐고 의아해했다. 특히 헝가리에서 온 검사시보는 자기는 같은 유럽인이니까 독일어를 하는 게 이상할 게 없지만, 한국인이 독일어를 하는 것은 정말로 신기하다고 하였다.

   나는 다음 날의 일정을 생각하여 11시 30분쯤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다른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 대개 처음 보는 사람들일 텐데도(독일은 연방국가여서 각 주별로 판사들을 임명하며, 前述한 것처럼 직급별로 모이는 것이 아니어서 참가자들이 천차만별이다) 금방 친해져서 밤새 같이 웃고 떠드는 것이 신기하다.      

   세미나 둘째 날 : 6월 20일, 세미나 둘째 날의 주제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전범재판(뉘른베르크 재판과 동경 재판)에 관한 것, 오후 1시 30분부터 5시까지 유럽인권법원에 관한 것, 저녁 7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유고의 밀로세비치 재판에 관한 것이었다. 어제처럼 강사가 대부분 혼자 구술로 강의하는 식이었다. 미리 준비한 원고도 없이 3시간 넘게 혼자 강의하는 강사도 대단했지만, 꼼짝 안 하고 그 강의를 듣는 사람들도 대단했다.

   2차 대전 후의 전범재판에 관한 강의를 한 Dr. Gerd Hankel은 강의 후 점심식사를 같은 테이블에서 하게 되었는데, 내가 한국에서 온 것을 알고는 자기 쓴 책("유엔, 그 이상과 현실" : Die UNO Idee und Wirklichkeit)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나로서는 당장 그 자리에 마땅히 답례를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는 강의 중에 독일인들은 2차 대전 후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의 재판 결과에 대하여 승복을 하는 데 비하여 일본인들은 동경 전범재판소의 재판 결과에 대하여 승복을 안 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식사 자리에서 독일인 중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하여 승복 안 하는 사람이 없냐고 물으니까, 물론 독일인 중에도 있지만 그 비율이 5%도 안 되며 그들은 대부분 신나치주의자들이라고 한다. 그 점에서 주요 정치인들까지도 동경 재판의 결과에 승복을 안 하는 일본과는 다르다고 힘주어 말한다.

   오후 세미나가 끝난 후 사무과에서 연락이 와 가보니 내가 어제 잃어버린 가방이 놓여 있었다. 도둑놈이 가방에서 귀중품만 꺼내고 어느 호텔에다 버린 모양이다. 쓰레기통에다 버리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도둑놈에게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호텔측에서 가방 안에 있던 법관연수에 관한 각종 서류들을 보고는 법관연수원의 사무과에 연락을 하여 찾아오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귀국비행기표가 그대로 있어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저녁 세미나가 끝나고 나서는 전날처럼 본관 지하의 간이 바에 갈까 하다가 너무 피곤하여 바로 숙소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세미나 셋째 날 : 6월 21일, 세미나의 셋째날이다. 이 날은 아침을 일찍 먹고 참가자 전원이 7시 30분에 함부르크(Hamburg)행 버스에 올랐다.    그 곳에 있는 국제해양법재판소(Internationaler Seegerichtshof ;  International Tribunal for the Law of the Sea)를 견학하러 가는 것이다. 버스로 대략 3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국제해양법재판소는 유엔 산하기구 중 독일에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의 멍에 때문에 독일에는 그 국력에 걸맞지 않게 유엔 산하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1995년 8월 국제해양법재판소가 설립될 때 독일에서 전력을 기울여 이를 함부르크에 유치하였다고 한다.

   재판소 건물은 독일의 도시에 있는 건물답지 않게 현대식 콘크리트건물이다. 출입구에서 검색을 꽤나 까다롭게 한다. 견학을 위해 미리 제출한 명단에 따라 한 명 한 명 이름을 확인하고 들여보낸다. 모든 게 테러 때문이다. 재판관은 모두 21명인데, 우리나라의 박춘호교수가 초대 재판관으로 선출되어 2005년까지 활동하였다.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은 없고 일본인과 중국인은 있다.
   법정은 우리가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엔의 각종 회의장처럼 원형이다. 내부가 꽤나 넓었다.    

   재판소 건물에 관한 안내는 독일 여자가 독일어로 하였으나, 재판소의 구성이나 기능, 재판과정 등에 관한 설명은 필리핀 여자가 영어로 하였다. 그러고 보니 재판소의 각 방실에 붙어 있는 안내판은 모두 영어와 불어로만 씌어 있을 뿐 독일어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분명 독일 땅에 있는 건물이건만...   

 

   재판소에서 재판이 열리는 날은 1년에 며칠 안 된다고 한다. 그 큰 건물을 유지하고 많은 직원들을 데리고 있으려면 비용이 많이 들을 텐데...마치 전쟁을 대비하여 평상시에 많은 비용을 들여 군대를 보유하는 꼴이다.

   국제해양법재판소 견학 후에는 항구로 가서 먼저 점심을 먹고 이어서 유람선을 타고 선상관광을 하였다. 점심식사와 선상관광비용은 모두 각자 부담이다. 우리나라의 법관연수와 또 다른 차이점이다.
   함부르크항에 왔으니 함부르크의 전통 생선요리를 먹어보라는 Dr. Kretzschmar판사(Stuttgart 행정법원 부장판사)의 권유로 그것을 시켰다가 비리고 짜서 거의 먹지를 못했다. 나중에 다른 판사들도 그 요리는 아무나 먹는 게 아니라고 하여 웃고 말았다. 배를 타고 항만을 한 바퀴 도는데, 한진해운의 컨테이너선이 눈에 들어와 반가웠다. “HYUNDAI”라고 씌어진 컨테이너도 야적장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함부르크항 선상관광의 백미는 항만 구경보다는 엘베(Elbe)강의 양안을 둘러보는 것이다. 엘베강은 체코에서 발원하여 독일 북부를 지나 함부르크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강이다(총 연장 1,154Km). 함부르크는 말하자면 엘베강의 종점인 셈이다.
  1987년 여름 윤진수판사가 함부르크에 살 때 놀러 왔을 때는 도심구경만 하느라 몰랐는데, 이번에 배를 타고 둘러보니 함부르크는 마치 베니스처럼 수상도시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성 싶다. 엘베강의 물줄기를 따라 양쪽으로 강물에 잇대어 바로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그 사이로 배들이 다니면서 물건을 운반한다. 건물들은 주로 붉은 벽돌건물인데, 전에는 직물공장이 많았다고 한다. 구불구불 난 물길을 따라 가노라면 마치 미로학습을 하는 것 같다.

   함부르크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고는 그 동안 눈독을 들여온 카약(Kayak)을 타러 루핀호수로 나갔다. 카약은 앞뒤가 뾰족하고 긴 보트(길이 7m, 폭 50cm)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다. 승선인원은 1-2인이다. 호수에 카약을 밀어 넣고 노를 저어 나가니 의외로 쉽다. 독일어에서 해방(?)되어 대자연 속에 홀로 있으니 마음이 한가롭기 그지없다. 썸머타임 덕분에 밤 10시까지도 환한지라 실컷 즐기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세미나 넷째날 : 6월 22일, 세미나 넷째 날이다. 아침 8시 30분부터 오전 내내 세계무역기구(WTO)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강사가 함부르크의 부체리우스 로스쿨(Bucerius Law School) 교수라고 해서 판사들한테 독일에도 로스쿨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독일의 대학은 모두 공립인데, 최근에 함부르크에 유일한 사설 로스쿨이 생겼다고 한다. 정식 대학이라기보다는 직업학교라고 한다. 그곳을 졸업해도 법과대학생들이 보는 국가시험을 치러 합격하지 못하면 법조인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오후 3시부터는 유고 전범재판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강사는 Dr. Jan Nemitz 라는 헤이그 유고전범재판소의 직원(legal officer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이었는데, 권오곤재판관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잘 안다며 내가 그의 동료였다고 하자 반갑다고 하면서 안부를 전하겠다고 하였다. 실제로 전하였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 날은 밤 세미나가 없어 그 동안 친해진 Kretzschmar판사의 제의로 저녁식사 후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나와 Kretzschmar판사 외에 Weymüller판사(뮌헨 재정법원 판사), Lachmund판사(Darmstadt 지방법원 부장판사), Ahlfeld 판사(Ratzeburg 구법원 판사)가 합류하여 총 5명이 함께 나섰다.
   이들 독일 판사들은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아 60이 넘은 사람도 있었으나 너무나 소탈하였다. Ahlfeld 판사는 여자판사로 딸의 나이가 27세이니 할머니나 다름없는데도 남자들 못지않게 자전거를 잘 탔다. 하긴 독일인들에게 자전거 타기는 일상적인 일이니 이상할 것도 없긴 하다. Lachmund판사는 스포츠맨으로 불러도 될 정도로 틈나는 대로 운동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아침마다 루핀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또 틈나면 자전거를 탈 정도이다. 이 날의 자전거 하이킹 인솔자도 Lachmund판사였다.

   루핀호수를 끼고 한 바퀴 돌다 보니 3시간 동안 무려 30여 Km를 달렸다. 때로는 농촌의 오솔길을 지나고, 때로는 노이루핀(Neuruppin) 시내를 지나고,    때로는 숲속을 지나면서 달리는 길이 너무나 상쾌하고 좋았다. 독일 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폰타네(Theodor Fontane)가 태어난 노이루핀은 크지는 않지만 부스트라우와는 달리 번듯한 시가지를 지닌 도시이다. 비록 과거에는 동독에 속해 있었지만 서독의 여느 도시 못지않게 깨끗하게 정돈된 아름다운 곳이다. 반면 농촌에는 빈 집들이 많다. 통독 후에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떠났기 때문이다.

   노이루핀뿐만 아니라 인근의 농촌 마을에서는 아직도 옛집을 헐고 새로 짓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는데, 통일 후 정부에서 보조금을 준다고 한다. Kretzschmar판사는 그 바람에 구서독 주민들의 세금부담이 훨씬 커졌다고 하면서도, 구동독 사람들도 이제는 다 같은 국민이니 감내하여야 한다고 하여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Kretzschmar판사는 일본에 와 본 일이 있어 한국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할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독일신문에 실리자마자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 주었고, 호네커와 김정일 둘 다 공산주의 독재자라고 욕하면서, 두 사람의 차이는 호네커는 적어도 국민을 굶주리게는 하지 않았는데 김정일은 국민을 굶주리게 하여 더 나쁘다고 비난하였다.

    Ruppin호수가 관광지인지라 인근의 마을들에는 호텔(우리 식으로 말하면 모텔이나 펜션)이 많은데, 목이나 축이자고 들른 호텔레스토랑들은 하나같이 문이 닫혀 있었다. 그 만큼 관광객이 없다는 것이자, 구동독사람들이 아직도 시장경제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2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한 레스토랑에서 알콜 없는 맥주로 갈증을 달랠 수 있었다.    

   세미나 다섯째 날 : 6월 23일, 세미나 마지막날이다. 아침 9시부터 오전 내내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관한 강의를 들었고, 오후 1시부터는 2시간 동안 테러와의 전쟁에 관한 유엔 안보리결정에 관한 강의를 듣는 것으로 세미나 일정이 끝났다. 공식적으로는 다음날까지 계속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다음 날은 짐 싸서 헤어지는 일만 남았기 때문에 많은 참가자들이 이날 오후에 떠났다. 그래서 사무과에서도 세미나 참가증서(Teilnahmebescheinigung)를 이날 오후에 나누어 주었다.
   나 역시 더 이상 머무를 필요성이 없어서 짐을 꾸려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이제부터는 대법원의 배려로 얻은 1주일간의 휴가를 즐기기 위한 즐거운 여행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폴란드

   6월 23일 오후 기차로 부스트라우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비행기(저녁 7시 10분 출발)를 타고 체코의 프라하로 간 다음(저녁 8시 10분 도착) 거기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밤 10시 출발) 브루노로 갔다. 브루노 공항에 내리니 밤 10시 45분이다. 체코에서 택시를 탈 때는 미리 목적지를 말하고 요금을 정한 후에 타지 않으면 바가지를 쓸 염려가 있다는 말을 독일 판사들한테서 들었기 때문에 들은 대로 했다. 공항에서 시내의 Voronez 1 호텔까지 택시요금이 400 크로네(우리 돈으로 2만 원 정도)였는데, 거리가 제법 되어 바가지를 쓴 것 같지는 않았다. 호텔에 도착하자 이날 서울에서 온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포커스투어 여행사의 동유럽 5개국 일주 패키지여행으로 온 것이다.      

   6월 24일, 아침 6시에 모닝콜을 해준다고 하였지만 그보다 이른 5시에 눈을 떴다. 시차 적응이 안 된 탓에 집사람이 일찍 일어난 것이다. 창밖을 보니 썸머타임 덕에 벌써 훤하다. 아침 식사가 6시 30분부터인지라 그 전에 호텔 주위를 산책하였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아침(이후의 여행 기간 내내 아침은 뷔페식이었다)을 먹고 8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로 향하였다.

   (1) 아우슈비츠

   체코에서 폴란드로 들어가는 국경에서 여권 검사를 하느라 1시간 정도 지체한 것을 포함하여 5시간 정도 걸려 아우슈비츠(Auschwitz)에 도착하였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어이고 폴란드어로 된 지명은 오슈비엥침(Oświęcim)이다. 영화 “쉰들러리스트”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진 이곳에는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정치범, 집시 등 200만 명을 학살한 수용소가 있다. 독일군이 패망하여 퇴각하면서 미처 현장을 파괴하지 못해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수용소로 들어가는 아치형의 정문에는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진다)
는 문구가 씌어 있다. 가증스런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수용자의 탈출을 막기 위한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수용소에는 붉은 벽돌로 된 막사들이 여러 동 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당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 그 당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이 가지고 왔던 소지품(가방, 빗, 안경, 신발 등), 그들의 머리카락으로 짠 직물, 그들이 입었던 옷, 대량학살에 사용한 독가스통(‘Cyklon B’라는 가스로 1통으로 400명을 죽일 수 있다)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간이법정, 지하감옥이 설치된 건물도 있고, 악명 높은 가스실, 정치범을 총살하던 사형장, 집단적으로 교수형을 집행하던 교수대, 학살한 시체를 태우던 화장장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보는 사람을 전율케 한다.

   독일군들이 아우슈비츠에 이런 대규모 수용소를 건설한 이유는 이곳이 우랄산맥 서쪽의 유럽지역에서 동서남북의 중심에 해당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우슈비츠의 수감자가 늘어나자 나중에는 아우슈비츠에서 멀지 않은 비르케나우(Birkenau. 폴란드어로 된 지명은 브제진카 Brzezinka)에 그 몇 배에 달하는 제2수용소를 세웠다. 그런데 이 수용소는 대부분 2차 대전 말기에 대부분 파괴되었다고 한다.

   독일군들은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에게 일자리를 준다고 속여 아우슈비츠로 데려와서는(나중에는 강제로 데려왔다) 그들이 가져온 귀중품(삶의 터전을 옮기는 데 있어 간단히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은 바로 귀중품이다. 독일군들은 이 점을 이용한 것이다)은 모두 빼앗고(전쟁물자로 사용하기 위해) 70-80%는 도착 즉시 목욕을 시킨다며 가스실로 보내 학살했고, 나머지는 중노동을 시키거나 실험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도착 당시 70Kg이었던 몸무게가 기아와 중노동에 시달린 끝에 1년만에 25Kg으로 된 사람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수감자들이 중노동에 시달리며 먹었다는 멀건 죽을 보노라면 사람이 산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TOD MACHT FREI!”
 
그렇다, 일이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죽음이 자유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2) 크라쿠프(Kraków)

   아우슈비츠에서 2시간 정도 관광을 한 후 크라쿠프로 이동하였다. 버스로 이동시간은 대략 1시간 20분. 폴란드의 동남부에 위치한 크라쿠프는 폴란드 제2의 도시로 한국의 경주에 해당한다. 결국 아우슈비츠는 크라쿠프의 근교에 있는 작은 도시인 셈이다.
   크라쿠프는 1596년 바르샤바가 폴란드의 수도로 되기 전까지 폴란드의 수도였다. 그래서 구시가지는 중세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1978년 유네스코가 세계 12대 유적지의 하나로 지정하였다. 당연히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붐빈다. 前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이 되기 전에는 바로 이곳 크라쿠프 성당의 대주교였다.     

   크라쿠프에 도착하여 고풍스런 거리를 이리저리 지나 버스에서 처음 내린 곳은 바벨성 앞이다. 바벨성(Zamek Królewski na Wawelu)은 시내를 관통하는 비스와강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세워진 성이다. 폴란드의 대표적인 상징적 건물인 이 성은 11세기부터 짓기 시작하여 16세기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일견하여 멋있어 보이는데 아쉽게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가이드는 수리중이라고 하지만, 과연 정말로 수리중인 것인지, 안으로 들어가려면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 하는 것이 아까워서 여행사에서 잔꾀를 부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성을 올려다보는 강가의 잔디밭에는 더운 날씨에 몰려나온 인파가 붐빈다. 특히 젊은 남녀들의 거침없는 애정표시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지금은 과거의 공산주의국가가 아닌 것이다. 강위에 떠 있는 유람선조차 여유롭다.
      
   바벨성에서 구시가지로 이동하였다. 구시가지에 있는 중앙시장광장은 현존하는 유럽 중세의 광장 가운데 제일 크다고 한다. 광장 주위에는 고딕과 르네쌍스식이 혼재한 직물회관, 고딕양식의 성 마리아 성당, 지름 3미터의 대형 시계가 걸려 있는 구시청사탑이 있다.
   가이드가 자유시간 1시간을 주어 집사람과 이곳저곳을 다니며 구경할 수 있었다. 막판에 직물회관 1층의 기념품상점가로 갔는데, 폴란드 특산품인 호박(소나무의 송진이 땅에 묻혀 굳어져 화석이 된 것. 화석으로 되는 과정에 곤충이나 벌레가 안으로 들어가 원형대로 있다)제품이 브로치, 목걸이, 반지 등 다양한 형태로 팔리고 있었다. 집사람이 브로치를 하나 샀는데, 그 가격이 서울 남대문시장의 1/5밖에 안 한다고 좋아한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가치가 과연 얼마나 되는 건지 알 길이 없다.
  
   자유시간을 끝내고 오후 7시에 경북관(京北館)이라는 중국집에서 저녁을 먹고 노보텔(Novotel)호텔로 이동하여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한국에서 멀리 동유럽까지 여행 와서 그것도 썸머타임 때문에 아직 바깥이 훤한 시간에 자기에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패키지여행의 특성상 여행사가 짜놓은 일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지라 어쩔 수 없다. 저녁식사와 호텔 투숙을 1시간만 늦추어 자유시간을 좀 더 주었면 좋았을 것을....

   (3) 비엘리츠카(Wieliczka)의 소금광산

   6월 25일, 이 날도 역시 아침 5시에 눈이 떠졌다. 언제나 시차 적응을 하려나... 노보텔호텔은 세계적인 규모의 체인호텔답게 아침식사가 풍성했다. 특히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많아서 좋았다.  

   아침 8시 30분, 호텔을 출발하였다. 목적지는 비엘리츠카(Wieliczka)의 소금광산. 크라쿠푸에서는 자동차로 30분 거리이다. 광산이라고 하면 석탄이나 철광석을 캐는 곳을 연상하기 십상인데 이곳에서는 땅 속에서 소금을 캔다. 광산 입구에서 광부의 모습을 한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800여개나 되는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간다. 바깥 날씨는 반팔을 입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이 안에서는 긴 팔 옷을 입지 않으면 추위에 떨어야 한다.

   소나무로 만든 계단의 통로에는 각국 말로 씌어진 낙서가 즐비하다. 당연히 한글 낙서도 있다. 하나뿐인 통로에 관광객이 몰려 정체현상이 벌어지면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하기 시작한 낙서가 이제는 일반화되어 아예 가이드가 낙서를 권하기까지 한다. 그 소리에 나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서울에 두고 온 두 아이의 이름을 써놓았다.
   나무계단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소금광산이 나타난다. 이제부터는 천장과 바닥, 그리고 좌우가 모두 소금이다. 말하자면 거대한 소금덩어리의 가운데에 동굴을 파서 길을 낸 셈이다. 이곳에 이런 소금광산이 있다는 것은 이곳이 태고적에는 본래 바다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지각변동으로 육지가 되어 지금은 땅속에서 소금이 나오는 것이다.

   소금광산의 내부에는 광산의 수호신인 킹가공주(헝가리공주로 폴란드 왕자와 결혼하였는데, 이 광산을 처음 발견하였다고 한다),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폴란드사람이다), 이곳을 방문했던 괴테 등의 동상과 같은 각종 소금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하 110m에 있는 킹가성당이다. 넓기도 하려니와 일반 성당과 마찬가지로 예수상을 비롯한 각종 부조물이 가득한데 그것이 전부 소금이란다. 언뜻 보면 재료가 대리석처럼 보인다.
   그 중에서도 미켈란젤로의 그림 “최후의 만찬”을 조각해 놓은 것이 백미이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조차도 소금이라는 데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들을 남긴 사람이 유명한 예술가가 아니라 바로 이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이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광산의 내부에는 지하수가 흐르고 초록색의 연못도 있으니 이 또한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광산이 땅속 깊이 지하에 있으니 내부 공기가 탁할 것 같은데 오히려 공기가 더 깨끗하여 호텔이 있고, 그곳에서 오래 머무르며 요양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정말 모를 일이다.

   2시간 정도 걸려 광산 내부를 다 둘러보고 지하 135m 지점에 있는 엘리베이터 타는 곳으로 갔다. 관광객은 많은데 엘리베이터는 두 대뿐인지라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잠시 후 우리말로 이동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싸게싸게”, “빨리빨리”.

그리고 이어서 

   “천천히”.  

그런데 그 억양이 다소 이상하여 자세히 보니 폴란드 관리직원이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게 아닌가. 전라도 사람이 얼마나 많이 다녀갔길래 “싸게싸게”라는 사투리까지 배웠을까...
   아무튼 이 광산에서는 감탄의 연속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다시 나오는 데는 불과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마치 어둠을 뚫고 광명 속으로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지상의 기념품점에서 선물용으로 소금을 몇 통 샀다. 한 통에 2유로.          

슬로바키아

    비엘리츠카의 소금광산을 구경한 후 크라쿠프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슬로바키아로 출발하였다. 오후 4시경 국경을 통과하자 곧바로 산악지대이다. 동유럽의 알프스라는 타트라(Tatra)산맥을 통과하여야 하는 것이다. 대략 2,500m급(최고봉은 2,655m) 산들이 이어지는 이 산맥은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의 국경지역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해발 1,000m의 고갯길을 넘으면서 보니 산들의 정상 부근에는 아직도 눈이 보인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만년설은 아니라고 한다. 침엽수가 울창한 고갯길이 운치가 있다. 이 산악지대에는 유럽에서는 보기 드물게 시냇물이 흐른다. 타트라산맥은 석회암지대가 아니고 화강암지대인가? 알 길이 없다.

   산악지대를 벗어나 오후 5시 45분, 레보카(Levoca)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하였다. 헝가리까지 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중간에 기착하는 곳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도시가 마음에 쏙 들었다. 돌로 쌓은 성안에 있는 구시가지는 규모가 작으면서도 매우 아름다웠다.
   우리가 투숙한 자텔(Satel)이라는 호텔은 별 4개의 1급호텔인데, 크지는 않으나 1998년에 유럽국가들(몇 나라가 참가했는지는 모른다)의 정상회담이 열린 곳이다. 아마도 휴양지를 택해서 열렸던 것 같다. 그 중에서 내가 잔 방(205호)은 체코의 하벨 대통령이 묵은 방으로 이를 기념하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호텔방의 바닥이 마루인 것이 특이했고, 안에 비치된 가구들은 고색창연하였다. 창문을 열면 바로 공원이 내려다보인다.

   저녁식사 시간을 전후하여 시내를 산책하였는데, 중세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 사이로 난 길과 공원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집사람은 이 다음에 늙어서 이런 곳에 집을 하나 사놓고 휴양을 하면 좋겠다고 하는데, 글쎄 1주일만 지나면 지루해지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멋진 건물들의 뒤로 돌아가면 금방 허름한 뒷골목의 슬럼지대가 나타나는 것은 뭐란 말인가? 서유럽의 도시와 차이가 나는 점이 바로 이 부분 아닌가 싶다.  
   그림엽서를 한 장 살까 하고 기념품점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잔돈을 유로화가 아닌 슬로바키아돈으로 거슬러 준다고 하여 포기했다.

   6월 26일, 6시 30분에 모닝콜이 울렸지만 무시하고 7시까지 잤다. 드디어 시차가 극복된 것이다.
   호텔이 작아서인가, 경제력을 말해주는 건가, 아침식사가 영 부실하다. 이번 여행 기간 중 가장 먹을 게 없는 아침이었다. 빵은 쇠떡심처럼 질겼고, 과일도 없었다. 늦게 일어나 식욕도 별로였기 때문에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아침 8시 30분에 출발한단다. 이번 여행의 특징 중 하나가 아침 출발 시간이 늦다는 것이다. 패키지여행을 따라가면 아침 7시면 출발하는 게 예사인데 이번에는 아니다. 아침잠이 많은 사람에게는 딱 좋지만, 아무래도 관광하는 시간이 그만큼 짧아지고, 무엇보다도 오전의 선선한 시간대에는 내내 차를 타고 이동하고 오후의 햇볕이 따가운 시간대에 관광을 하게 되는 게 안 좋다. 그래서 일행 중에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끝까지 그 기조를 유지했다.    

헝가리

    6월 26일 12시 30분, 국경을 통과하여 헝가리로 들어섰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여 점심식사장소인 한식당에 도착하니 오후 2시 40분. 예정보다 1시간 40분이나 늦었다. 모두들 허기가 져서 짜증스런 표정이 역력하다. 거기에 날씨마저 찌는 듯 더워 한 몫 거든다. 레보카에서 7시에만 떠났어도 이러지는 않았을텐데.... 아무래도 여행사의 기획능력에 회의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아침도 대충 때우고 유럽에 와서 8일만에 먹는 한식이었건만 비빔밥이 왜 그리도 맛이 없는지...이래저래 못마땅하다.

   점심 식사 후 헝가리공과대학에 유학중인 한국인 가이드의 안내로 시내관광에 나섰다. ‘동유럽의 장미’ 혹은 ‘다뉴브강의 진주’로 불리는 부다페스트는 본래 도시 한 가운데를 흐르는 두나(Duna)강(다뉴브강은 영어이다)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상류층 거주지인 부다(Buda)와 동쪽의 서민층 거주지인 페스트(Pest)로 갈라져 있었는데, 강에 세체니다리가 놓이면서 교류가 활발해져 1873년 하나의 도시로 합쳐졌다고 한다.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도시를 부단히 재건하여 현재는 인구가 20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변모하였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이 페스트지구의 성 이슈트반 성당(Szent Istvan-Bazilika)이다.   896년 헝가리를 건국한 이슈트반 국왕을 기리고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성당이다. 성당의 탑 높이가 96m인데 이는 건국원년인 896년을 의미한다고 한다. 성당 안에는 이슈트반의 오른 손이 실물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성당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성당 중앙의 예배단에 예수님이 아닌 이슈트반 국왕의 상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로마교황청에서 성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가 한참 후에 이슈트반 국왕이 헝가리에 카톨릭을 크게 전파한 공을 인정하여 성당으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성당을 나와 두나강을 건너 부다지구의 겔레르트언덕(Gellért-hegy)으로 갔다. 두나강가에 있는 바위 언덕이다. 해발 고도가 235m에 불과하지만 여기에서 부다페스트의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마치 서울의 남산과 비슷한 셈이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의 양옆 가로수마다에는 삼성전자의 로고가 새겨진 깃발이 걸려 있다. 해외에서 한국을 가장 잘 알리는 것은 정치인도, 법조인도, 문화예술인도 아닌 바로 기업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언덕을 내려와 찾아간 곳은 어부의 요새(Halászbástya). 역시 두나강가의 언덕에 있다. 뾰족한 고깔 모양의 흰 탑 7개가 마치 동화속의 나라를 연상시킨다. 수 천 년 전 헝가리를 건국한 7명의 마자르족을 상징한다. 19세기에 이곳에서 어부들이 적의 침입을 막았다고 하여 ‘어부의 요새’로 불린다. 말 그대로 요새여서 전망이 매우 좋다. 페스트 지역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어부의 요새 바로 옆에는 마챠시교회(Mátyás Templom)가 있다. 13세기에 세워진 이 교회는 고딕양식으로 헝가리왕의 대관식이 열리던 곳이다. 마침 수리중이서 내부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마챠시교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는 부다왕궁(Kiralyi Palota)이 자리하고 있다. 17세기에 지어진 바로크양식의 웅장한 궁전인데, 정작 헝가리왕보다는 150년 동안 헝가리를 지배한 합스부르크왕가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1,2차 세계대전 때 많이 파괴된 것을 1950년대에 복원하였지만 그 때는 헝가리가 왕국이 아닌 공화국으로 바뀐 때였기 때문에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으로 바뀌고 말았다.    

   부다왕궁에서는 두나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특히 강을 가로지르는 세체니(Szécheny) 다리가 인상적이다. 1849년에 세워진 현수교로 유럽에서는 영국의 타워브리지와 쌍벽을 이루는 다리이다. 그래서 이 다리에 대한 헝가리인들의 자부심이 매우 크다. 다리 이름인 세체니는 이 다리를 놓는 아이디어를 낸 세체니백작의 이름이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강을 건너야 했는데 날씨가 나빠 8일 동안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그래서 두나강에 다리를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처음 생긴 다리가 바로 세체니 다리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다리의 개통으로 부다와 페스트가 합쳐져서 1873년 부다페스트가 탄생한 것이다.
다리 위의 개선문을 닮은 조형물과 다리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상도 눈길을 끈다.

   세체니 다리에서 눈길을 왼쪽으로 조금만 돌리면 국회의사당 건물이 보인다. 네오고딕 양식의 이 건물은 마치 궁전처럼 화려하다. 역시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해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건물 중앙과 주위를 돌아가면서 뾰족하게 세워 놓은 탑의 숫자가 모두 365개인데, 이는 1년 365일 내내 올바를 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바램이 담긴 것이라고 한다. 중앙에 있는 가장 높은 탑의 높이는 성 이슈트반 성당처럼 96m이다. 건국연도인 896년을 상징하는 것은 물론이다.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이다 보니 때가 잘 타서 구역을 나누어 늘 청소를 하여야 하는데, 한 쪽을 청소하다 보면 이미 청소했던 다른 쪽이 다시 더러워져 골치라고 한다.

   시내 관광을 마치고 처음으로 쇼핑센터에 들렀다. 헝가리의 포도주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집에 술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여행일정이 많이 남았는데 그것을 끌고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사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관절이 아픈 데 바르면 금방 통증이 가라앉는다는 연고를 12유로 주고 하나 샀다. 정말로 효험이 있다면 여러 개를 샀겠지만 검증할 길이 없어 하나만 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더 살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저녁식사로 헝가리식 전통음식인 구야쉬(Guláys)를 먹었다. 쇠고기, 감자, 양파를 잘게 썰어 파프리카를 넣고 끓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육개장 비슷하다고 하여 기대가 컸으나, 역시 너무 짜서 뜨거운 물을 달래 부어서 먹어야 했다. 아무튼 이번 여행 내내 그 나라의 현지식 식사로 나오는 것은 어느 나라를 가든 짜서 먹기가 힘들었다.

   저녁을 먹고 두나강에서 유람선을 탔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른바 ‘다뉴브강의 야간유람선’이다. 그러나 썸머타임 때문에 밤 9시는 되어야 어두워지는 것을 8시도 안 되어 유람선을 타야 했으니... 두나강의 야경을 밝하는 조명들이 빛을 막 발하기 시작할 무렵 배에서 내리는 바람에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즐기는 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유람선을 타고 강의 양쪽을 구경하다 보면 부다쪽의 언덕에 자유의 여신상 같은 동상이 하나 보인다. 2차 대전 후 소련군이 진주하여 독일군으로부터 헝가리를 해방시켜 주었다고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의 시선이 향하는 곳도 바로 모스크바라고 한다. 그 후 헝가리가 소련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가를 생각하면 그 동상이 아직도 그냥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게 용하다 싶었다. 그것도 하나의 역사라고 생각해서 그냥 두고 있는 모양이다.

   유람선에서 내려 숙소인 머큐어 호텔(Mercure Hotel Buda)에 도착하니 밤 9시 30분. 피로가 몰려와 바로 잠이 들었다. 호텔은 깔끔하면서도 규모가 제법 큰 1급호텔이다. 베를린에서 1박한 호텔도 머큐어 호텔이었는데 아마도 체인점인가 보다. 그렇다면 오늘과는 달리 내일 아침식사는 푸짐하겠군...

오스트리아

    6월 27일. 지난 밤에 푹 잤던 덕분인가, 아침 6시에 일어났는데 몸이 가볍다. 예상대로 호텔의 아침식사는 푸짐하였다. 나는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풍성하여 좋았는데, 집사람은 특히 치즈가 다양하여 마음에 든다고 한다.
   호텔 출발시간은 여전히 아침 8시 30분이다. 출발 후 3시간 정도 지나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국경을 통과하였는데, 이제까지는 단체로 여권검사를 하더니 여기서는 한 명씩 개별적으로 한다. 서구와 동구의 차이인가?
  
  (1) 빈(Wien)

   12시 30분. 우리에게는 오히려 비엔나로 더 잘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도착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도심에 있는 아끼가꼬(Akikako)라는 간판이 붙은 일식당에서 한식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음식은 먹을 만했고, 식당주인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빈은 18년 전인 1988년에 한 번 와 본 곳이다. 그 당시 보았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쇤브룬(Schönbrunn) 궁전과 베토벤, 슈베르트, 브라함스, 슈트라우스 등 유명 음악가들의 무덤이 있는 중앙묘지(Zentralfriedhof) 정도이다. 그래도 한 번 와 본 곳이고, 말을 독일어를 쓰고, 돈은 유로화를 쓰는 곳이라 왠지 모르게 낯익은 감이 든다. 마음도 훨씬 안정되고...

   점심 식사 후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쇤브룬(Schönbrunn) 궁전이다. 차에서 내리니 찌는 듯한 더위가 기다린다. 근래 전세계적으로 발생하는 이상기후가 여기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이 궁전은 오스트리아를 오랜 기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이다.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女帝의 숨결이 곳곳에 스며 있다.
   궁전의 내부에는 방이 무려 1,441개나 있고, 그 중 45개가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 방들만 둘러보는데도 1시간이 족히 걸렸다. 방마다 실내장식의 화려함이 보는 이의 혀를 내두르게 한다. 유럽 왕족들의 사치 이면에 서려 있을 평민들의 고초가 떠올라 씁쓸하다.
   그에 비하면 인본사상이 머리에 배어 자나 깨나 어린 백성들의 삶을 생각하며 검소한 생활을 한 우리나라 임금님들은 정말로 선비 중의 선비라고 할 수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그 어디를 간들 유럽의 왕궁에서 볼 수 있는 호화사치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다만 아이러니는 백성의 고혈을 짜내 호화판 궁전을 지은 선조가 있는 나라들은 그 덕분에 오늘날 막대한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어 후세의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쇤브른 궁전은 그 정원이 또한 유명하다. 죄우에는 숲이 우거지고 가운데는 꽃과 잔디가 어우러진 이 정원은 한국 에버랜드의 모형이 되기도 하였다. 정원 끝의 넵툰분수(Neptunbrunnen) 뒤 언덕길을 올라가면 그리스 신전을 본딴 건물인 글로리테(Gloriette)가 있다. 여기서 반대편을 내려다보면  쇤브룬 궁전건물과 그 뒤로 빈의 전경이 보인다.

   궁전 구경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다가 오페라극장(Staatsoper)을 지나게 되었다.
   빈대학에서 음악공부를 하는 유학생인 한국인 여자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극장은 현재 파리의 오페라하우스, 밀라노의 라 스칼라와 더불어 세계 3대 오페라극장으로 손꼽히는데, 1869년 5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개관 기념으로 상연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건물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무슨 건물이 밀가루포대를 물에 넣었다 꺼낸 것처럼 후즐그레하냐”는 혹평이 쏟아져 이 건물을 설계한 두 명의 건축가 중 한 명은 자살을 하고 다른 한 명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이번 여행 중 만난 현지가이들 중에서 빈의 가이드가 가장 알기 쉽게 설명을 해서 인기를 끌었는데, 이 가이드로부터 들은 이야기 한 토막.  

   빈에는 한국인이 3,000명 정도 산다. 그 중 90%가 유학생이고, 유학생의 90%가 음악도이며, 음악도의 90%가 여자이다. 한국에서 음악을 전공할 정도이면 그 자체로 일단 넉넉한 집안의 딸일텐데, 거기에 더하여 이곳까지 유학을 올 정도이면 확실히 돈깨나 있는 집의 딸일 게 틀림없다. 그녀들의 나이는 대개 30세 전후인데, 문제는 남자가 없다는 것이다. 유학생의 대부분이 여자이니 말이다. 때문에 이곳에서 남자 유학생의 가치는 그가 무엇을 전공하느냐, 잘 생겼느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그야말로 하늘을 찌른다. 한 남자가 보통 5-6명의 여자랑 번갈아가면서 데이트를 하면서도 늘 목에 힘을 주고 다닌다. 한 마디로 모두 왕자병에 걸려 있다. 그러니 한국에서 장가 못가 걱정하는 총각들 어떻게든 이곳으로 유학만 오면 모든 게 저절로 해결된다.  

  믿거나 말거나인데, 음악을 전공하는 여자유학생의 이야기이니 안 믿기도 그렇다. 여기에 덧붙여 이어지는 이야기인즉,

   오스트리아 남자들이 동양여자를 좋아하는데, 그 타입이 재미있다.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흔히 보는 탤런트들의 타입, 즉 콧날이 오똑하고, 쌍꺼풀이 지고, 얼굴이 갸름하고, 피부가 하얗고, 머리카락의 색깔이 갈색(염색한 것)인 여자들은 그야말로 인기가 빵점이다. 이유는 그런 여자는 길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양여자들이 다 그런 타입이니 신비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얼굴이 넓적하고, 쌍커풀이 안 지고, 코가 낮고 뭉툭하며, 머리카락이 까만 여자가 무조건 환영을 받는다.  

이거야말로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린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 앞에서 버스에서 내렸다. 이곳에서부터 구왕궁을 거쳐 스테판 성당까지 가는 길이 빈 구시가지의 중심부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에서 정말로 대단한 女帝였던 모양이다. 가는 곳마다 그녀의 동상이나 그녀의 이름을 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막내딸이 바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로서 온갖 사치를 누리다가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뜨와네트라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은 한 가운데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동상이 있고, 광장의 양 옆으로 자연사 박물관과 미술사 박물관이 있다. 둘 다 르네쌍스 양식의 고풍스런 건물이다.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이 광장을 지나 도심쪽으로 더 들어가면 다시 광장(이름이 Heldenplatz)이 나오는데, 그 정면에는 구왕궁(Hofburg)이 있고, 오른 쪽으로는 신궁전(Neue Burg)이 있다. 정면에 보이는 구왕궁 건물은 본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궁이었으나, 지금은 대통령의 집무실, 승마학교,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오른편의 신궁전은 건물 앞에 16세기 오스만 터키의 침략을 물리친 오이겐(Eugen) 왕자의 기마상이 있으나, 정작 내부는 박물관과 국립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왕궁 건물 안으로 나 있는 통로를 지나 5분 정도 내려가면 최고의 번화가인 그라벤거리(Graben Strasse)가 나온다. 서울의 명동쯤에 해당하는 차 없는 거리이다. 길의 양쪽으로 명품을 파는 각종 상점들이 즐비하고 고급레스토랑과 카페, 기념품가게도 많다. 굳이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아이쇼핑에 딱 좋은 곳이다. 카페와 기념품가게는 밤늦게까지 문을 연다. 당연히 사람들로 붐벼서 카페에서 맥주나 커피를 한 잔 마시려 해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이 거리의 끝에 슈테판성당(St. Stephansdom)이 있다. 12세기에 세워진 오스트리아 최고의 고딕성당이다. 23만개의 벽돌로 지었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첨탑의 높이가 137m나 된다.
   마침 첨탑은 수리중이었는데, 밖에 내걸은 현수막에 “첨탑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Der Streffl braucht Hilfe)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씌어 있다. 아마도 수리를 위하여 시민들의 성금을 모으는 모양이다.
   안에 들어가니 스테인드글라스가 무척이나 화려하고, 많은 관광객들로 붐벼 혼란스러웠다.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또한 그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러졌다고 한다. 내부의 기념품코너에서 5유로를 주고 모차르트우산을 하나 샀다.      

   슈테판 성당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시립공원(Stadtpark)으로 갔다. 숲이 우거진 이 공원은 1862년에 문을 열었다니 꽤나 오래된 공원이다. 요한 슈트라우스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공원의 상징물이다. 당연히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빈다. 마침 거리의 화가 한 분이 그 곳의 풍경을 그려 팔고 있어 하나 사려고 값을 절충하다가 그만두었다.  
   빈에는 구경거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건만 아직 오후 5시밖에 안 되었는데 가이드가 일행을 쇼핑센터로 인도한다. 패키지여행의 단점이다.

   그나저나 간판이 재미있다. 다름 아닌
     “Vienna 명품관”.  
한국인 여자 사장이 운영하는 명품관이다. ‘Wien’에 있는데도 굳이 ‘Vienna’라는 표현을 쓴 것만 봐도 현지사람들보다는 한국인 관광객을 주고객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바로프스키 보석, 가이거 옷과 가죽제품, 쌍둥이칼, 각종 커피 등을 두개 층의 제법 넓은 매장에서 팔고 있다. 대로상에서 이만한 상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장사수완이 뛰어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구경만 하고, 집사람은 서울보다 싸다면서 커피를 두 봉지 사는 데 그쳤다.  

   쇼핑센터에서 나와 오스트리아 현지식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 동안 현지식 식사라고 하면 번번히 짜서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도 배고픈 상태에서 자게 생겼네 하고 지레 짐작하였는데, 예상과는 정반대이다.    
   도심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외곽의 숲속에 자리한 식당건물부터 참 예뻤고, 음식 또한 전혀 짜지 않고 정갈했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클린턴, 소련의 고르파초프 등 여러 나라의 정상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호이리히(Heurig)식 음식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다.
   식사 중에 악사 둘이 와서 생음악 연주를 한다. 헝가리의 음대교수가 아들을 대동하고 부업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으로 아리랑, 소양강처녀, 만남 등 우리 노래를 제법 훌륭하게 연주하였다.  

   식당 입구에서 거리의 화가로부터 그림을 두 장 샀다. 하나는 스테판 성당을 그린 그림으로 집사람이 골랐고, 다른 하나는 국립오페라극장을 그린 그림으로 내가 골랐다. 이 화가 양반 친절하게 그림 뒷면 자필 사인을 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선택관광으로 80유로를 내고 음악회를 가는 사람들과 헤어져 나와 집사람은 다시 구시가지로 갔다. 말과 유로화가 통한다고 생각하니까 거리낄 게 없었다. 그라벤거리는 밤이 깊었는데도 인파로 넘쳐났다. 여기 저기 명품점에서 아이쇼핑을 하다가 한 기념품점에 들러 선물용 커피와 초콜렛을 샀다. 올해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라서 그런지 초콜렛상자마다 온통 모차르트 얼굴이다. 하긴 모차르트우산까지 팔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모차르트 우산이 있어서 값을 물어보니 7유로란다. 위대한 음악가 한 명이 온 나라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하면 너무 심한 과장인가.

   다리가 아파 쉴 겸 노상카페에 앉아 거피와 주스를 한 잔씩 주문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엔나 커피의 정식 명칭은 ‘아인슈패너’(Einspänner) 커피이다(커피가 이곳에 알려진 당시의 교통수단인 마차를 끌던 마부들이 한 손에는 말고삐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기 위해 커피에 설탕 대신 생크림을 거품으로 해서 넣어 마신 것이 그 유래라고 한다. Einspänner는 ‘한 마리의 말이 매어져 있는 마차의 마부’라는 뜻이다). 거품 크림을 넣은 커피의 본고장에서 한 번 그 맛을 보자고 주문했는데, 특별한 맛은 모르겠다. 하긴 평소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내가 그 맛을 어찌 알리오. 집사람은 오히려 멜랑에(Melange) 커피가 낫다고 한다. 멜랑에 커피는 뜨거운 우유를 넣은 카페라테이다.

   모처럼 자유시간을 만끽하고 일행들을 만나러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낮에는 그렇게 햇볕이 뜨거웠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이 갑자기 시커멓게 되면서 천둥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유럽의 여름날씨는 늘 이 모양이다. 독일 부스트라우에서도 익히 겪은 날씨인 것이다.
   빈 교외에 위치한 작센강 호텔(Hotel am Sachsengang)에 도착하였을 때는 어느 새 밤 10시 30분이다. 밤낮으로 걸어 피곤한 탓에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꿈나라로 직행하였다.

  (2) 잘쯔부르크(Salzburg)와 잘쯔캄머굿(Salzkammergut)

   6월 28일. 모닝콜에 맞추어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났다. 어제는 밤늦게 도착하여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작센강 호텔은 푸른 초원 위에 자리잡고 있는 2층짜리 자그마한 호텔이다.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면서 집사람이 포커스투어 여행사가 호텔 하나는 잘 잡는다고 촌평을 한다. 다만, 주위 경치에는 미치지 못하게 아침 식사가 별로이다.    
   현관 입구에서 역시 모차르트 우산을 팔길래 값을 물어보니 앗, 4유로란다. 얼른 선물용으로 몇 개를 샀다. 이 우산은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다. 나중에 우리 일행 중의 한 사람은 잘쯔부르크에서 9유로나 주고 샀다.

   아침 8시 30분에 출발했는데 잘쯔부르크에 도착하자 벌써 오후 1시다. 화려도(華麗道)라는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매우 좋았다. 식사 후 시내 관광에 나섰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모차르트의 출생지로 잘 알려져 있는 도시인 잘쯔부르크는 그 이름(소금 Salz +성 Burg)이 말해 주듯 본래 소금(암염)산지였다. 그래서 일찍부터 경제적으로 번영하였고, 1816년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되기 전까지는 독립된 주권을 가진 도시로 대주교가 통치하였다.

   시내 관광의 제1보로 미라벨 정원(Mirabell Garten)으로 갔다.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정원이다. 갖가지 꽃이 만발해 있고, 곳곳에 조각들이 놓여 있다.  
   정원 안에 있는 궁전은 이곳의 주인이자 당시 잘쯔부르크의 통치자였던 디트리히 대주교가 살로메라는 연인을 위하여 세워준 것이다. 대주교가 애인을 둔 것도 모자라 궁전까지 지어준 것을 가지고 인간적이라고 하여야 하나, 당시 천주교의 타락상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여야 하나... 아무튼 이 궁전은 후임 대주교가 부임하자마자 일반인에게 개방해 버렸다고 한다.    

   미라벨 정원을 나와 시내를 관통하는 잘쯔강을 건너 시내 중심가로 갔다. 도시가 크지 않은 까닭에 가이드가 아예 1시간의 자유시간을 주고는 마음껏 구경하고 오라고 한다. 나와 집사람은 18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모차르트광장, 모차르트생가, 레지던츠광장, 대성당 등을 휙 둘러보았다. 무엇보다도 호헨잘쯔부르크 성(Festung Hohensalzburg)에 올라가 보고 싶었으나 짧은 자유시간으로는 불가능하여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18년 전에도 그랬는데... 저 성을 보려면 다시 18년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모차르트 생가에는 모차르트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볼 만하지만, 이미 전에 본 일이 있는지라 그 앞에서 기념사진만 한 장 찍었다. 대신 시간을 아껴 과일 야채시장을 둘러보았는데, 체리가 너무 맛있고 값이 싸서 한 봉지 사다가 다음 날까지 먹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시내관광을 마치고 곧바로 버스에 올라 잘쯔캄머굿(Salzkammergut)으로 이동하였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잘쯔부르크와 함께 배경으로 나온 곳으로, 여러 개(모두 76개라고 한다)의 호수와 산들이 한데 어울려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 중 볼프강(Wolfgang)이라는 조그만 마을에 내려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탔다. 볼프강호수(Wolfgangsee)를 가로질러 길겐(Gilgen)이라는 곳에 도착하기까지 40분간 배를 타는데 푸른 호수와 푸른 초원이 연출하는 수려한 풍경에 넋을 잃는다.    

   나이 60이 넘은 유람선 선장은 산타클로스를 연상시키는 하얀 턱수염이 멋지다. 그에 의하면 볼프강 호수의 크기는 길이가 12Km, 폭이 2km이고 깊이는 최고 150m 정도 된다고 한다. 각종 물고기가 산다면서 그 이름을 대는데 독일어로 된 물고기의 이름을 우리말로 알 길이 없어 안타깝다. 유람선이 호수의 중간 지점을 지날 쯤부터 비가 내렸는데, 그로 인한 물안개 역시 볼 만했다.  

   길겐(Gilgen)에 도착하여 유람선에서 내려 1시간 동안 자유롭게 마을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알프스 산간의 조그만 산골마을이건만 집들이 그림처럼 예뻐서 마치 동화속의 나라 같다. 관광수입이 주 수입원인 듯 온갖 꽃으로 치장한 호텔들이 많은 것도 특색이다. 모차르트의 외갓집이 있고, 헬무트 콜 전 독일 수상이 여름이면 경호원 없이 이곳에서 1주일씩 휴가를 즐겼다고 한다.

   슈퍼마켓에 들러 간식거리도 사고,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다니다가 공동묘지를 발견했는데, 마을 한 복판에 있는 이 묘지 또한 아름다운 공원이나 다름없다. 공동묘지는 고사하고 화장터마저 혐오시설로 배척당하고 있는 우리의 정서와는 너무나 다르다. 이곳 사람들은 죽어서도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 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닐까.

   자유시간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돼지고기 튀김과 수프가 나오는 요리는 현지식답게 정말 짜다. 특히 수프는 소금 그 자체이다. 종업원에게 더운 물을 달라고 하여 부어 보았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돼지고기에 곁들여 나오는 쌀밥에 일행이 가져온 순창고추장을 비벼서 먹는 것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식사 후 이 날 투숙할 호텔이 있는 오이겐도르프(Eugendorf)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잘쯔부르크 교외에 위치한 마을인데, 주위에 스키장, 골프장 등이 있는 휴양지이다. 우리가 투숙한 홀쯔너비르트 호텔(Landgasthof Holznerwirt)은 1666년에 건축되어 340년이나 된 고풍스런 3층짜리 목조 건물이다. 내부는 현대식으로 리모델링을 하였고 바닥에 마루를 깔아 놓아서 특히 마음에 들었다. 호텔 안에는 잔디밭과 수영장도 있고, 고목나무 밑에 있는 원형 탁자들에서는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잠을 자기에는 일러서 집사람과 마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예쁘장한 빈 집에 “임대”라는 글이 씌어 있어 가까이 갔더니 주인 남자가 나와서 왜 그러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으로 그냥 구경하는 중이라고 하자 자기 집에서도 관광객에게 방을 빌려준다며 방이 10개 정도 있는 내부를 보여 주었다. 이를테면 펜션인 셈이다. 그러더니 호텔보다 값이 싸다면서 내년에도 놀러와 자기 집에서 묵으라고 팜플렛까지 내준다. 갈 수 있을까...
  
체코

   6월 29일. 이번 여행이 드디어 종착역을 향하고 있다. 아침 8시 30분 오이겐도르프를 출발하여 중간에 국경을 넘어 체코로 들어갔다. 차창을 통해 보이는 농촌의 집들이 오스트리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보다는 훨씬 정돈되고 한결 나아 보인다.
   폴란드나 헝가리, 그리고 체코의 농촌 풍경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한 필지 밭의 크기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어떤 밭은 경계가 아예 안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큰 밭을 한 개인이 소유한다면 분명 큰 부자일 것이다. 그러나 밭의 일반적인 크기가 그런 것으로 보아 공산주의국가 시절 집단농장의 유산이 아닐까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1) 체스키 크롬노프(Chesky Krmulov)

   낮 12시 30분. 체스키 크롬노프(Chesky Krmulov)라는 중세도시에 도착하였다. 체코 하면 의례히 프라하만 떠올리는 우리에게는 이 도시의 관광이야말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커다란 수확이다.
   프라하에서 남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진 이 도시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세도시의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그래서 유네스코가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마치 스페인의 톨레도처럼.    
   먼저 현지식의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도시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음식은 어쩔 수 없다. 돼지구이와 양파수프가 조금만 덜 짰더라면...

   높은 성문을 통해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완전 별천지인 세계가 펼쳐진다. 우선 도시의 생김새는 안동 하회마을과 같은 물도리동이다. 시가지를 휘감아 도는 블타바강(프라하로 흘러가는 이 강은 규모가 강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작고 오히려 서울의 중랑천 규모의 폭이 넓은 시내라고 하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에서는 뱃놀이가 한창이다.

   성곽을 따라 난 오르막길을 계속 오르면 시가지가 한 눈에 보이는 지점까지 다다른다. 여기서 내려다보면 지붕색깔이 붉은 색으로 거의 통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붉은 색은 확실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성의 정상부근에는 분수와 꽃과 잔디가 어우러진 바로크 양식의 정원이 관광객의 발길을 쉬어가게 한다.

   성의 하단부에 위치한 시가지에는 각종 기념품 상점들과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상점 앞에 마귀할멈 형상의 인형들을 걸어 놓은 곳이 많은 것도 이색적이다. 그런가 하면 각종 고문도구를 전시해 놓은 곳도 있다(이 곳은 유료). 끊이지 않는 관광객들 덕분에 다들 붐빈다.
  체스키 고롬노프에는 이 도시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높이 54.5m의 성탑(城塔)이다. 처음에는 유럽도시 어디를 가나 눈에 띄는 성당의 탑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성당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안에 전망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루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붉은 지붕 위에 초록색 첨탑을 올린 것이 특징이다.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비가 오락가락하여 시차를 두고 여러 번 시도한 끝에 겨우 이 성탑을 배경으로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2) 프라하

   체스키 그롬노프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오후 3시 30분 보헤미안의 고장 프라하에 도착했을 때는 차창을 때리는 빗방울이 제법 굵어져 있었다. ‘북쪽의 로마’로 불리는 프라하는 그야말로 천년 고도이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온갖 양식의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래서인가 연간 관광객이 1억 명이나 찾는다고 하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 아닐는지..
      

   그러나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가 본격적인 관광을 어렵게 한다. 한식당 “만나”에서 다소 이르다 싶은 저녁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된장찌개와 김치를 도대체 얼마 만에 먹어보는가. 프라하에는 한식당이 5군데 있는데, 음식값이 비싸 교민들은 거의 이용을 못한다고 가이드가 전한다.
   저녁을 먹고 프라하의 야경을 한 시간 정도 구경하였지만 ‘웬수놈’의 비가 그치지를 않아 힘만 들었다. 할 수 없이 내일을 기약하며 엑스포(Expo) 호텔로 향하였다. 비는 밤새 내리고 호텔 옆을 지나가는 기차소리까지 겹쳐 잠을 설쳤다.

   6월 30일. 오늘로서 여행을 마감하는 날이다. 프라하 시내관광만 예정되어 있는데도, 호텔 출발시간은 초지일관 여전히 아침 8시 30분이다.
   비를 맞으며, 그래서 한 여름인데도 추위에 떨며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프라하성. 프라하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블타바(Vltava)강의 서쪽 흐라트차니 언덕 위에 있다. 9세기 중엽부터 짓기 시작하여 14세기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궁전의 일부는 현재 대통령궁으로 사용되고 있어 위병이 부동자세로 지켜 서 있다. 그 위병이 서 있는 초소가 꼭 강아지 집을 세워 놓은 것 같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가이드의 말이 궁전 앞의 광장은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TV연속극을 찍은 곳이라고 하는데, 1년 내내 연속극 아니 TV와는 담을 쌓고 사는 나나 집사람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했다.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궁전 건물, 정원, 성당 등이 차례로 보인다. 930년부터 시작된 공사가 20세기 들어서서야 끝났다는 성 비트 성당(Katedrálă sv. Vita)은 마치 독일의 쾰른성당을 연상시킬 정도로 큰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내부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또한 일품이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무릅쓰고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함께 모자를 쓰고 들어갔건만 성당안내원이 나더러만 모자를 벗으라고 하고 집사람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한다. 여자는 실내에서도 모자를 쓸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전에 사법연수원교수 시절 여자연수생이 교실에서 모자를 쓰고 있으면 벗으라고 했었는데 실수했나? 하긴 유럽과 한국의 예절이 꼭 같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성 비트 성당에 비하여 바로 옆의 성 이지 성당(Bazilika sv. Jiří)은 단촐하고 예쁜 붉은색의 로마네스크식 선물이다. 921년에 세워진 것이라니 성 비트 성당보다 역사가 깊다.

    정문과는 반대편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성을 벗어나면 황금소로(Zlatá Ulička)가 나온다. 어린 시절 읽던 그림책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조그만 집들이 골목길 양쪽으로 늘어선 거리이다. 성 안에 비하여 훨씬 사람 내음이 풍긴다.
   성에서 일하는 집사, 시종들이 살던 거리인데, 연금술사들이 모여들면서 황금소로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의 집들이 기념품 가게로 바뀌었다. 그 중 한 집은 프란츠 카프카가 그의 작품 “성(城)”을 쓴 곳이라고 하여, 그의 이름이 걸려 있다.

   프라하 성 일대의 관광을 마치고 블타나강을 건너 시내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현지식으로 먹는 마지막 식사이다. 쇠고기스테이크라고 갖다 주었으나 다들 먹어보고는 고개를 젓는다. 정체불명이다. 같이 나온 빵은 왜 그리 질긴지... 현지식 식사에는 끝내 정을 못 붙이고 떠나는 게 아쉽다.

   식사 후 부다페스트 최대의 번화가인 바츨라프 광장(Václavské Namesti)으로 갔다. 비는 계속 내린다. 남쪽 끝 국립박물관(겉모습이 참으로 웅장하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으로부터 북쪽으로 앞으로 쭉 뻗은 바츨라프 광장은 광장이라기보다는 大路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아마도 길 가운데로 넓은 인도, 화단, 그리고 1969년의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바츨라프 동상 등이 있어 광장으로 불리는 게 아닌가 싶다.    
   각종 명품점을 비롯한 상점, 은행, 레스토랑, 카페 등이 줄지어 있다. 삼성전자와 LG 전자의 거대한 광고판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69년 공산독재로부터 벗어나 민주사회를 이루고자 이 곳 광장에 모여들었던 프라하시민들의 꿈이 소련군의 탱크 앞에 무참히 짓밟힌 후 결국 20년 후인 1989년 벨벳혁명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민주화를 이룬 이 혁명을 주도한 극작가 출신의 하벨은 민주화된 체코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앞서 말했듯이 슬로바키아의  레보카에 있는 자텔 호텔 205호에서 이 하벨대통령이 묵었던 방을 이번 여행 중에 내가 사용하게 될 줄이야.

   광장을 벗어나 화약탑을 거쳐 구시가 관장으로 갔다. 화약탑은 본래 1475년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세워진 것인데, 17세기 들어 화약 저장소로 사용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구시가지 광장은 11세기부터 형성된 고풍스런 거리이다. 여기에서는 틴 성당, 구시청사, 천문시계탑, 성 미쿨라슈 성당 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스바로프스키를 비롯한 각종 명품점들이 즐비한 상점가가 이어진다.

  틴 성당(Kostel Panny Marie Před Týnem)은 1365년에 세워진 고딕 양식(내부는 바로크 양식)의 성당이다. 남녀를 각 상징하는 두 개의 첨탑이 있는데 높이가 80m에 이른다. 자세히 보면 남자를 상징하는 첨탑이 약간 더 높아 남녀차별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단다. 성당 옆에 프란츠 카프카의 생가가 있다는데 가 보지는 못했다.  

   구시가 광장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구시청사 건물의 천문시계탑이다. 구시청사는 1338년에 세워졌고, 천문시계는 1364년에 설치되었다.
   이 시계는 인형, 천문시계(시계탑의 중간), 달력(시계탑의 하단)이 복합적으로 배치하여 만든 것이다. 매시 정각이면 시계탑 윗부분의 창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예수의 12사도를 상징하는 인형이 차례로 나와 춤추듯 움직이다 안으로 사라진다. 이어서 그 위로 닭이 나와 소리 내어 울면 타종이 끝난다.
   바로 그 모습을 보기 위하여 매시 정각 무렵이면 관광객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더불어 프라하의 유명한 소매치기들이 활개를 친다.
   나는 인형이 춤추는 모습을 6월 29일 저녁과 30일 낮 두 번 보았는데, 그 때마다 우리 일행 말고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볼 수 있었다. 하단의 달력 좌우로 4명의 사람조각이 있는데, 맨 우측의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은 변호사를 상징한다고 한다.  

   구시가지광장에서 까를교(Karlův Most)는 지척이다. 이 다리를 이용하여 블타바강을 건너면 프라하 성으로 이어진다. 1357년에 놓기 시작하여 1406년에 완공한 이 다리는 길이가 520m, 폭이 10m이다. 보행자 전용 다리이기 때문에 관광객뿐만 아니라 노점상도 즐비하다.
   다리 양쪽 끝에는 본래 통행료를 징수할 목적으로 세웠던 탑이 있고, 양쪽 난간에는 한 쪽에 15개씩 총 30개의 성상(聖像)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네포무크 동상은 성 요한 네포무크(Svateho Jana Nepomuckeho)의 순교(1393년 당시 왕인 웬체슬라스 4세로부터 행실을 의심받고 있던 왕비가 네포무크를 찾아와 고해성사를 하였는데, 이를 알게 된 왕이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말하라고 네포무크에게 요구하였으나 그는 종교인의 양심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화가 난 왕은 네포무크를 감옥에 가두고 혀를 뽑는 등 모진 고문을 가한 후 이 다리에서 떨어뜨려 죽였다)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이것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씩 만지고 가 반질반질하다.
   그 밖에도 17세기 예수 수난 십자가상, 성 비투스상 등이 유명하다.  

   시내관광을 마치고 나니 오후 4시. 바야흐로 동구여행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가 왔다. 프라하 공항으로 이동하여 그 동안 우리를 태우고 다녔던 체코인 버스 기사와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나는 저녁 7시 20분에 떠나는 대한항공 KE 936편 2등석(비지니스 클래스) 비행기표를 가지고 있었건만 프라하 공항의 대한항공 카운터에 근무하는 체코인 여직원이 나에게 준 탑승권은 1등석이었음을 비행기를 타고서야 알았다. 난생 처음 타 보는 1등석, 이 무슨 행운일까.(끝)